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분봉-악휘봉 산행기
◈ 일시: 2007년 4월 29일 일요일
◈ 장소: 마분봉 776m / 악휘봉 845m / 충북 괴산군 연풍면
◈ 코스: 은티마을 → 백두대간 → 악휘봉 → 마분봉 → 은티마을
◈ 시간: 8시간 31분
◈ 회원: 아내와 함께
마분봉을 연풍 사람들은 '말똥바우'라고 부르며 말똥바우에 비가 묻어오면 바쁘게 비 설거지를 한다. 연풍지역의 비는 늘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마분봉 봉우리의 유난히 뾰죽한 봉우리가 말똥을 연상케도 하지만 실제로 정상 가까이 가보면 화강암 덩어리들이 말똥처럼 보인다. 특히 정상에는 사발을 엎어 놓은 듯은 말똥 바위가 자리잡고 있어 산의 이름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마분봉 산행은 은티리와 종산리 두 군데에서 가능한데 은티리에서 올라가는 것이 경치가 좋고 아기자기한 암릉 산행도 할 수 있어 효과적이다.
07:57 청주 아파트 출발. 화창한 날이다. 오늘 산행지인 마분봉은 상시 등산이 가능한 곳이고 가까은 곳에 악휘봉이 있어 함께 연계 산행을 할 수도 있다. 마분봉과 악휘봉은 둘 다 백두대간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백두대간과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괴산 35명산에 속해 있다. 증평, 괴산을 지나 연풍까지 간 다음 연풍초등학교와 천주교 연풍 성지를 낀 좁은 길을 지나면 분지리와 주진리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을 따라 분지리로 가면 백화산과 이만봉을 올라갈 수 있다. 오른쪽은 주진리로 가는 길인데 주진리 은티마을에서 시루봉, 희양산, 구왕봉, 악휘봉, 마분봉 등을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산행 안내서 등에는 주진리보다 은티리라고 더 많이 나온다. 도로표지판 등에는 아직까지 주진리로 표기되어 있다.
09:10 은티마을 주차장에 도착. 휴게소 관리인이 주차요금 2,000원을 받아간다. 물론 이 휴게소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서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해도 되지만 아스팔트 포장이 된 넓은 주차장에 세워두는 것이 여러 모로 안전하다. 은티마을 유래비와 보호수로 지정이 된 노송들을 지나 구판장 옆 다리를 건너면 길이 갈라지는데 왼쪽은 시루봉, 희양산, 구왕봉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악휘봉과 마분봉으로 가는 길이다. 마을 가운데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사과나무 과수원이 양쪽으로 있는데 한창 사과꽃이 만발했다.
▲ 은티리 주차장에서 은티마을로 가는 모습, 오른쪽에 은티마을 유래비가 서 있다
▲ 은티마을의 사과나무 과수원에 사과꽃이 한창이다, 뒤에 보이는 능선은 구왕봉 쪽 백두대간
커다란 축사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길이 갈라지는데 왼쪽에 별장이 하나 있고 그 옆으로 넓은 길이 나 있다. 오른쪽도 넓은 수렛길인데 현수막에 '출입금지, 비정규등산로'라고 적혀 있다. 당연히 왼쪽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새로 닦은 듯한 넓은 길을 따라 올라갔으나 곧 길은 끊어지고 그 흔한 리본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지도를 들여다보아도 알 수가 없다.
다시 조금 내려와 구왕봉과 악휘봉 사이의 은티재 쪽으로 방향을 잡고 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은티재 쪽으로 가면 백두대간을 만나기 때문이다. 두릅나무밭을 지나 계곡 오른쪽으로 걸었다. 물론 길은 없다. 계곡에는 다래덩굴에 다래순이 지천으로 달려있다. 다래순과 취나물을 뜯었다. 산벚나무꽃이 지면서 바람에 날려 꽃비를 뿌린다.
10:14 계곡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은 온통 바위였다. 가물어서 그런지 물이 거의 흐리지 않는 폭포가 나타났다. 능선으로 올라가야 길이 있을 것 같아 왼쪽 사면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면에 있는 다래덩굴에도 다래순이 달려있다. 잎이 4~5개라서 데쳐서 무쳐 먹으면 연하고 맛이 좋다. 급경사의 사면길은 낙엽과 썩은 나뭇가지와 마사토로 덮여 있어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끌어진다. 힘들다.
