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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 정맥/백두대간

2007.12.02. [백두대간記 16] 갈령→늘재

by 사천거사 2007. 12. 2.

백두대간 제16구간 종주기 

◈ 일시: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 코스: 갈령 → 형제봉 → 속리산 천왕봉 → 문장대 → 밤티재 → 늘재  

◈ 거리: 16.2km + 1.2km(접근 거리)  

◈ 시간: 10시간 24분


 


05:47  청주 아파트 출발. 오늘은 백두대간 제16구간 갈령에서 늘재까지 종주를 하는 날이다. 라디오에서 비와 눈 소식이 연신 흘러나온다. 눈이라면 몰라도 12월에 웬 비? 미원과 청천을 지나 화양동으로 접어들었다. 해발 390m의 원탑재를 넘은 다음 송면에서 상주 쪽으로 직진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도로에 운행하는 차는 거의 없다. 오늘 산행 종점인 늘재를 지나니 오른쪽으로 용화에서 넘어오는 도로와 문장대로 가는 도로가 연이어 나타났다. 화북면소재지에 도착, 주차를 한 다음 갈령까지 차 운행을 부탁한 기사분에게 전화를 했다. 차로 화북에서 갈령까지는 잠깐의 거리였다.

 

07:16  갈령에 도착, 잔뜩 흐린 날씨다. 지난 주에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헬리콥터 착륙장을 지나면서 거대한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변신을 한다. 싸늘한 아침 공기가 콧속을 파고 든다. 코가 아리다. 급한 오름길을 올라서니 정면으로 형제봉에서 천황봉 쪽으로 뻗은 백두대간이 여명과 운무 속에서 신기루처럼 하늘거리고 있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이다.


▲ 갈령 표지석

 

▲ 갈령 위에 있는 헬리콥터 착륙장

 

▲ 형제봉에서 속리산 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


07:52   갈령삼거리에 도착. 삼거리 공터에 텐트가 한 동 있고 한 남자가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텐트를 지나치며 보니 남자와 여자 산행객이 텐트 안에 있었다. 어젯밤에 야영을 한 모양이다. 안 추운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인가? 여기서 형제봉까지는 700m. 계속되는 오름길이다. 8시 4분에 짐승소리인지 개소리인지 모를 굉음을 세 번 들었다. 사냥철이 시작되었다는데 이거 총 맞는 거 아냐? 사냥철에는 원색의 옷을 입으라고 하기에, 오늘은 빨간색 자켓과 푸른색 모자로 코디를 했는데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 갈령 삼거링 이정표

 

▲ 형제봉을 오르는 도중에


08:12  형제봉에 올랐다. 바람이 세다. 춥다. 형제봉 정상은 암봉인데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니 정상표지석이 있었다. 청주에 있는 백두산장산악회에서 백두대간 2차 종주를 마치고 기념으로 2007년 10월 6일에 세운 것이다. 보기에 좋다. 표지석이 없는 산 정상에 표지석 세우는 캠페인을 벌여서 산악회마다 하나씩 표지석을 세웠으면 좋겠다. 기념도 되고 다른 사람에게의 배려도 되고. 일거양득이 아닐까? 비가 곧 쏟아질 같이 구름 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과연 여기는 비가 올까 아니면 눈이 올까? 8시 43분,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암봉으로 이루어진 형제봉 정상 모습

 

▲ 형제봉 정상에서


08:46  피앗재에 도착, 왼쪽은 만수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예전에 천황봉 가느라고 한 번 올라온 적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령에서 이곳 피앗재까지 백두대간 종주 한 구간으로 정할 수도 있다. '천황봉 5.8km, 형제봉 1.6km'라고 이정표에 적혀 있다. 5.8km라. 생각보다는 먼 길이다. 낙엽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후두둑거린다. 비옷을 꺼내 입었다. 비옷은 비를 막아주기도 하지만 바람도 막아주기 때문에 일거양득이다. 피앗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데 흔적이 거의 없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몇 개 지나니 표지기가 많이 걸려있는 667봉이다. 비는 조금씩 계속 내린다.


▲ 피앗재, 왼쪽이 만수계곡으로 내려가는 길


09:23   667봉에 도착. 오른쪽으로 장각동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는데 다니지 않는지 흔적이 희미하다. 9시 41분, 드디어 비가 서서히 눈으로 변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은 진눈깨비였다가 점차 확실한 눈 모양이 되어 내린다. 9시 58분, 네모난 시멘트 블럭이 깔려 있는 것을 보니 헬리콥터 착륙장 같은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지 잡목이 자라고 있다.

