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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 정맥/백두대간

2007.12.16. [백두대간記 17] 늘재→버리미기재

by 사천거사 2007. 12. 16.

백두대간 제17구간 종주기

◈ 일시 : 2007년 12월 16일 일요일

◈ 구간 : 늘재 → 청화산 → 조항산 → 고모치 → 밀재 → 대야산 → 불란치재 → 곰넘이봉 → 

            버리미기재  

◈ 거리 : 17.5km   

◈ 시간 : 10시간 20분



06:20  청주 출발. 평소 어두운 산길을 걷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날이 밝아오는 것과 산행 시작 시간을 맞춘다고 조금 늑장을 부렸더니 출발 시간이 늦어졌다. 송면택시 기사분에게 전화를 거니 이화령을 가는 중이라고 하면서 늘재에 차를 두고 산행을 한 다음 버리미기재에서 전화를 하면 늘재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그러지 뭐. 늘 그렇듯이, 미원과 청천을 지나 원탑재를 넘어 화양동을 거쳐 송면에서 화북방면으로 달렸다. 청천부터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더니 늘재 아래에 있는 청화산농장 주차장에 도착을 했을 때는 산능선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07:28  청화산농장 주차장에 도착. 세상이 조용하다. 넓은 주차장에 서리 맞은 차 한 대만 달랑 세워져 있고. 산행 준비를 한 다음 늘재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늘재에는 차를 세울 만한 곳이 없어 농장 주차장에 세운 것인데 올라가다 보니 창고 건물 앞에 넓은 공터가 있다. 이곳에 세워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늘재가 코 앞이다.


▲ 늘재 아래에 있는 청화산농장


07:44  늘재에서 화북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왼쪽으로 산행로가 나 있다. 산행로에 들어서니 왼쪽으로 산신각(백두대간 성황당) 건물 지붕이 보인다. 시작부터 가파르다. 한 등성이를 올라서니 완만한 능선길이다. 바람은 불지 않지만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싸늘하게 만든다. 산행로 왼쪽은 산약초 재배 단지라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산행로를 따라 줄이 쳐져 있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산행로 걷기에도 바쁜데...


▲ 아침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는 늘재

 

▲ 산길에 접어들면서 왼쪽으로 보게 되는 산신각


08:01  전망바위가 있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정면으로 잔설에 덮인 속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웅장하다. 잠시 감상. 산행로에는 계속 앞서 간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언제 출발한 사람들인가? 종종 암릉길이 나타나고 조금 가파른 곳에는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아직 바람은 없지만 공기는 차갑다.


▲ 햇살을 받아 빛나는 잔설 덮인 속리산 주능선

 

▲ 바위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며


08:19  靖國祈願壇에 도착. 속리산 주능선 쪽으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속리산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 백악산도 우뚝하다.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이곳이 명당인 것 같은데,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시설을 해놓은 것일까? 비석의 몸돌 중앙에는 ‘靖國祈願壇’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과 왼쪽에는 ‘白衣民族中興聖地’ ‘白頭大幹 中元地’라는 글자가 한자로 병기돼 있다.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제단이라는 내용이다. 누가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놓지 않았지만 이제 백두대간은 현대적 산악신앙의 경배대상으로 자리 잡았음을 실감하게 한다. 휴식후 출발. 암릉이 섞인 오름길이 계속 이어졌다.


▲ 정국기원단 표지석과 함께

 

▲ 정국기원단 표지석에서 본 백악산

 

▲ 정국기원단 표지석 전경, 전망이 빼어나다


09:17  900봉 지나 헬리콥터 착륙장에 도착. 눈에 덮여 있는 착륙장에는 앞서 간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목도리를 꺼내 목에 두른 다음 귀와 입을 감쌌다. 훨씬 낫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속리산 주능선이 운무 속에 들어갔고 방금 지나온 900봉이 뚜렷하다. 암릉을 오르다가 미끄러졌다. 아이젠을 차야 하나? 조금 더 그냥 올라가보자. 아직까지는 스틱으로 버틸만 하다.


▲ 눈에 덮인 헬리콥터 착륙장

 

▲ 조금 전에 지나 온 봉우리들


09:19  청화산 정상에 도착. 아무도 없다. 암봉 위에 정상표지석만 외롭다. 사진 찍고 조항산을 향하여 출발.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이다. 길이 미끄러워 다리에 힘이 많이 간다. 아이젠을 꺼내 착용을 했다. 훨씬 낫다. 9시 32분, 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곳에 도착. 백두대간은 왼쪽으로 감아 돌아 내려가야 한다. 오른쪽은 시루봉으로 가는 능선. 눈이 덮인 산죽 사이로 산행로가 예쁘게 나 있다. 이런 길도 있구나.


