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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산행/한국 100名山

2008.02.21. [한국 100名山 47] 전북 진안 마이산

by 사천거사 2008. 2. 21.

마이산 산행기 

◈ 일시: 2008년 2월 21일 목요일 / 맑음

◈ 장소: 마이산 685m / 전북 진안군 진안읍

◈ 코스: 합미산성 → 광대봉 → 고금당 → 비룡대 → 봉두봉 → 탑사 → 남부주차장

◈ 시간: 4시간 30분



 마이산(馬耳山)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남쪽 약 3㎞ 지점에 있는 두 암봉으로 된 산. 높이는 서봉(암마이산) 685m, 동봉(수마이산) 678m이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경계에 있으며, 동봉과 서봉의 모양이 말의 귀처럼 생겼다 하여 마이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질은 백악기의 역암(礫岩)이다. 남쪽 비탈면에서는 섬진강 수계가 시작되고 북쪽 비탈면에서는 금강 수계가 발원한다. 신라 때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龍出山)이라 불렸고, 조선시대부터 마이산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동봉과 서봉 사이에 448개의 층계가 있고, 동봉 중턱의 화암굴에서는 약수가 솟는다.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인 탓에 나무는 그리 많지 않으나 군데군데 관목과 침엽수·활엽수가 자란다. 4월에는 공원 입구에서 3㎞에 걸쳐 벚꽃이 만발해 진안군에서 주최하는 벚꽃축제가 열린다. 동봉은 오를 수 없다. 또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른데, 봄에는 안개 속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 사이에서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화재로는 마이산탑(전북기념물 35), 마이산줄사철나무군락지(천연기념물 380)를 비롯하여 은수사(銀水寺)·금당사(金塘寺) 등의 고찰이 있다. 금당사에는 괘불탱(掛佛幀:보물 1266), 목불좌상(전북유형문화재 18), 석탑(전북문화재자료 122) 등의 문화재가 있다. 1979년 10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08:10  청주 아파트 출발. 오늘 산행지는 마이산이다. 가장 최근에 다녀온 것이 1987년이니 20년이 넘어서 다시 찾는 셈이다. 서청주 나들목으로 고속도로에 진입, 경부고속도로를 거친 다음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의 무주 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무주 나들목에서부터는 30번 국도를 따라 계속 달리면 용담호를 거쳐 진안군 마령면에 이르게 된다. 마령면에 입구에서 오른쪽 708번 지방도를 따라 1km 정도 가면 오른쪽에 작은 공터가 있고 그 옆에 마이산 등산로 안내판에 세워져 있다.  

 

10:25  등산로 안내판 옆 공터에 차를 세우고 산행 준비를 했다. 산행 준비라야 배낭 메고 등산화 끈 조이는 것이지만. 이내가 끼어 먼 곳의 사물이 조금 흐리게 보이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날씨는 맑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없다. 도로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길 왼쪽 이정표에 '합미산성 0.5km, 광대봉 3.1km, 보흥사 3.8km, 고금당 5.5km'라고 적혀 있다. 이 이정표에는 두 군데의 오류가 있는데, 하나는 '합미산성'을 '함미산성'이라고 표기했고, km를 KM로 표기한 것이다.      

 

조금 올라가니 왼쪽으로 성벽의 잔해가 보이고 한 굽이 돌아 오른쪽으로 내려가니 완벽한 성벽의 형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합미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성 안쪽에서 기와 조각과 도자기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산성의 정확한 축조연대나 축조 목적은 알 길이 없고.


