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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제주 4.3길

2023.09.24. [제주 4.3길 3] 표선 가시마을 4.3길

by 사천거사 2023. 10. 1.

제주 표선 가시마을 4.3길 탐방기

◈ 일시: 2023년 9월 24일 일요일 / 대체로 흐림
◈ 장소: 표선 가시마을 4.3길 / 제주 서귀포 
◈ 코스: 가시리사무소 4.3길 센터 → 고야동산 → 마두릿동산  종서물 → 가시천 →
           갑선이오름 입구 달랭이모루 4.3길 센터
◈ 거리: 9.7km
◈ 시간: 2시간 6분 




 


13:58  오전에 표선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집에서 칼제비로 점심을 먹은 후 제주도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 있는 4.3길 걷기에 나섰다. 제주도에 조성되어 있는 8곳의 4.3길 중에서, 지난 7월에 왔을 때는 남원 의귀마을 4.3길을 걸었는데 오늘은 두 번째로 표선 가시마을 4.3길을 걸어볼 계획이다. 마침 오늘이 큰손녀가 오후에 제주대학병원에서 수술 경과를 점검받는 날이라 아들이 출발 지점인 가시리사무소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
 
가시마을 4.3길 출발 지점인 가시리사무소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8년 9월 갑마장길을 탐방할 때 이곳에서 출발해 이곳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걸은 적이 있어 이미 이전에 눈도장을 찍어 놓은 상태다. 출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가시리 본동 4.3성터, 1948년 11월 15일 가시리가 초토화된 후 1949년 5월 마을을 재건할 때 성담을 쌓았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다시 10분 가까이 걸어 도착한 고야동산, 4·3 당시 마을 청년들이 보초를 서던 장소라고 한다.


▲ 표선면 탐나리오 하우스 [13:58]
 

▲ 제주 표선 가시마을 4.3길 안내판 [14:13]
 

▲ 가시리마을 종합 안내도 [14:13]
 

▲ 가시리사무소 [14:14]
 

▲ 가시리 본동 4.3성터 가는 길 이정표 [14:18]


가시리 본동 4.3성터

 
가시리 본동 4.3성터는 1948년 11월 15일 가시리가 초토화된 후 1949년 5월 마을을 재건할 때 쌓은 성담이다. 현재의 가시리사무소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높이 3m, 폭 1m 규모의 성담이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협소했던 1차 성담을 확장하여 쌓은 2차 성담에는 서문, 남문, 북문이 있었다고 한다. 4.3성은 마을마다 둘렀던 성담을 말하는 것으로 방어의 역할과 더불어 경찰이 주민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기능을 했다. 4.3성 부근에 있었던 가시초등학교(현재 가시리사무소)는 5.10 선거 당시 투표소로 사용되었다. 5월 10일 오전, 무장대의 습격에 의해 문상형 교장과 강팽림 리장이 희생되었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가시리 본동 4.3 센터 안내문 [14:19]
 

▲ 이 밭에는 감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14:22]
 

갑마장길과 헤어지는 지점 [14:24]


고야동산

 
고야동산은 4·3 당시 마을 청년들이 보초(빗개)를 서던 장소이다.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불태워졌고 3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고야동산 부근에서 희생된 사람도 있다. 지금은 도로확장공사로 모습이 변하긴 했지만 동산의 형태는 남아있다.


▲ 보초를 서던 장소 고야동산 안내문 [14:28]
 

한씨 방묘 70m 전 이정표 [14:30]


14:31  청주 한씨 한천과 그의 아들의 묘인 한씨 방묘에 들렀다. 대제학을 지낸 한천이 1392년 제주도 가시리에 정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배우러 찾아들어 가시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한촌이 가시리마을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어서 마을과 집안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올리는 구석물당, 1879년 제주도로 유배를 온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적비를 만났다. 이렇게 4.3길에는 4.3 사건 유적만 있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유적도 있다. 


