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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제주 4.3길

2023.07.12. [제주 4.3길 1] 남원 의귀마을 4.3길(1)

by 사천거사 2023. 7. 19.

제주 남원 의귀마을 4.3길(1) 탐방기

◈ 일시: 2023년 7월 12일 수요일 / 흐림
◈ 장소: 남원 의귀마을 4.3길 신산모루 가는 길 / 제주 서귀포
◈ 코스: 남원 파크골프장 → 신산모루 가는 길 남원 파크골프장
◈ 거리: 12.2km
◈ 시간: 2시간 34분 



 


12:45  제주 여행 2일 차. 오늘은 제주 4.3길 중에서 남원 의귀마을 코스를 걸어볼 예정이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의 지휘를 받는 빨치산 조직의 진압 과정에서 제주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제주도에서는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을 중심으로 모두 8곳에 4.3길을 조성했다.
 
남원 의귀마을 4.3길은 신산모루 가는 길 코스와 민오름 주둔소 가는 길 코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남원 파크골프장을 가운데에 두고 위와 아래로 나뉘어 있다. 그중에서 오늘 탐방 코스는 신산모루 가는 길. 아내와 함께 파크골프장 주차장까지 온 후 아내는 골프를 치기 위해 골프장으로 가고, 나는 주차장을 벗어나 4.3길 걷기에 들어갔다. 골프장과 4.3길이 인접해 있다는 것은 우연이겠지만 우리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골프장 주차장에서 나오면 길이 갈라진다. 오른쪽은 민오름 주둔소 가는 길이고 왼쪽 마을길이 신산모루 가는 길이다. 포장 마을길을 10분 정도 걸어 1119번 도로를 건넌 후 다시 마을길을 따라 걸어간다. 길 양쪽에 꽃을 피운 산수국이 줄을 지어 나타났다. 일반 수국보다는 꽃송이가 작기는 하지만 꽃의 모양은 훨씬 더 아름답다.  


남원 의귀마을

 
의귀마을은 남쪽으로 넉시오름이 아담하게 솟아있고 마을 주변으로 서중천과 의귀천이 굽이치고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로 서귀포시 남원읍 중산간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엽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1,300여 필 이상의 말을 조정에 바친 헌마공신 김만일의 고향이며, 일제 강점기인 1926년까지 서중면사무소가 있었던 남원읍의 중심마을이었다.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초순, 의귀 마을 주민들은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시작된 군경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으로 한 순간에 삶터를 잃어 인근 오름과 숲, 궤 등에 숨어 살거나 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군경토벌대에 의해 많은 주민들이 잡혀 희생되거나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이들 중 대다수는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4·3 행방불명인으로 남아 있다. 4·3사건으로 인한 의귀마을 희생자는 250여 명에 이른다. 당시 토벌대가 주둔했던 의귀초등학교를 비롯하여 현의합장묘, 송령이골 등 4·3유적지를 돌아보며 당시 주민들이 겪었을 통곡의 역사와 이 마을의 문화와 자연을 만나보자.


▲ 남원 파크골프장 주차장 출발 [12:49]
 

▲ 제주 남원 의귀마을 4.3길 표지기 [12:52]
 

옷귀마 테마타운 가는 길 이정표 [12:53]
 

▲ 마을길을 따라 진행 [12:58]
 

헌마공신 김만일기념관 표지기 [13:03]
 

서성로라고도 하는 1119번 도로를 건너간다 [13:05]
 

▲ 길 옆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산수국 [13:10]
 

▲ 민오름 공동목장에 서 있는 이정표: 현의합장묘 쪽으로 진행 [13:18]


민오름 공동목장
 

의귀리 민오름 공동목장은 우마를 키우던 곳으로 공동목장 주변에는 영궤마루 주둔소가 있고 목자들과 토벌대들이 식수로 이용했던 이멩이물이 있다.


