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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산행/충북山行記

2020.03.11. [충북山行記 231] 충북 진천 환희산

by 사천거사 2020. 3. 11.

환희산 산행기 

◈ 일시: 2020년 3월 11일 수요일 / 맑음 

◈ 장소: 환희산 402.3m / 충북 진천군 문백면 

◈ 코스: 정송강사 주차장 → 정송강사 → 정철 묘소 → 환희산 정상 → 정송강사 주차장 

◈ 거리: 3.6km 

◈ 시간: 2시간 4분 

◈ 회원: 아내, 외손자들과 함께


 

 

 

 


12:40   외손자들과 함께 하는 산행 다섯 번째, 오늘은 정송강사 뒤에 솟아 있는 환희산을 다녀오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진천군 문백면에 있는 환희산은 산행 거리가 짧을 뿐만 아니라 산행 들머리에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송강 정철의 사당과 묘소가 있어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한 번 정도 찾아가 볼 가치가 있는 산이다. 청주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2008년 4월과 2014년 6월에 아내와 함께 다녀온 적이 있다.

 

딸네 아파트 앞에서 아이들을 픽업한 후 내비게이션에 '정송강사'를 입력하고 안내하는 대로 달려갔다. 텅 비어 있는 정송강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먼저 정송강사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주차장 주변에도 볼거리가 꽤 있었다. 수령이 365년이나 된 느티나무, 훈민가 시비, 관동별곡과 산사야음 시비, 정철 신도비 등이 그것인데 그중에서 정철의 공적을 기록한 신도비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차장 언덕에 서 있는 매화나무가 예쁘게 꽃을 피워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 현재 바깥 온도는 영상 6도 [12:45]

 

▲ 정송강사 주차장에 주차 [13:39]

 

▲ 진천군 관광 안내도 [13:42]

 

▲ 진천군에서 관리하는 수령 365년의 보호수 [13:43]

 

▲ 진천군에서 설치한 보호수 안내판 [13:43]

 

▲ 훈민가 시비 [13:44]

 

▲ 관동별곡과 산사야음 시비 [13:46]

 

▲ 봄볕을 받으며 매화가 피었다 [13:47]


정철 신도비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문학가 송강 정철의 공적을 적은 비. 비신 높이 255㎝, 너비 102㎝, 두께 34.5㎝.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 등을 남겼고 관직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그가 사망한 뒤 백여 년 동안 신도비가 세워지지 못하다가 1717년(숙종 43)에 가서야 이루어졌는데, 비문은 당대의 유학자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공조참판 김수증(金壽增)이 예서로 쓰고 두전(頭篆)도 했다. 뒷면 마지막 줄에 새겨진 송시열의 추기(追記)가 숙종 14년(1688)으로 되어 있으므로 비문은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철 신도비 [13:49]


13:49   홍살문을 지나 정송강사 쪽으로 올라갔다. 정송강사는 송강 정철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충청북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송강사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인 문청문(文淸門) 앞에 도착해 보니 문이 굳게 잠겨 있고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하나 붙어 있었다. 코로나19 확진자 급증에 따라 감염증 예방 및 확산 방지를 위한 임시 휴관을 실시합니다. 어허, 코로나19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구나. 손도 발도 없는 단백질 덩어리가 진천 문백 이 깊은 산속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정송강사

 

1976년 12월 20일 충청북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영일정씨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자 시인인 정철(鄭撤:1536∼1593)의 위패를 배향한 곳이다. 원래 묘소가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1665년(현종 6) 송시열(宋時烈)이 현재의 장소를 정하고 후손 정포(鄭浦)가 이장하여 사우를 건립하였다. 1973년 보수하였다가 1979년부터 1981년에 다시 전면 중건 정화하였다. 규모는 사당 19평, 유물전시관 32평이다.

 

사당은 목조 맞배지붕집이고 유물전시관은 시멘트 32평 팔작지붕집이다. 사당 입구에는 정철의 공적을 적은 신도비가 있는데 귀부와 비신, 비개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목조기와집으로 된 비각이 세워져 있다. 사당 남쪽의 묘소 입구에는 대표적 가사를 적은 시비가 있으며 묘소에는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유물전시관은 사당 앞에 있으며 안에는 옥배(玉杯), 은배(銀杯), 친필편지 등이 보관되어 있다.