▲ 한창 새순이 돋은 잡목 숲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가며 사면을 오르고 있다
▲ 경사가 급한 사면에는 나뭇가지와 낙엽이 쌓여 있고 흙은 마사토라서 자꾸 미끄러진다
10:50 마침내 능선에 올랐다. 희미한 길이 능선따라 나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다녔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는 길인 모양이다. 15분 정도를 올라가니 왼쪽으로 대슬랩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사가 그리 심하지는 않았지만 규모 만큼은 대단했다. 슬랩지역을 지나 계속 올랐다. 없어졌다 다시 나타나는 희미한 길을 따라 걷기란 쉽지가 않다. 마치 정확한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면서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 산행 도중 만난 대슬랩, 경사는 그리 심하지 않지만 규모는 대단했다
▲ 희양산과 구왕봉을 배경으로 노송 앞에서, 힘은 들어도 사진을 찍으니 웃어야지
11:28 오른쪽 마분봉 능선이 보이고 왼쪽으로 희양산과 구왕봉 바위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다시 커다란 슬랩지역이 나타났다. 사면을 따라 희미한 길은 계속 이어져 있다. 번갈아 나타나는 진달래, 각시붓꽃, 양지꽃, 노란제비꽃과 같은 야생화를 보면서 힘든 산행의 기분을 전환시켰다. 급경사의 왼쪽 사면을 올라가니 마침내 넓은 능선길이 나타나고 표지기도 보였다. 아, 얼마나 보고 싶던 표지기인가!
12:20 백두대간에 올라섰다. 장성봉에서 구왕봉을 거쳐 희양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확실한 넓은 길은 걷기에 매우 좋다. 방금 전 지옥에서 지금 천국으로 온 기분이다. 능선을 따라 암릉을 오르내리고 철계단을 오르내리는 백두대간길. 언젠가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13:12 이름 없는 봉우리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이래야 쑥으로 만든 송편과 물이 전부다. 산행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간단한 산행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점심을 간편식으로 준비한 것인데 계산이 많이 틀리게 되었다. 게다가 물도 거의 바닥이 나 간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산행을 마치고 은티마을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실 시간이다.
13:40 악휘봉 길과 마분봉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착. '악휘봉 0.4km 20분, 희양산 8.2km 4시간, 은티마을 2.8km 100분'이라고 이정표에 적혀 있다. 악휘봉이 400m 거리라서 나는 정상을 다녀오고 아내는 남아서 쉬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악휘봉 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장성봉과 악휘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왔다. 작은 봉우리를 넘으니 오른쪽으로 입석리가 보이고 선바위가 나타났다. 선바위 위가 바로 악휘봉 정상이다.
13:47 악휘봉 정상에 도착. 온통 바위로 되어 있는 악휘봉 정상은 전망이 좋다. 입석마을 쪽을 중앙으로 하여 칠보산, 군자산, 시루봉, 덕가산, 박달산, 월악산, 신선봉, 마역봉, 깃대봉, 신선암봉, 조령산, 시루봉, 희양산, 구왕봉이 시계방향으로 부채살처럼 펼쳐져 있다.
▲ 악휘봉 정상, 지금까지 다섯 번 정도는 오른 곳이다
14:00 아내가 기다리는 삼거리에 도착. 왕복 40분 걸린다는 거리를 20분에 다녀왔다. 마분봉 쪽으로 길을 잡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급경사의 바위지대마다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금방 다녀온 악휘봉 정상이 진달래꽃 사이로 머리를 들고 있다. 악휘봉에서 시루봉을 거쳐 덕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길게 뻗어 있고.
▲ 진달래꽃 사이로 보이는 악휘봉 정상
▲ 시루봉과 덕가산을 잇는 능선을 배경으로, 15년 전에 이곳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14:20 안부 네거리에 도착. 입석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은티마을에서 올리오는 길이 만나는 안부다. 예정대로라면 은티마을에서 이 길로 올라왔어야 한다. 안부에는 벤취가 3개 설치되어 있고 이정표가 서 있었다. 마분봉 쪽으로 난 774봉에 올라서니 오른쪽으로 구왕봉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뚜렸하다. 20분 정도 걸려 다시 마분봉 오르기 직전 안부에 도착. 쉬엄쉬엄 걸으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안부에서 올려다 본 정상은 바위 틈틈이 박혀 있는 소나무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밧줄과 씨름을 하며 암봉을 올랐다.
15:00 마분봉 정상에 도착. 왼쪽에 '말똥'을 닮은 바위가 자리잡고 있고 괴산군청 청신회에서 세운 정상 표지석이 중앙에 있다. 이정표에는 '종산 40분, 악휘봉 100분, 마법의 성 30분'이라고 적혀 있다. 그 중 마법의 성 30분은 시간을 누가 고쳐 놓았는데 오르내리는 암릉길이라 40 분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시간이 정확하지 않은 이정표도 문제지만 제 멋대로 이정표를 고치는 사람들도 문제다. 잡목 때문에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 좋지 않다. 시루봉과 희양산, 구왕봉 정도가 명확하게 보인다.