▲ 합미산성으로 오르는 산행 기점 

 

▲ 합미산성 성벽 잔해 [10:33] 


10:56  작은 암봉을 우회했다. 광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뚜렷하고 그 끝에 광대봉이 우뚝하게 솟아 있다. 11시 18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겨울이 저만치 물러갔는지 햇볕이 따뜻하다. 11시 29분, 오른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보흥사에서 목탁소리와 함께 불경을 읽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제 날짜로 작년 음력 10월 15일부터 3개월간 94개 선원에서 2222명 스님들이 수행한 冬安居가 해제되었다는데. 누구를 위한 冬安居 수행일까? 광대봉 정상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안거(安居)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기후조건에 따라 여름(음력 4월 보름~7월 보름)과 겨울(음력 10월 보름~정월 보름)에 각각 夏安居와 冬安居를 하고 있다. 석가모니 당시 인도에서 유행(遊行)하는 출가 수행자들이, 우기에 땅 속에서 기어나오는 작은 동물들을 밟지 않으려 유행을 잠시 중단한 것이 안거의 기원이다. 수행 승려들은 이 기간 공부와 수행에만 전념해야 하며 선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안거를 시작하는 것을 결제, 끝내는 것을 해제라고 부른다.


▲ 암봉을 우회한 다음 능선에서 본 광대봉 [11:13]

 

▲ 잠시 휴식을 취하며 [11:18]  


11:30  마이산의 바위는 콘크리트 더미 같다. 마이산을 이루는 주된 바위는 사질역암인데, 이것은 모래와 자갈이 섞여 굳은 바위를 말한다.  사질역암은 흔히 볼 수 있는 암석이지만, 바다 속이 아닌 내륙지방인 이곳에 역암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마이산 정상 부근에서 7천만 년전에 살았다고 하는 쏘가리를 닮은 민물고기와 조개류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이산 자리가 먼 옛날에는 호수나 강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던 것이 백악기에 이르러 지층이 솟아 오름으로써 지금의 고지대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지배적이다.

 

광대봉 바로 아래까지 왔는데 올라가는 길에 철조망이 쳐져 있고 '등산로 폐쇄'라는 팻말이 박혀 있다. 등산로가 왜 폐쇄되었을까? 아까 광대봉 정상에서 어른대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일단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우회를 했다. 우회를 마치자 왼쪽으로 광대봉 올라가는 길에 역시 철조망과 함께 '등산로 폐쇄'라는 팻말이 있었다. 숫제 광대봉을 못 올라가게 한 것이다. 어쩌나? 광대봉에 올라가면 전망이 좋다는데. 폐쇄되었으면 내가 열면 되지 뭐. 철조망 옆으로 난 샛길로 들어갔다. 광대봉은 거대한 암봉이라 50여미터의 밧줄이 정상 부근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 마이산 바위의 독특한 암질 [11:31]  


11:45  한쪽에 삼각점이 박혀 있는 해발 609미터의 광대봉 정상에 도착. 듣던 대로 전망이 좋다. 멀리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내만 끼지 않았다면 금상첨화인데. 오른쪽 계곡에 자리잡은 보흥사도 잘 보인다. 광대봉 정상에서 내려와 고금당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11시 59분, 오른쪽으로 보흥사로 내려가는 갈림길 지점을 통과. 여기서 고금당까지는 50분 거리였다. 고금당 쪽으로 걸음을 뗄 때마다 마이산 암봉의 모습이 변하고 있다.


▲ 광대봉 정상에서 

 

▲ 광대봉 정상에서 본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 광대봉에서 내려다 본 보흥사 

 

▲ 이내에 싸인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12:04] 

 

▲ 암마이봉의 모습 [12:14] 


12:47  고금당 나옹암에 도착. 왼쪽 아래에 있는 나옹암은 온통 금빛이고 오른쪽 위에 있는 고금당은 지붕이 모두 금빛이다. 진짜 금은 아니겠지? 이곳 고금당에서 남부주차장으로 바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12시 57분, 고금당을 지나 따뜻한 양지쪽 바위에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멀리 왼쪽으로 2층 누각인 비룡대가 보이고 그 뒤로 암마이봉이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금당 나옹암(古金塘 懶翁庵)

 

이곳은 고려말의 고승 나옹선사의 수도처로 전해오는 자연암굴로 '나옹암'이라 하며, 원래 금당사가 자리잡고 있었던 터라 일명 '고금당'이라고도 한다. 나옹(1320~1376)은 법호로 법명은 惠勤이며 속성은 牙씨다. 20세에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에서 득도하였고, 그 뒤 중국으로 건너가 인도승 지공 화상으로부터 법을 받아 1358년 귀국하여 고려불교 중흥에 많은 공을 세웠다. 1371년에는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고, 보우, 무학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土窟歌 등 만은 시와 가사를 남기고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 고금당 나옹암 건물 모습 