한씨 방묘

 
600년 전 가시마을을 설촌한 청주 한씨 한천과 그의 아들의 묘이다. 1392년, 한천이 제주에 들어오고 가시리에 정착하는데 대제학을 지낸 학자라는 것이 알려져 이웃마을 등에서 학문을 배우려는 이들이 가시리를 찾으면서 가시마을이 형성됐다. 한씨 방묘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제주도의 묘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어 문화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0-2호로 지정되었다.


가시리 설오름 청주 한씨 방묘 안내문 [14:31]
 

한씨 방묘: 한천과 그의 아들의 묘 [14:32]
 

구석물당 650m 전 이정표 [14:34]
 

▲ 갑마장길 왼쪽, 구석물당은 오른쪽 [14:39]
 

▲ 여기는 감귤이 엄청 많이 달렸네 [14:40]


구석물당

 
구석물당은 북쪽에 자연석을 이용해 만든 제단이 있고, 제단 앞쪽으로는 50여 평 정도의 마당을 동백나무, 팽나무, 보리수 등의 나무와 돌담이 둘러싸고 있어 오소록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구석물당은 신목, 신석형 당으로서 주위의 나무나 암석은 물론, 이 주위의 것은 무엇이든지 신성한 것으로 여겨 무엇이든지 건드리지 못하도록 절대 금기한다.
 
구석물당의 제일은 음력 정월 그믐날이며, 이 날은 온 마을의 부녀자들이 정성 들여 차린 제물을 지고 가는데 제일 3일 전부터는 육식을 금기하는 등 일체의 부정한 것을 가려 당제에 임하게 된다. 당의 제일은 정월 그믐, 6월 7일과 8일, 11월 7일과 8일이고, 당에 갈 때는 제물과 지전물색을 가지고 가며 마을과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 제단인 구석물당 안내문 [14:42]
 

▲ 길 옆에 피어 있는 꽃무릇 [14:46]
 

면암 최익현 비 150m 전 이정표 [14:48]


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비

 
제주도 청주 한씨 입도조 한천은 고려 말 공양왕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기도 했다. 고려 공양왕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한천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392년 제주에 들어온 한천은 가시마을을 설촌했다. 1879년 제주로 유배를 왔던 면암 최익현이 한천의 후손들이 제주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하여 후손들에게 비문을 써주었다. 당시 비문과 비석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비 안내문 [14:51]
 

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비 [14:51]


14:51  淸州 韓氏 入島祖 恕齊韓公蕆遺墟地(청주 한씨 입도조 서제한공천 유허지), 제주도에 처음 들어온 청주 한씨인 서제 한천의 유허지란 뜻이다. 어? 저게 뭐야? 풀을 뜯고 있는 소 몇 마리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4.3길이 가시공원으로 이어졌다. 가시공원 뒤2021년 4월 가족들과 하룻밤을 묵었던 가시리애 펜션이 보인다.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4.3 유적지인 마두릿동산, 종서물, 새가름에 들렀다. 이정표가 워낙 잘 되어 있어 길을 못 찾을 염려는 거의 없다.


서제 한천 유허지 표지판 [14:51]
 

▲ 완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풍경이네 [14:52]
 

▲ 청주 한씨 서제공 유허지 청화문 [14:53]
 

가시공원 뒤로 2021년 4월 하룻밤을 묵었던 가시리애 펜션이 보인다 [14:58]
 

▲ 집 담장을 따라 피어 있는 홍초 [15:03]


마두릿동산

 
‘마두릿 동산’은 4·3 당시 마을 주민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고야동산에서 세워진 깃대를 내리는 방식으로 신호를 보내면 이곳에서 그 신호를 보고 마을주민에게 다시 신호를 보냈다. 4·3 당시에는 마두릿동산에서 고야동산이 보였지만 지금은 나무들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때 당시 경찰을 검은개라 부르고 군인을 노란개라고 부르던 것을 보면 마을주민이 외부인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보초를 서던 장소 마두릿동산 안내문 [15:07]
 