 

정철은 자 계함(季涵), 호 송강(松江)으로 기대승, 김인후 등의 문인이다.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장원, 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내고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천부적인 문재를 발휘하여 가사문학의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으며 《관동별곡》 《사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단가를 남겼다.


홍살문

 

능, 원, 묘, 궁전 또는 관아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나무 문.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태극 문양은 네가지 형태로 구분되는데, 삼태극, 이태극 및 빛을 넣는 삼태극 등으로 표현되어 있고, 태극 문양 위의 지창(枝槍)은 2지창과 3지창의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이 홍살문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해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세워진 장소로 보아서는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다.


▲ 정송강사 가는 길 입구에 있는 홍살문 [13:49]

 

▲ 진천 정송강사 안내판 [13:51]

 

▲ 송강정철선생시비 [13:53]

 

▲ 어허, 코로나19 여파가 이곳까지 미쳤네 [13:54]

 

▲ 문청문 앞에서 외손자들 [13:55]

 

▲ 정송강사가 휴관이라 다시 돌아나가는 중 [13:56]

 

▲ 송강 묘소 입구 표지석 [13:58]

 

▲ 환희산 등산 안내도 [13:59]


상산팔경

 

충북 진천군에 있는 8개소의 경승지. 상산은 진천의 옛 이름이다. 

평사낙안(平沙落雁):문백면(文白面) 평산리(平山里) 냇가의 백사장으로, 겨울이 되면 10리나 뻗은 백사장에 기러기 떼가 내려앉는 모양이 장관이다. 
우담제월(牛潭霽月):문백면 은탄리(銀灘里) 우담에 달이 비칠 때의 정경이다.
금계완사(錦溪浣紗):만승면(萬升面) 광혜원리(廣惠院里) 금계를 말하는데, 옛날에 충청도 관찰사가 경질될 때 신·구 관찰사가 이곳에서 만나 도장을 주고받고 하루를 함께 즐겼다고 한다. 
두타모종(頭陀暮鐘):초평면(草坪面) 화산리(畵山里) 두타산에 있는 옛 절 영수암(靈水庵)에서 저녁놀이 질 때 치는 종소리의 정취이다. 
상산모운(暮雲):이월면(梨月面) 사곡리(沙谷里)에 있는 상산에 저녁놀과 구름이 감칠 때의 정경이다.

농암모설(籠岩暮雪):문백면 구곡리(九谷里)에 신라시대의 다리(28간)가 현존하는데, 다리 위에 흰 눈이 쌓이는 것을 보는 정경이다. 
어은계석(漁隱溪石):문백면 봉죽리(鳳竹里), 정철(鄭澈)의 묘소가 있는 계곡의 자연 풍경이다. 
적대청람(笛臺晴嵐):문백면 평사리 백사장에 한 암벽[臺]이 있는데, 옛날에는 그 위에 정자가 있어 가끔 신선이 내려와서 피리를 불며 놀았다고 한다. 화창한 날 이곳에 어른거리는 아지랑이의 정경이다.


▲ 상산팔경 어은계석 안내판 [13:59]


13:59   널찍한 길을 따라 묘소를 향해 걸어간다. 조금 가파른 길이 나오자 둘째가 뒤쳐지기 시작했다. 둘째는 초반에 약하다. 대신 다리가 조금 풀리면 잘 걷는다. 뒤쳐진 동생을 데리고 올라오는 첫째의 모습이 보기에 좋다. 정철 묘소에 도착했다. 앞에 있는 묘는 둘째 아들 종명의 묘이고 뒤에 있는 것이 부인 문화 유 씨와 합장을 한 송강 정철의 묘다. 둘째 아들 종명의 묘가 아버지인 정철 묘 앞에 있는 이유는? 그것은 바로 정철이 사경을 헤맬 때 종명이 손가락을 잘라 입안에 피를 흘려 넣었기 때문이다. 즉, 손가락까지 자른 효자라 유훈에 따른 것이다. 정철의 묘 주위에는 봄을 맞아 정철의 혼이 담겨 있는 것 같은 할미꽃이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 정철 묘소로 가는 널찍한 길 [13:59]