 

봉우리를 내려서서 능선을 걷다보니, 등산객 여남은 명이 눈을 맞아가며 산행로에 앉아 라면을 끓이고 있다. 간식인가? 맛있겠다. 초겨울에 산에 와서 눈을 맞으며 끓인 라면을 먹는 맛은 어떨까? 먹어본 사람만이 알겠지.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다. 따져 보니, 산행 시작 후 지금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 667봉 정상


10:20   눈을 조금 그을 수 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배낭을 내리고 김밥을 한 줄 꺼내 먹었다. 우리 아파트 옆에 있는 김밥집 김밥인데 맛이 아주 좋다. 눈이 점점 많이 내린다. 지금은 내리자마자 녹고 있지만 이대로 가면 곧 쌓일 것 같다. 문장대에서 밤티재로 가는 암릉이 험하다는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10시 57분, 무덤이 있는 삼거리길에 도착. 왼쪽이 백두대간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으로도 표지기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장각동으로 하산하는 길인 것 같은데 확신은 없다. 산죽 군락지가 계속 이어지고 계단이 설치된 곳도 여럿 있다.


▲ 백두대간 능선 상에 있는 무덤


11:06   대목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 금년 6월 17일에 한남금북정맥을 하기 위해서 올랐던 길이다. 천황봉을 오르는 여러 길 중에서 최단거리의 길이기도 하다. 비는 더 이상 오지 않고 눈도 뜸해서 비옷을 벗었다. 천황봉 쪽을 향하여 조금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왼쪽으로 한남금북정맥 분기점을 나타내는 커다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바위 오른쪽으로 길이 나 있는데 출입금지 구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지난 번에는 없었는데. 꼭 출입금지를 시켜야하나? 산행로만 개방하면 안 되나? 오른쪽으로 감아 돌면 천황봉이다.


▲ 대목리 삼거리길, 왼쪽이 대목리에서 올라오는 길

 

▲ 한남금북정맥 분기점, 출입금지 구역이다


11:32   천황봉에 올랐다. 온통 잿빛 속에 정상 표지석이 고고하다. 마침 산행객 한 명이 올라오기에 사진을 부탁했다. 단체 산행객의 선두로 대목리에서 올라왔는데 피앗재를 거쳐 만수계곡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자, 이제부터 문장대로 가자. 멋진 바위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 천황봉과 문장대 사이의 주능선 주변에 있는 바위와 암봉들은 금강산 못지 않다.

 

눈 덮인 모습은 어떨까? 나무에 핀 설화와 잘 어울릴까? 여기서 문장대까지는 3.4km의 거리다. 산죽 사이의 길을 조금 내려가니 장각동에서 올라오는 길이 오른쪽에 있는데 산불조심기간이라 폐쇄가 되어 있었다. 금년 1월 10일에 아내와 그 길로 올라왔었는데. 감회가 새롭다. 산죽 사이로 문장대로 가는 길이 계속 이어졌다.


▲ 눈 덮인 천황봉 정상에서, 마지막 인물사진이다

 

▲ 천황봉 주변의 설화

 

▲ 천황봉에서 문장대로 가는 길의 산죽 

 

▲ 장각동에서 올라오는 등산로가 산불조심기간으로 폐쇄되었다


11:59  비로봉 근처 암봉들이 보기에 좋다. 사방이 암봉이다. 저 거대한 바위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땅에서 솟은 것인가? 사람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빚을 수 없는 기기묘묘한 형태를 눈에 살짝 덮인 채 보여주고 있다. 주변은 온통 잿빛이다. 하늘부터 땅까지 모두 잿빛이다. 발밑에 밟히는 눈이 '뽀드득 뽀드득'하고 비명을 지른다. 아, 정말 눈을 밟으면 뽀드득 소리가 나는구나. 왜 예전에는 이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문명을 소리를 듣느라고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눈에 덮인 암봉들

 

▲ 눈에 덮인 암봉들 

 

▲ 눈에 덮인 암봉들


12:05  보기에 좋은 바위와 암봉들이 계속 나타났다. 어떤 것은 거대한 고릴라가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킹콩이 여기로 놀러왔나? 이곳 만큼은 주변 경관이 금강산 풍광에 못지 않다. 일단 바위산은 소나무와 어울려야 제 맛이 난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소나무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데, 소나무 없는 바위산은 얼마나 밋밋할까?


▲ 눈에 덮인 암봉들

 

▲ 눈에 덮인 암봉들

 

▲ 눈에 덮인 암봉들


12:20  산행로 양쪽의 산죽 군락은 계속이다. 눈은 그쳤고 바람이 없어 포근하다. 문장대에서 천황봉 쪽으로 오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에 비해 천황봉에서 문장대로 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 문장대 가는 길의 산죽

 

▲ 눈 덮인 암봉


12:36  경업대 삼거리에 도착. 경업대 쪽에서 단체 산행객이 올라오고 있다. 곧 신선대 휴게소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용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쉬었다 가고 싶은데 문장대가 멀지 않아 지나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신선대 휴게소가 산중에 있는 절이라면 문장대는 청주시 성안길이었다. 문장대가 가까워지면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장날 같다.