▲ 청화산 정상에서

 

▲ 삼거리 이정표

 

▲ 눈이 쌓여 있는 조릿대 사이로 산행로가 나 있다


10:03  휴식을 취하며 양갱을 간식으로 먹었다. 조항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지루하다. 왼쪽으로 의상저수지에서 시작된 임도가 커다란 U자를 그리며 산 허리를 가르고 있다. 눈을 들어 앞을 보면 온통 바위로 되어 있는 조항산 정상이 보이고. 한참을 걸은 후 다시 왼쪽을 내려다보니 의상저수지가 아담하다. 삼송리와 입석리 마을도 저수지 양쪽으로 오밀조밀 자리잡고 있다. 갓바위재 쪽에서 산행객 10여명이 오고 있다. 어디서 산행을 시작했나? 행색으로 보아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사람들 같은데... 오늘 산행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 갓바위재로 연결되는 임도

 

▲ 조항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 왼쪽으로 의상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11:15  갓바위재에 도착. 왼쪽으로 내려가면 임도를 따라 의상저수지에 닿을 수 있다. 갓바위재를 지나면 바로 헬리콥터 착륙장이 나온다. 갓바위재에서 조항산으로 오르는 길은 암릉길로 약간 위험한 곳도 있었지만 긴장을 풀지 않고 주의만 기울이면 큰 문제는 없다.


▲ 갓바위재, 왼쪽으로 내려가면 임도와 만나고 의상저수지에 닿게 된다

 

▲ 갓바위재 바로 위에 있는 헬리콥터 착륙장


12:04  조항산 정상에 도착.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작은 표지석만 외롭게 나를 반기고 있었다. 올해 6월 3일에 올랐을 때는 녹음이 짙었었는제 지금은 주변이 너무나 황량하다. 바로 출발. 점심을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고모치까지 내려가기로 했다. 경사가 있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이정표가 있다. 고모치 0.9km. 왼쪽은 의상저수지에서 지능선을 따라 조항산으로 올라오는 길이다. 고모치까지의 내리막길은 경사가 급해 눈이 쌓인 겨울에는 아이젠과 스틱이 필수였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팀이 고모치에서 올라오고 있다.


▲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조항산 정상

 

▲ 삼거리 이정표, 왼쪽으로 가면 의상저수지에 이르게 된다


12:42  고모치에 도착. '대야산 3.8km' 라고 이정표에 적혀 있다. 고모치에서 조금 올라가 양지에서 점심을 먹었다. 김밥과 물, 그리고 커피 한 잔. 날이 차가워서 그런지 따뜻한 물이 좋다. 13시 1분에 출발. 오름길 오른쪽으로 둔덕산으로 이어지는 암릉이 아름답다. 마귀할미 통시바위가 있다는데 어느 것인지 모르겠다.  


▲ 눈에 덮인 고모치

 

▲ 둔덕산으로 이어지는 암릉


13:27  둔덕산 삼거리인 889봉에 도착. 오른쪽은 마귀할미 통시바위를 거쳐 해발 969m의 둔덕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왼쪽이 백두대간으로 가는 길인데 봉우리 2개를 넘어가니 집채만한 바위가 있고 다시 안부를 지나 작은 봉우리를 하나 넘으니 밀재다.


▲ 둔덕산 갈림길, 오른쪽이 둔덕산으로 가는 길이다


14:24  밀재에 도착. 대야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이들은 모두 다래골을 거쳐 용추계곡으로 하산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왼쪽은 농바위골을 거쳐 청천면 삼송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밀재에서 대야산까지는 경사가 급한 오름길이 계속 이어졌다. 위로 올라갈수록 바위가 커지고 암릉 구간도 늘어났다. 산행로 왼쪽에 있는 코끼리 바위와 대문 바위를 지나 올라가니 왼쪽으로 중대봉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밀재에 서 있는 이정표

 

▲ 대야산 오르는 길에 만난 코끼리 바위

 

▲ 코끼리 바위 바로 위에 있는 대문 바위

 

▲ 중대봉의 모습


15:12  중대봉 삼거리에 도착. 왼쪽은 중대봉으로 가는 길인데 농바위골을 거쳐 삼송리로 내려갈 수 있다. 오른쪽 뒤로 대야산 정상이 보인다. 빤히 보이는 곳이지만 대야산은 정상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대야산 정상 부근은 모두 암반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암릉을 내려갔다가 다시 밧줄을 타고 올라야 한다. 거리는 별로인데 10분이나 시간이 걸렸다.