▲ 마분봉 정상 한 쪽에 자리잡고 있는 '말똥' 위에 올라 앉아서
▲ 마분봉 정상 표지석 앞에서
▲ 마분봉 정상 표지석 앞애서
마법의 성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정상을 내려서면서 바위지대와 밧줄이 연속으로 나타났다. 뒤돌아서 올려다 본 정상 암봉과 노송들은 가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한 폭의 동양화였다. 오른쪽 구왕봉 백두대간 능선이 길게 뻗어 있고 바위틈에서 자란 적송들이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다시 밧줄을 타고 내려가니 UFO를 닮은 바위가 있고 봉우리를 하나 넘으니 칼날같은 바위가 있어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것 같다. 마분봉 정상에서 692봉인 마법의 성까지 계속되는 암릉과 밧줄은 문경의 성주봉을 연상케했다. 정말 멋진 코스였다.
▲ 멋진 노송을 배경으로, 암벽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노송들이 이곳에는 많다
▲ 끊임 없이 이어지는 암릉길에 끊임 없이 나타나는 밧줄
▲ 하산길에 만난 UFO 바위, 눈을 감고 우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16:00 692봉 바로 아래에 있는 안부에 도착. 은티마을과 마법의 성 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고 마법의 성으로 올라가라는 글도 적혀 있다. 마법의 성을 넘고 싶었지만 산행을 시작한지 8시간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오른쪽 계곡 쪽 하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낙엽이 쌓인 사면길은 경사가 조금 있었지만 걷기에는 좋았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에 다래순이 지천이다. 두릅나무도 있다. 그냥 둘 수 없지.
▲ 692봉인 마법의 성 모습
▲ 마법의 성 밑 안부에 있는 이정표, 은티마을은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16:41 삼거리 이정표가 나타났다. '악휘봉 1.9km 90분, 마분봉 1.4km 60분, 은티마을 1.3km 30분'이라고 적혀있다. 그렇다. 오전에 우리가 이 길로 들어와서 악휘봉 쪽으로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 길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내려가 보면 알겠지. 본격적인 계곡이 시작되고 물소리가 들려온다. 길은 계곡을 따라 왼쪽으로 나 있었는데 돌계단으로 된 곳도 있었다. 이렇게 좋은 길을 두고 오전에 왜 우리가 엉뚱한 길로 올라갔단 말인가. 10여분 뒤 마분봉과 악휘봉으로 올라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 계곡에 지천으로 널린 다래순, 지금이 최고로 맛이 좋을 때다
17:02 마침내 길을 잘못 든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마분봉으로 오르는 계곡길은 오전의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 즉 '출입금지 비정규등산로'라고 현수막이 걸린 길이었다.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장 이름으로 된 현수막이 왜 여기에 걸려 있을까?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는 마분봉이 상시개방 산행지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출입금지 현수막 옆에는 또 하나의 긴 현수막에 '악휘봉-막장봉, 장성봉-버리미기재'가 비정규등산로로 출입을 금한다고 적혀 있다. 손발이 안 맞는 우리나라 행정의 모습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17:11 은티마을 구판장인 막걸리집에 도착했다. 산행을 마치고 지름티재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두어 팀 자리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우리도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막걸리 한 되와 도토리묵을 주문했다. 찌그러진 주전자로 찌그러진 술 잔에 막걸리를 따르고 도토리묵을 안주 삼아 마셨다. 힘든 산행 뒤에 마시는 막걸리 맛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다. 막걸리집 안에는 천장, 벽, 탁자 할 것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낙서가 되어 있다. 심지어 종이에 써서 붙여 놓기까지 했다. 낙서로 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 최고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글을 만나볼 수 있으니까.
▲ 은티마을 구판장(막걸리집) 안에 붙은 산행 기념 글들
17:41 주차장에 도착. 아침보다 차가 많이 세워져 있다. 아침에 왔던 길을 되집어 청주에 돌아오니 오후 7시가 넘었다. 길을 잘못 든 덕분에 산행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그 대신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을 많이 보았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정신위생에도 좋은 것이다. 어쨌든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가.
후기
산행 다음 날 괴산군청 산림관광과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마분봉 가는 길에 걸려 있는 '출입금지 비졍규등산로'에 대해서 문의를 했다. 담당자는 그런 것이 왜 걸려있는지 모르겠다며 확인차 그곳을 직접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아무쪼록 처리가 잘 되어서 마분봉을 찾는 사람들이 정해진 바른 길로 산행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연풍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주진리와 은티리에 관해서 문의를 했다. 담당자는 주진리는 법정명이고 주진리 안에 행정 단위의 은티마을이 속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연풍면 홈페이지에는 주진리는 없고 은티리만 나와 있다고 하니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단다. 우편번호부를 보면 주진리는 있고 은티리는 없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누구한테 물어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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