민오름 공동목장 안내문 [13:18]


13:19  현의합장묘 4.3위령공원에 도착했다. 주민 80여 명이 묻혀 있다고 한다. 의귀초등학교에서 생을 달리 한 시신들이 학교 동녘밭에 대충 묻혔다가 현의합장묘 옛터에 묻혔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고 한다. 시신들이야 제대로 옮겨졌겠지만 영혼들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바람에 조금 정신이 없었을 것 같다. 현의합장묘를 떠나 마을길을 따라 송령이골을 찾아간다,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이곳은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주민 80여 명이 집단학살 당한 후 학교 동녘밭에 흙만 대충 덮인 채 방치되었던 시신들이 현의합장묘 옛터에 매장되었다가 2003년 9월 20일 마지막으로 안장된 곳이다. 유족들은 1964년 삼묘동친회를 조직하여 봉분을 단장하고 산담을 쌓아 해마다 벌초와 제례를 봉행했다. 1983년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다는 의미를 담아 현의합장묘 묘비를 세웠으며, 유족회의 명칭도 현의합장묘 4·3유족회로 변경하였다. 2003년 이후 해마다 음력 8월 24일에 이곳에서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현의합장묘 4.3위령공원 표지석 [13:19]
 

현의합장묘 4.3위령공원 전시관 표지판: 문은 닫혀 있다 [13:20]
 

현의합장묘 4.3위령공원 전시관 [13:20]
 

▲ 묘비 뒤로 보이는 합장묘 3기 [13:21]
 

▲ 현의합장묘 비석 [13:22]
 

▲ 현의합장묘 내력과 희생된 넋들 [13:22]
 

▲ 현의합장묘 안내문 [13:23]
 

▲ 현의합장묘 입구에 서 있는 이정표: 송령이골 쪽으로 진행 [13:23]
 

▲ 포장이 된 마을길을 따라 진행 [13:26]
 

▲ 송령이골 가는 길 이정표 [13:35]


13:40  길 옆에 있는 감귤밭에서 감귤이 익어가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감귤은 5월부터 9월까지 시중에 나오지만 노지 감귤은 현재 파란 탱자처럼 매달려 있다. 송령이골 앞에 도착했다. 송령이골은 토벌대에 맞서 싸우다 죽은 51명의 무장대원이 묻힌 곳이다. 엄격하게 따진다면 무장대원은 반군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주민들과는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어쨌든 이들도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송령이골을 지나 의귀리 소재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 지금 노지 감귤은 파란 탱자 수준 [13:40]
 

▲ 길 옆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수국 [13:42]


송령이골

 
이곳은 4·3 당시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1949년 1월 12일 새벽, 무장대는 의귀초등학교 주둔부대를 공격했으나 2시간 여의 전투에서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때 사망한 무장대 시신은 초등학교 뒤편에 흙만 대충 덮인 채로 방치되었다가 이듬해 봄 토벌대의 지시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일부 시신은 가족이 찾아간 경우도 있으나 다수의 시신은 세 개의 구덩이에 매장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단, 4·3연구소, 현의합장묘 4·3유족회 등이 생명의 존엄과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담아 천도제를 지냈고 그 후 시민사회단체 등이 매년 8월 15일에 벌초와 제례를 하고 있다.


▲ 송령이골 안내문 [13:46]
 

▲ 51명의 무장대 시신이 묻힌 송령이골 [13:47]
 

송령이골 의귀사건 희생자 유골방치 터 안내문 [13:47]
 

▲ 송령이골에 관한 시 [13:47]
 

▲ 헌마공신 김만일 생가터 [13:59]
 

▲ 글라디올러스 뒤로 보이는 의귀초등학교 [14:02]


장판거리

 
장판거리는 일제 강점기 서중면 행정의 중심지로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지던 오일장이 서던 곳이다. 1926년 면사무소가 남원리로 옮겨가면서 오일장은 쇠퇴했으나, 이곳은 과거 의귀마을의 번성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거리로 남아있다.


▲ 장판거리 안내문 [14:03]


의귀초등학교

 
의귀초등학교는 1941년 남원공립국민학교 병설 의귀간이 학교로 개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는 의귀리·수망리·한남리·신흥리 4개 마을의 어린이들이 함께 다녔던 학구공동체였다. 학교는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2월 15일 폐교되었고 그 직후인 12월 26일부터 육군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하였다. 1949년 1월 12일 새벽, 무장대가 의귀초등학교를 습격하여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군인 4명과 무장대 51명이 사망하였다.
 