▲ 중대봉 삼거리 이정표


15:23  대야산 정상에 도착.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야산만 찾은 사람들도 없다. 시간이 벌써 오후 3시 30분이 가까워졌으니 거의 하산을 마쳤어야 할 시간이다. 금년 6월 6일에 삼송리에서 중대봉을 거쳐 대야산을 오른 적이 있다.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섯 달 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시간이 너무 빠른 것인가, 아니면 내가 시간을 못쫓아가는 것인가? 대야산 정상에서는 전망이 좋아 사방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촛대봉과 곰넘이봉 뒤로 장성봉에서 구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뚜렷하고 구왕봉 옆에서 희양산 암벽이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다.


▲ 대야산 정상에서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대야산 정상에서 버리미기재까지 3시간은 잡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6시 30분은 되어야 버리미기재에 도착하게 된다. 5시 30분이면 어두워지기 시작할 텐데 과연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헤드렌턴이 있으니 조금 안심이 되기는 하지만 눈이 덮인 겨울산이라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시작을 했으니 끝장을 봐야지. 죽기밖에 더할라고. 그러나 이 생각이 너무나 무모했다는 것이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붉은 페인트로 화살표와 함께 '大幹'이라고 적힌 바위를 넘어 조금  내려가니 경사가 거의 90도에 가까운 암벽 하산길이 나타났다. 굵은 밧줄이 늘어져 있어 스틱을 손으로 쥔채 한 구간을 내려갔다. 다음 구간을 보니 발 디딜 곳이 전혀 없는 그런 길이었다. 일단 스틱을 아래로 던졌다. 스틱은 아래 구간 테라스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벗어난 곳에 떨어졌다. 양손으로 밧줄을 잡고 발로 직벽을 지지하며 내려오려고 했으나 눈이 얼어 붙어 있어 전혀 지지가 되지 않았다. 오직 팔의 힘만으로 밧줄을 잡고 내려와야 했다. 간신히 테라스에 도착을 했다. 던져 놓은 스틱을 간신히 회수한 다음 접어서 배낭에 꽂았다. 내려가는 데에 스틱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바위 직벽이 연속해서 나타났다. 조금 전처럼 얼굴을 벽쪽으로 향하게 하고 한 발을 내 디뎠는데 팔 힘이 빠져서 그런지 도저히 지탱을 할 수가 없다. 이대로 줄을 놓치면? 죽음이다.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다시 바로 위의 테라스로 올라갔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생각을 했다. 進退兩難이다. 가족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가는 것이 쉽다. 방금 전 자세로는 내려가기가 힘드니 자세를 바꾸어보면 어떨까? 배낭을 멘 몸 전체를 최대한 바위에 밀착시키고 양쪽 발로 바위를 최대한 버팅기며 양 손으로 두 개의 밧줄을 하나씩 잡고 최대한 천천히 몸을 미끌어뜨렸다. 성공이다! 가장 위험한 지역을 통과한 것 같다. 그 아래도 급경사이었지만 발 디딜 곳이 많아서 큰 문제 없이 내려올 수 있었다.

 

16:00  암벽지대를 다 내려온 것 같다. 100여미터의 바위벽을 내려오는데 35분간의 사투를 벌였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순간이다. 삶과 죽음이 순간에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실감했다. 여기서 촛대재까지는 계속 내리막이었다. 촛대재로 내려오며 잠깐 몸을 돌려 보니 방금 내려온 눈 덮인 대야산 정상이 나뭇가지 사이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무서운 놈! 그래도 오늘 내가 너를 이겼다. 앞을 보니 바위로 된 촛대봉이 올려다보인다. 저것은 또 어떻게 넘어가지?


▲ 암벽지대를 내려온 지점에서 시작되는 눈길, 경사가 매우 급하다

 

▲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대야산

 

▲ 촛대봉의 모습


16:23  촛대재에 도착. 오른쪽은 월령대로 내려가는 길이다. 시간이 너무 지났는데 그냥 월령대로 내려갈까? 아니야. 그 위험한 바위벽도 내려왔는데. Go! 시간을 단축할 요량으로 걸음을 빨리하기 위해 아이젠을 벗었다. 야호, 다행히도 촛대봉을 직접 올라가지 않고 왼쪽으로 우회하는 길이 나 있었다. 신난다. 16시 34분에 촛대봉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났다.


▲ 촛대재에 있는 이정표


16:40  불란치재에 도착. 왼쪽은 상관평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불란치골을 경유해서 벌바위로 내려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이 길이 주된 주민들의 통행로이었지만 버리미기재로 새 도로가 나는 바람에 사람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는 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새 도로가 난 버리미기재를 불란치재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원 이름은 버리미기재다. 16시 52분에 헬리콥터 착륙장에 올랐다. 오늘 구간에는 헬리콥터 착륙장도 많다. 또 있으려나?