 

▲ 지붕이 금빛인 고금당 나옹암 

 

▲ 비룡대와 암마이봉 [12:55]  


13:24  비룡대에 도착. 아치형의 철계단을 올라가니 2층 누각 형태로 지어진 비룡대가 서 있다. 이 비룡대가 있는 봉우리는 해발 527m의 나봉암이다. 비룡대에서는 5개의 동글동글한 암봉이 연이어진 삿갓봉이 보이고, 그 뒤로 암마이봉 왼쪽으로 숫마이봉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13시 32분, 오른쪽으로 금당사로 내려가는 갈림길 지점에 도착. 13시 43분, 오른쪽으로 부부시비로 내려가는 갈림길 지점에 도착. 13시 50 북부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갈림길 지점에 도착.


▲ 2층 정자 전망대 비룡대 

 

▲ 비룡대에서 본 삿갓봉,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 비룡대가 있는 나봉암 

 

▲ 비룡대 밑에서 암마이봉을 배경으로 [13:29]

 

▲ 북부주차장 삼거리 갈림길 [13:50] 


13:57  제2쉼터에 도착. 제1쉼터는 어디 있었지? 이곳에는 벤취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기에 좋은 장소였다. 쉼터 전망대에 서면 지금까지 지나온 광대봉, 고금당, 비룡대 등이 한 눈에 들어오고 왼쪽 아래로 남부주차장도 보인다. 전망후 출발.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점점 암마이봉에 가까워지는데, 마치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 벤취가 여러 개 있는 제2쉼터 

 

▲ 제2 쉼터에서 바라 본 비룡대 능선 

 

▲ 가까이서 본 암마이봉 [13:59] 


14:09  해발 540m의 봉두봉 통과. 오른쪽 위에 헬리콥터 착륙장이 있다. 탑사로 내려가는 길 왼쪽으로 천황문에서 암마이봉까지의 등산로가 폐쇄되었다는 안내판이 있었다. 식생을 복원하기 위한 자연휴식년제가 2014년까지 시행된다는 것. 이런! 오늘 정상을 못 올라가겠네. 정상은 못 올라가더라도 구경이나 실컷 해야지.

 

암마이봉의 남사면에는 마치 공룡알로 찍어 누른 듯, 거인의 발자국인 듯한  형상을 한 커다란 구멍들이 푹푹 패여있다. 내외부의 열차이로 생기는 이러한 풍화 현상을 '타포니'라고 부른다. 이 타포니는 동, 서, 북쪽에는 없고 오직 남쪽 면에서만 볼 수 있다. 마이산의 타포니처럼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대규모의 타포니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현상이라고 한다.


▲ 봉두봉 표지석 

 

▲ 가까이서 보면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암마이봉 [14:17] 


14:21  도로에 도착. 탑사에서 남부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다. 도로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탑사가 보였다. 


▲ 탑사에서 남부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내려가는 산행로 입구


14:24  탑사에 도착. 천황문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 골짜기에 크고 작은 석탑들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세워져 있었다. 중앙에 자리잡은 대웅전 뒤로도 석탑이 있는데 출입금지 지역이다.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는데 오늘도 사진을 찍기 위해 온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갑용 처사가 쌓았다는 석탑들. 태풍이 불어도 끄덕없다는 석탑들. 사람의 손이 얼마나 무서운가? 현대의 최신 과학 지식을 총동원한다 해도 기계로는 저렇게 쌓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이산 정상인 암마이봉을 올라갈 수 없으니 은수사나 천황문을 굳이 갈 필요가 있겠는가. 생략하고 남부주차장을 향해 출발. 탑사에서 남부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포장도로다. 산행객보다는 일반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길이기도 하다. 오늘이 평일인데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꽤 많다. 