이 습격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군인들은 의귀초등학교에 수용 중이던 80여 명의 주민들을 학교 동녘밭에서 학살해 버렸다. 이때 희생자들은 현재 현의 합장묘에 안장되어 있다. 학교는 4·3사건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949년 8월 1일 남원초등학교 의귀분교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4·3사건으로 인해 졸업장을 받지 못했던 학생들은 2003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 의귀초등학교 안내문 [14:04]


14:08  의귀중앙교차로에 도착, 왼쪽으로 가면 동녘밭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현의합장묘 옛터가 나온다. 이름 모를 원혼이 떠돌고 있을지도 모르는 동녘밭에는 감귤나무만이 서 있고 현의합장묘 옛터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의귀천 왼쪽을 따라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를 찾아간다. 남원읍에서는 희생자가 1천여 명에 달했으며 그중에서도 의귀마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났다고 한다. 


▲ 의귀중앙교차로에 서 있는 이정표 [14:08]
 

▲ 서중면사무소 옛터 표지석 [14:08]
 

▲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 동녘밭 안내문 [14:09]
 

▲ 장판거리 표지석 [14:11]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옛터

 
이곳은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주민 80여 명이 집단학살 당한 후 학교 동녘 밭에 흙만 대충 덮인 채 방치되었던 시신들을 옮겨 3개의 구덩이에 매장한 곳이다. 2003년 9월 16일 세 구덩이의 유해를 발굴하였는데 수습이 힘들 정도로 엉클어져 있어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서쪽 구덩이 17구, 가운데 구덩이 8구, 동쪽 구덩이 14구 등 총 39구의 유해와 50여 점의 유품이 함께 발굴되었다. 발굴 직후인 9월 20일 수망리 ‘신산마루’ 지경에 새 묘역을 마련하고 비로소 ‘안장(安葬)’하였다.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이미 흙으로 돌아간 유해도 다수 있어 ‘흙 한 줌’으로 대신하였다. 2010년 5월 19일 ‘현의합장 영령유허비’를 세워 억울한 희생자들이 묻혀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 현의합장묘 옛터 안내문 [14:15]
 

▲ 현의합장영령유허비 [14:15]
 

현의합장묘 옛터 [14:15]
 

▲ 돗물교 앞에 서 있는 이정표: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 쪽으로 진행 [14:20]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

 
4·3사건 당시 남원읍에서는 피해가 가장 큰 의귀마을에 2016년 9월 위령비를 세웠다. 남원읍의 희생자는 1천여 명에 이른다.


▲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 [14:22]
 

▲ 1136번 도로에서 왼쪽으로 진행 [14:26]


14:28  의귀천 쉼터를 지나 헌마공신 김만일 묘 쪽으로 걸어간다. 사실, 김만일은 4.3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많은 말을 헌납해서 광해군이 헌마공신이란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김만일 묘를 둘러본 후 마을길을 따라 중산간동로를 건너 차를 세워둔 파크골프장 주차장에 돌아오는 것으로 의귀마을 4.3길 신산모루 길 걷기는 모두 끝이 났다. 파크골프를 끝낸 아내와 함께 아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제주도 하늘이 조금 벗어진 것 같다. 내일은 맑으려나.


의귀천 쉼터 안내문 [14:28]
 

▲ 헌마공신 김만일 묘역 표지석 [14:31]


헌마공신 김만일 묘

 
조선중기 헌마공신 김만일 분묘는 17세기 제주분묘의 산담과 봉분의 축조양식 및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묘역 내에는 동일시기로 추정되는 봉분 1기, 혼유석 1기, 비석 1기, 문인석 2기 등이 있으며, 문인석은 돌하르방과 같은 형태의 제주형이다.


▲ 의귀리 김만일 묘역 안내문 [14:36]
 

▲ 김만일 묘역: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5호 [14:36]
 

▲ 마을길을 따라 진행 [14:47]
 

▲ 중산간동로 통과 [14:52]
 

▲ 삼거리에 도착: 민오름 주둔소 가는 길 쪽으로 진행 [15:00]
 

▲ 동백나무에 열매가 열렸다 [15:08]
 

▲ 4.3길 걷기를 마치고 파크골프장 주차장에 도착 [15:25]
 

▲ 오늘 나들이 일정을 모두 마치고 제주탐나로이 하우스에 귀환 [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