▲ 경업대 삼거리

 

▲ 신선대 휴게소 건물

 

▲ 바위를 파서 만든 계단 


13:10  문장대에 도착, 사람 참 많다. 천황봉에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왜 문장대에는 바글대는지 모르겠다. 추측컨대, 화북 방면에서 쉽게 문장대에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긴, 문장대의 높이가 1054m고 천황봉이 1057m이니 높이로 치면 거기가 거기다. 시간이 점심 때인 만큼 삼삼오오 모여서 점심을 먹고 있다. 바위 밑에서 버너로 라면을 끓이는 사람, 문장대 휴게소 앞에 마련된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 스피커로 버너 사용을 단속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단속과 규제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일정한 사용공간을 만들어주면 안 되나?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잔치국수를 시켰다. 4,000원. 남은 김밥 한 줄을 꺼내 국수와 함께 먹었다. 김밥은 다 먹지 못하고 다섯 쪽을 남겼다. 국수 맛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따끈한 물 대신에 먹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휴게소 밖으로 나오니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밤티재까지의 암릉이 어떤 상태일까? 문장대는 여러 번 올라가보았으니 생략하고, 문장대 쪽으로 올라가다 바위를 돌아 오른쪽으로 내려섰다. 출입금지 안내판이 서 있으니 밤티재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곧 눈에 덮인 헬리콥터 착륙장이 나타났다.


▲ 문장대에 오른 수 많은 산행객들

 

▲ 문장대 아래에 있는 헬리콥터 착륙장


자, 이제 그 험하다는 암릉을 한 번 가보자. 눈이 내렸고 지금도 조금씩 내리고 있으니 오늘 제대로 걸린 것 같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혹시 발자국을 보고 따라오는 것은 아닌지? 눈 위에 발자국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오늘 내가 처음  이 길을 것는 모양이다. 큰 죄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훤하게 나 있는 산길을 가는데 이렇게 가슴이 떨리다니. 사람이 죄를 짓고는 못 산다는데.

 

드디어 암릉이 나타났다. 바위 사이로 사람 하나 들어갈 것 같은 틈새가 있어 배낭을 맨 채로 몸을 내리밀었는데 어, 중간에서 바위틈에 끼어 움직일 수가 없다. 공간으로 보아 내려가는 것는 불가능하고 다시 몸을 밀어올리는데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야, 이거 처음부터 장난이 아니구나. 간신히 다시 올라가서 배낭을 벗고 통과를 했다. 이후로 계속되는 암릉 구간에 대해서는 말로 해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실제로 통과해보아야 한다. 스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편한데 그럴 수도 없다. 눈에 덮인 곳이 안전한지를 확인해야 하니까. 네 발로 기거나 그냥 미끄러져 내려온 곳도 부지기수다. 오늘 정말 제대로 걸렸다.

 

13:38  그 유명한 개구멍 바위를 통과했다. 보통 개구멍은 어떻게 통과하지? 네 발로 기어야한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아뭏든 통과는 했으니까. 정신차리자. 14시 6분, 두 번째 개구멍인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구멍을 지나 휴식을 취했다. 눈을 피할 수 있는 좋은 곳이 있어 홍삼 엑기스와 커피를 따끈한 물로 타 먹었다. 속이 확 풀리며 온기가 온 몸에 퍼진다. 암릉은 끊임 없이 이어졌다. 아주 가파른 곳에는 어김 없이 밧줄이 매어져 있었다. 공단에서 매어 놓은 것은 물론 아니다. 또 큰 바위마다 붉은 페인트로 산행로를 표시해놓아서 그 길만 따라가면 된다. 섣불리 샛길을 찾다가는 길을 잃게 된다.


▲ 첫 번째 개구멍바위

 

▲ 휴식을 취한 곳의 바위들

 

▲ 눈이 덮여 미끄러운 암릉

 

▲ 개구멍바위


14:37  개구멍을 또 지났다. 기록에는 두 개라는데 웬 개구멍이 이렇게 많아. 오른쪽으로 문장대에서 시어동으로 내려오는 하산길이 보이고 떠들썩한 사람들의 소리도 들려온다. 저 편한 길을 두고 이 무슨 고생이람. 15시 5분, 소나무에 매어진 밧줄을 타고 내려오면서 암릉길은 끝이 났다.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길 옆 나무에 핀 설화가 아름답다. 15시 15분, 오랜만에 솔잎이 깔린 부드러운 길을 걸었다.