마이산 석탑(石塔)

 

마이산 석탑은 은수사 경내에 있는 80여 기에 달하는 신비감을 더해주는 석탑군을 말한다. 천연기념물(제35호)로 지정된 이 석탑군은 이성계가 억센 지기를 누르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몽골군이 쌓았다는 설도 있지만, 오대산에서 수도중이던 이갑용 처사가 1885년  신의 계시를 받고 이곳으로 들어와, 30여 년에 걸쳐 솔잎으로 생식하면서 낮에는 기도하고, 밤에만 정성을 바쳐 쌓았다는 얘기가 가장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갑용 처사는 1860년 3월 전북 임실에서 효령대군의 15대손 이성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을 치른 후에도 3년간 시묘를 했다. 그후 나라가 어지럽고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아 명산을 찾아 수도하던 중, 신의 계시로 30 여 권의 신서를 남기며 탑을 쌓은 다음 1957년 98세로 타계했다. 이 처사의 정신이 어려있는 석탑은 폭풍이 몰아쳐도 흔들리기는 하나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 마이산 탑사 전경 

 

▲ 마이산 탑사 표지석과 함께 

 

▲ 마이산 탑사 전경 

 

▲ 마이산 탑사 전경  


14:44  탑영제 왼쪽으로 夫婦詩碑가 있다. 1984년에 세워진 담락당과 삼의당 부부의 시비를 말한다.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씨는 남원땅 서봉방에서 태어나 1786년에 혼인한 부부 시인이다. 삼의당 김씨의 시문은 우리나라 규중 한시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시비에는 부부의 시가 실려 있다. 塔影堤는 마이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고인 저수지인데 마이산 봉우리가 거울처럼 비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꽁꽁 얼어있어 물에 비친 마이산은 볼 수 없었다.      

 

조금 더 내려오면 오른쪽을 금당사가 있는데 이곳도 절집의 지붕과 석등 등이 모두 금빛이다. 이곳도 실제 금은 아니겠지. 금년 1월에 들른 말레이시아의 모스크는 진짜 금으로 지붕을 장식했다는데... 금이 그렇게 좋은가? 하긴, 날마다 금값이 오르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보니 좋긴 좋은가보다. 금당사를 지나면 음식점 거리인데, 이곳은 흑돼지 숯불구이 요리가 전문이었다. 음식점마다 앞에 숯불을 피우고 직접 돼지고기를 굽고 있었다.


▲ 탑영제 왼쪽에 있는 부부 시비 

 

▲ 얼어붙은 탑영제 위의 마이산 암봉 [14:49] 

 

▲ 지붕과 석등이 금빛인 금당사 [14:55] 

 

▲ 흑돼지 숯불구이가 전문인 마이산 식당가 [14:47]  


14:55  남부주차장에 도착. 마침 관광 안내소가 있어 마령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물었더니 6시 얼마에 있단다. 이런! 북부주차장에서는 진안이나 마령으로 가는 버스가 자주 있단다. 택시를 불러줄 수 있으냐고 하니까 흔쾌히 가능하다고 한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안내소 직원이 커피를 권한다. 안 그래도 먹고 싶은 터였었는데 거절한다는 것은 焉敢生心이다. 마이산이 도립공원이라 전라북도에서 운영하는 안내소인 모양인데 직원들이 무척 친절했다. 15시 10분에 마령 개인택시를 타고 주차장을 출발했다. 내 차가 주차된 곳까지는 10분 거리였다. 택시요금은 5,000원. 

 

15:20  주차 된 곳에 도착. 아까 안내소에서 청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물었더니, 지난 연말에 익산-장수간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었기 때문에 진안 나들목으로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익산을 거쳐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단다. 진안 나들목은 30번 국도를 따라 다시 진안 쪽으로 와야했다. 차창 밖으로 마이산의 두 봉우리 모습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진안 나들목에서 고속도로 진입, 쉬지 않고 청주까지 계속 달렸다.  

 

17:15  청주에 무사히 도착. 20여년 만에 다시 찾은 마이산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 변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지, 산의 모습은 아니다. 단지 예전에는 암마이봉을 오를 수 있었는데 휴식년제 때문에 2014년까지 오를 수 없다는 것이 변했을 뿐. 그러나 그렇게 만든 것 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이산의 변함은 젼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