▲ 종서물 가는 길 310m 전 이정표 [15:13]
 

▲ 갈림길 지점: 여기서 종서물을 다녀와야 한다 [15:16]


종서물

 
종서물은 4·3 사건으로 소실된 마을이다. 가시천 서쪽 일대에 10여호가 살던 마을이었으나 소개령에 의해 주민들이 마을을 떠난 후 복구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현재 종서물은 과수원이나 농경지로 변해버려서 그때 당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 잃어버린 마을 종서물 안내문 [15:18]


새가름

 
1948년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마을이다. 한때 20여 가호에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기도 했던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주민들은 인근 마을 등 주변으로 흩어졌다. 1949년 마을이 재건되면서 2가구가 다시 새가름으로 돌아왔으나 또다시 마을을 떠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 잃어버린 마을 새가름 안내문 [15:20]


15:23  새가름 유적지를 지나 가시천으로 간다. 7.4km 길이의 가시천은 2018년 9월 갑마장길을 탐방할 때 일부를 걸어본 적이 있다. 가시천 위에 놓인 다리 앞 갈림길 지점, 여기서 4.3 유적지인 달랭이모루를 다녀와야 한다. 갑선이오름을 오른쪽에 두고 달랭이모루까지 걸어간 후 유턴, 다시 갈림길 지점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4.3길 센터가 있는 가시리사무소로 향했다. 
 
가시리사무소에 도착하는 것으로 표선 가시마을 4.3길 걷기는 모두 끝이 났다. 9.7km 거리를 2시간 6분에 걸었으니 양호한 편이다. 가시농협 버스정류장 도착, 버스 시간을 보니 표선을 들러 성산으로 가는 295번 버스가 3분 후인 4시 28에 있다. 어허, 배차 간격이 37분에서 120분인 버스인데 오늘 땡잡았네. 관통교차로 앞 농기구수리센터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15분 정도 걸어 아들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표선 가시마을 4.3길 걷기를 무사히 끝마쳤다. 


가시천 1.2km 전 이정표 [15:23]


가시천

 
가시리에서 발원하여 세화리로 빠져가는 총 7.4km의 길이를 갖고 있는 하천이다. 가시천의 일부는 원시림에 둘러싸여 푸른 그늘을 만들고 있고 바위에는 푸른 이끼가 깔려있어서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는 장소이다.


▲ 가시천 안내문 [15:39]
 

▲ 갈림길 지점: 여기서 달랭이모루를 다녀와야 한다 [15:44]


갑선이오름

 
산 모양이 미처 껍질을 벗지 못한 매미 굼벵이처럼 생겼다 하여 갑선악이란 이름이 붙었다. 인적이 드문 까닭에 오름을 오르기도 쉽지 않거니와 햇볕이 잘 들지 않을 만큼의 빽빽한 밀림이 자리 잡고 있다. 금우, 제비꽃, 금창초, 주름잎 등 다양한 야생초가 오름을 덮고 있다.


▲ 길 오른쪽에 서 있는 갑선이오름 안내문 [15:48]
 

달랭이모루 100m 전 이정표 [15:56]


달랭이모루

 
흙붉은 동산이라고도 하며, 1948년 11월 15일 가시리주민 12명이 희생된 곳이다. 이후 마을주민들은 소개하라는 명령에 따라 해안으로 내려가거나 주변 산으로 피신하거나 선택을 해야만 했다.


달랭이모루: 여기서 유턴 [15:58]
 

▲ 갈림길 지점으로 돌아와 4.3길 센터 쪽으로 진행 [16:10]
 

▲ 출발 지점인 가시리사무소 4.3길 센터에 귀환 [16:22]
 

가시농협 버스정류장 [16:28]
 

농기구수리센터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16:41]
 

▲ 탐방 일정을 모두 마치고 표선면 아들 집에 도착 [1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