 

▲ 묘소 가는 길에서 [14:02]

 

▲ 얘들아, 빨리 와 [14:10]

 

▲ 송강 정철의 묘가 보인다 [14:13]

 

▲ 송강 정철 묘소 안내문 [14:13]

 

▲ 앞에 있는 것은 둘째 아들 종명의 묘 [14:15]

 

▲ 뒤에 있는 것이 송강 정철의 묘 [14:16]

 

▲ 묘소 주변에 할미꽃이 피었다 [14:18]


14:20   정철 묘소를 떠나면서 본격적인 환희산 산행이 시작되었다. 환희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약간의 경사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걷기에 아주 좋은 길이다. 환희산 자체가 육산이라 바위가 거의 없고 길도 아주 잘 나 있는 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이들의 신발이 등산화가 아니고 운동화라서 낙엽에 쉽게 미끄러진다는 것. 그래도 크게 짜증을 내지 않으면서 한 발 두 발 올라가는 아이들이 무척 대견스럽다. 그래, 그렇게 오르다 보면 발을 딛는 요령도 생기고 산행 실력도 느는 거야.


▲ 정철 묘소를 떠나 본격적인 산행에 돌입 [14:20]

 

▲ 경사가 조금 있는 오르막길 [14:22]

 

▲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길 [14:24]

 

▲ 진달래가 꽃망을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14:29]

 

▲ 차근차근 올라갑니다 [14:31]

 

▲ 환희산에는 소나무가 아주 많은 편이었다 [14:33]

 

▲ 종현아, 힘 내자 [14:38]

 

▲ 아주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 [14:43]

 

▲ 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 [14:48]


14:54   둘째 아이가 쓰러진 나무에 머리를 부딪혔다. 거 봐,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10분 후 예전에 없던 이정표를 하나 만났다. 이정표에는 대동저수지와 국사봉 가는 길이 표기되어 있었는데 모두 처음 듣는 지명들이다. 나중에 자세히 확인을 해 봐야겠네. 어? 도요새 님의 표지기도 있네. 언제 다녀가셨나 보다. 해발 402.3m의 환희산 정상에 도착했는데 늘 정상을 지키고 있는 표지석 외에 나무에 매달려 있는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청주고 33회에서 설치한 거였다. 얘들아, 정상에 올랐으니 기념사진 찍어야지.


▲ 쓰러진 나무 줄기에 머리를 부딪친 둘째 [14:54]

 

▲ 이제 오르막길도 막바지다 [14:54]

 

▲ 청주 블루이글스 MTB 동호회에서 설치한 표지판 [15:02]

 

▲ 도요새 님의 표지기를 만났다 [15:02]

 

▲ 대동저수지 갈림길 이정표: 환희산 정상 쪽으로 진행 [15:04]

 

▲ 환희산 정상으로 가는 길 [15:07]

 

▲ 해발 402.3m의 환희산 정상에서 [15:11]

 

▲ 환희산 정상에 박혀 있는 삼각점 [15:11]

 

▲ 환희산 정상에서 [15:12]

 

▲ 나무에 매달려 있는 환희산 정상 표지판 [15:12]


15:14   환희산 정상을 떠나 하산길에 들어섰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길이 그런대로 잘 나 있어 크게 신경을 써야 할 구간은 없는 편이다. 30분 정도 걸어 하산을 완료하고 차를 세워둔 주차장에 도착, 차에 올라 청주로 돌아온 시각이 4시 20분, 이렇게 해서 거의 6년 만에 다시 찾은 진천 백곡의 환희산 산행은 무사히 끝이 났다. 참고로, 환희산 단독으로는 산행 거리가 너무 짧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국사봉, 덕곡산과 연계해서 산행을 하면 좋을 듯하다.


▲ 환희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 [15:14]

 

▲ 경사가 조금 있는 길 [15:15]

 

▲ 걷기 좋은 내리막길 [15:21]

 

▲ 할머니가 종현이를 기다리고 있네요 [15:24]

 

▲ 무슨 꽃이더라? [15:28]

 

▲ 경사가 별로 없는 걷기 좋은 길 [15:34]

 

▲ 차를 세워둔 주차장에 귀환 [1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