 

집채만한 바위들이 연속으로 나타난다. 모양이 제각각이라서 볼만도 한데 오늘은 그런 한가한 여유를 부릴 겨를이 없다. 부리나케 걸어야 한다. 잠시 한 걸음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니 점점 어둠에 싸여가는 대야산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저 곳이 내가 목숨을 걸고 내려온 바로 그곳인가? 산은 위대하다. 절대 얕보아서는 안 된다. 733봉을 지나 조금 운행을 하니 높이가 733m로 같은 곰넘이봉이다. 정상 표지석이 키보다 높은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자칫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 4거리 안부인 불란치재

 

▲ 곰넘이봉 가는 길에 만난 헬리콥터 착륙장

 

▲ 점차 어둠에 싸여가고 있는 대야산

 

▲ 대야산의 모습이 그로테스크하다


17:24  곰넘이봉에 도착. 바위를 돌아 올라가니 넓고 편편한 바위 끝에 '곰넘이봉 733'이라고 쓴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바위는 칼로 쪼갠 듯 전체의 3분의 1지점이 갈라져 있었다. 바위를 내려온 다음,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안부에 내려서니 앞에 봉우리가 가로 막고 있는데 왼쪽으로 우회하는 길이 있고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반원을 그리듯이 우회를 해서 봉우리를 넘어 오는 길과 만났다. 해는 오래 전에 완전히 졌지만 여명이 남아 있어 헤드렌턴을 켤 정도는 아니다. 더우기 달이 휘영청 밝아 하얀 눈길이 선명하다. 17시 54분에 이번 구간 마지막 헬리콥터 착륙장을 지났다.

 

택시기사와 통화를 하기 위해 휴대전화 전원을 켜니 배터리가 저전압이라는 경고 메시지와 함께 자동으로 꺼져 버린다.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 아마 통화가 불능인 지역이라 배터리 방전을 막기 위해 자동으로 꺼지는 모양이다. 몇 번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지. 통화가능 지역까지 가는 수밖에. 이후 경사가 급한 길을 10여분 내려가니 오늘의 산행 종점인 버리미기재다.


▲ 곰넘이봉 정상 표지석

 

▲ 곰넘이봉 정상에서, 벌써 어둠이 깔렸다

 

▲ 버리미기재에 내려가기 전에 만난 헬리콥터 착륙장


18:04  충북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와 경북 상주시 화북을 연결하는 922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버리미기재에 도착. 벌써 어둠이 깔렸다. 감시초소는 비어 있고 철책만 흉물스러운 자태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휴대전화를 다시 꺼내 전원을 켰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저전압이라며 다시 자동으로 꺼진다. 야, 이거 난감하네. 관평까지 걸어가야 하나. 화북 쪽에서 넘어오는 차도 없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관평 쪽으로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눈 덮인 도로에 달빛이 떨어져 길은 환하다. 오늘 참 많이 걷는구나. 산길 걷는 것도 모자라서 포장도로까지 걸어야하나. 예전에는 포장도로 걷는 것이 좋았는데 오늘은 왠지 싫다. 도로 오른쪽 계곡의 물소리가 처량하게 들린다.


▲ 완전히 어둠에 싸인 버리미기재의 감시초소와 출입금지 안내판


다시 휴대전화 전원을 눌렀다. 안 된다. 조금 있다가 다시 눌렀다. 아, 된다. 휴대전화 통화가능 지역에 들어섰나 보다. 다행이다. 택시기사분과 통화를 한 다음 관평 쪽으로 계속 걸었다. 마땅히 기다릴 곳도 없다. 18시 32분에 택시와 도킹. 택시 헤드라이트 불빛이 나락에 빠진 나를 건져주는 동앗줄 같다. 기사분은 대뜸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냐'고 묻는다. 오늘 산행이 힘들었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이 기사분은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산행객들을 전문으로 이동시켜 주는 분으로 이 지역의 백두대간에 대해서 훤하고 꿰고 있었다. 그러면서, 대야산 정상에서 촛대봉으로 내려오는 길이 백두대간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고 특히 겨울에 혼자 내려올 때는 목숨을 걸어야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내가 오늘 직접 경험했지만, 사실이다.

 

18:50  청화산농장에 도착. 어둠 속에 내 차만 덩그렇다. 기사분과 다음을 약속하고 내 차를 돌려 아침에 왔던 길을 거꾸로 달렸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홀가분하다. 오늘 정말 힘든 하루였다. 하긴, 사람이 걸어가는 인생길에도 쉬운 길이 있고 힘든 길이 있지 않은가? 오늘은 힘들었지만 다음은 쉽겠지. 어쨌든 겨울산의 단독 산행은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20:05  청주 도착. 다리가 뻐근하고 몸이 노곤노곤하다. 오늘 코스는 지금까지의 17개의 구간 중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모르지, 앞으로 더 힘든 구간이 있는지. 오늘 구간 종주를 무사히 마치면서 앞으로 어떤 힘든 구간이라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감만 앞선 무모한 종주는 큰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구간 종주는 나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