▲ 바위 위의 바위


15:53   밤티재와 견훤산성 갈림길에 도착. 오른쪽은 견훤산성을 경유해서 장암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백두대간은 직진. 밤티재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경계 태세에 돌입. 밤티재 도로가 내려다보이고 왼쪽으로 초소 건물이 보였다. 도로 양쪽을 막아 놓은 철책도 보이고. 길을 따라 내려가면 초소를 통과하게 되어 있어 철책 오른쪽 끝부분을 향해 절개지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의외로 절개지에 심어 놓은 풀이 질겨서 경사가 급했지만 지탱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일단 이것 저것 따질 것이 없었다. 도로에 내려서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 밤티재와 견훤성 갈림길


16:10   밤티재에 도착. 왼쪽으로 감시초소가 있는데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괜히 가슴만 조렸나? 밤티재에는 오른쪽으로 야생동물 이동통로가 육교처럼 설치되어 있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밤티재는 황량하고 쓸쓸했다. 날씨에 따라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자, 이제 늘재로 가야하는데 도로 건너편에도 철책이 설치되어 있어 우회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동통로 밑을 지나 왼쪽 절개지 사면으로 올라붙었다.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으니 내려올 때처럼 풀을 잡고 오르는 수밖에. 경사가 심하고 게다가 풀에 물이 잔뜩 묻어 있어 자꾸 미끄러진다. 그래도 사지에 힘을 주고 버둥거리며 올라간다. 다른 사람이 이 모습을 보면 아마 '미친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봐도 나는 산에 미친 놈이다. 장갑은 온통 물에 젖었고 등산화 안으로도 물이 들어온 것 같다. 조금 질척거린다.

 

절개지를 올라 사면을 따라 난 길을 걸었다. 야생동물 이동통로에 이르렀는데 통로 양쪽은 급경사의 절개지였다. 야생동물이 어떻게 급경사의 절개지를 내려와서 통로를 통과한 다음 다시 절개지를 올라갈까? 내가 보기에는, 거의 무용지물에 돈만 쓸어부은 것 같다. 어디 이런 곳이 한두 곳인가? 탁상행정의 표본인지도 모른다. 이동통로를 지나 오른쪽 사면으로 올라붙어 능선에 도착했다. 눈 내리는 밤티재의 초소와 철책이 전방의 군사분계선 모습을 연상시킨다. 가야할 길을 막아놓은 철책. 밤티재에서 늘재로 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았다. 두어 개의 암봉을 지나 개구멍을 통과했다. 웬 개구멍이 이렇게 많냐? 


▲ 밤티재의 야생동물 이동통로

 

▲ 철책이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는 밤티재

 

▲ 잔가지에 맺힌 설화


16:55  개구멍을 기어 올라오니 바로 전망대 바위다. 앞이 확 트인 것이 맑은 날에는 제 구실을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운무 때문에 별무소용이다. 그래도 설화는 아름답다. 전망바위부터 늘재까지는 계속 내리막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참 길었다. 왜?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거의 10시간 정도 걸었으니 다리의 힘도 많이 빠졌기 때문이다.

 

눈이 오는 바람에 예정보다 산행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길을 분간 못할 정도는 아니다. 가능한 한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늘재를 넘어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데 작은 봉우리는 계속 나타난다. 마지막 봉우리를 넘으면서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건물이 보이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갔다. 늘재에 도착하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 풀과 잡목 가지에 맺힌 설화


17:40   늘재에 도착. 아침에 이용했던 차량 기사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딸이 받는다. 아버지는? 안성에 가셨단다. 그러면? 기사분 휴대전화에 걸었더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런다며 다른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빗줄기가 점점 세어지기 시작했다. 도로 맞은편 성황당 건물의 함석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어둠 속에서 이상한 기분을 자아내게 만든다. 금방 어두워지면서 주위의 사물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간혹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만 보인다. 잠시 후 기사분 아들이 차를 몰고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구세주를 만난 것 같다.


▲ 늘재에 있는 출입금지 표지판


17:56  화북면소재지 차를 세워둔 곳에 도착. 비는 계속 내린다. 차를 돌려 아침에 왔던 길을 거꾸로 달렸다. 비 오는 밤에는 헤드라이트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특히, 검은 색 옷을 입은 사람은 분간하기가 어렵다. 라디오에서 자동차 끼리의 추돌사고와 사람 추돌사고 사건을 계속 내보내고 있다. 조심, 또 조심. 

 

19:20  청주에 도착. 오늘 하루 참 힘들었다. 산행 자체도 힘들었고 돌아오는 길의 운전도 힘들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디 늘 좋을 수만 있나. 오늘 같이 힘든 날이 있는가 하면 꽃 피고 새 우는 봄날도 있는 것이다. 속세와 이별한 산을 오늘 눈을 맞으며, 비를 맞으며 실컷 걸었다. 그리고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