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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산행/경기山行記

2019.12.28. [경기山行記 104] 경기 안성 비봉산→태봉산

by 사천거사 2019. 12. 28.

비봉산-태봉산 산행기

◈ 일시: 2019년 12월 28일 토요일 / 맑음

◈ 장소: 비봉산 372m / 태봉산 248m / 경기 안성

◈ 코스: 죽산면사무소 → 매산리 석불입상 → 죽주산성 → 비봉산 → 서낭당고개 → 태봉산 → 

           죽산교회 → 죽산면사무소

◈ 거리: 10.4km

◈ 시간: 4시간 6분 

◈ 회원: 평산회원 7명


 

 

 

 


09:00   오늘은 평산회에서 안성에 있는 비봉산으로 2019년을 마감하는 송년 산행을 떠나는 날이다. 청주시 서원구청 후문에서 산행에 참가하는 7명의 회원이 모여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17번 국도를 따라 산행 들머리가 있는 안성시 죽산면사무소를 향해 달려갔다. 오늘 답사할 비봉산은 안성시 죽산면의 진산으로 죽주산성 및 태봉산과 연계한 산행이 가능하다. 또한 높이가 370m 정도에 불과해 큰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주를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걸려 죽산면사무소 주차장에 도착했다. 죽산면 일대는 예전에 미륵 신앙이 번성했던 곳이라 그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간단히 산행 준비를 하고 첫 번째 방문지인 죽산향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화재자료 제26호인 죽산향교는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어 밖에서 전체적인 모습만 살펴볼 수 있었다. 오늘은 화창한 날씨에 미세먼지도 없어 하늘이 온통 파랗다. 찬기운이 조금 느껴지기는 하지만 걷기에 참 좋은 날이다.


▲ 안성시 죽산면사무소 주차장에 주차 [10:14]

 

▲ 죽산면사무소 건물 [10:14]

 

▲ 면사무소 옆에 있는 비봉산 등산로 표지석: 비봉산으로 곧장 올라가는 길 [10:16]

 

▲ 도로에서 바라본 비봉산 [10:19]

 

▲ 죽산향교 가는 길 이정표 [10:21]

 

▲ 죽산향교 앞에 서 있는 하마비 [10:23]


죽산향교

 

1533년(중종 28)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 밖에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1972년에 원장(垣墻)을 신축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성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명륜당, 동재(東齋)·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 죽산향교 안내문 [10:24]

 

▲ 문화재자료 제26호인 죽산향교 [10:24]

 

▲ 죽산향교 앞에서 지학근, 신현대 회원 [10:25]


10:31   죽산향교를 떠나 마을도로를 따라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봉업사는 고려 태조의 진영을 봉안한 진전사원이다. 즉, 봉업사는 절 이름 그대로 나라를 창업한 것을 기념하여 창건된 호국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보물 제4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 뒤로는 비봉산과 죽주산성이 하늘을 가르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 번째로 찾아간 곳은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과 석불입상, 둘 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 도로에서 바라본 비봉산 [10:31]

 

▲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을 보러 가는 길 [10:38]


안성 봉업사지

 

봉업사의 창건과 폐사 시기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광종 때 중창되어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66년에 출토된 유물의 명문을 통해 ‘봉업사(奉業寺)’라는 이름을 확인하면서 이곳이 고려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봉업사지를 중심으로 죽산지역에는 관음당(觀音堂)의 장명사지(長命寺址), 미륵당(彌勒堂)의 매산리사지(梅山里寺址)·칠장사 등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교유적이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다.

 

현재 봉업사지에는 보물 제435호인 죽산리 오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인 봉업사지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봉업사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인 죽산리 삼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죽산리 석불입상, 칠장사(七長寺)에 옮겨진 보물 제983호인 봉업사지 석불입상 등이 남아 있어 당시 규모가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알려준다.


▲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 안내문 [10:42]

 

▲ 보물 제435호인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 [10:42]

 

▲ 오층석탑 안내문을 읽고 있는 회원들 [10:42]

 

▲ 비봉산과 죽주산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10:44]

 

▲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 [10:54]

 

▲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 안내문 [10:54]

 

▲ 안성 죽산리 석불입상 [10:57]

 

▲ 안성 죽산리 석불입상 안내문 [10:58]


10:58   안성 죽산리 석불입상 아래에는 봉업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예전에 있던 봉업사는 아니고 '대웅전'이라는 현판을 판 일반 주택이었다. 전혀 절 분위기가 나지 않는 그 집에서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죽주산성을 찾아가는 길에 다시 매산리 석불입상을 만났다.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태평원이 있던 곳에 있어 태평미륵이라고도 한다. 머리에 네모 모양의 관을 쓴 모습이 논산에 있는 은진미륵을 닮았다.


▲ 석탑 뒤로 보이는 안성 죽산리 석불입상 [10:58]

 

▲ 안성 죽산문화재 야행 안내 현수막 [10:59]

 

▲ 봉업사 대웅전 [11:00]

 

▲ 봉업사 표지석 [11:01]

 

▲ 지금까지 둘러본 문화재들 [11:05]

 

▲ 지금 걷는 길은 영남길의 한 구간이다 [11:05]


매산리 석불입상

 

미륵은 안성에서도 죽산지역에 많이 몰려 있는데 죽산은 봉업사지를 비롯하여, 장명사지, 장광사지, 미륵당, 칠장사 등 많은 고찰이 위치하여 제2의 경주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사찰이 있었다. 많은 불교문화재가 있는 만큼 또 미륵도 많이 산재해 있다. 경기도에서 가장 큰 미륵은 죽산 미륵당의 매산리 석불입상(경기도유형문화재 제37호)과 일명 쌍미륵이라고도 불리는 기솔리 석불입상이다.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태평원이 있던 곳에 있어 태평미륵이라고도 한다. 태평미륵이 세워진 죽산면은 몽고군과의 전쟁에서 송문주장군이 승리를 하였던 곳이다. 지역에서는 송문주장군의 우국충정을 추모하고 명복을 빌며, 태평성대를 기원하기 위해 태평미륵을 건립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 매산리 석불입상 가는 길 이정표 [11:07]

 

▲ 미륵당 오층석탑 안내문 [11:08]

 

▲ 매산리 석불입상 안내문 [11:08]

 

▲ 미륵당 오층석탑과 매산리 석불입상 [11:09]


11:12   미륵당마을회관 앞에 문화재마을 미륵당 표지석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미륵 문화가 만연하던 곳이라 동네 이름까지도 미륵당 마을이다. 미륵은 누구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미래의 출현할 부처님이다. 성은사 표지석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죽주산성을 향해 올라갔다. 길 옆으로는 언제 내린 건지 알 수 없는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죽주산성은 몽고군의 침략과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였는데 송문주 장군이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죽주는 죽산의 옛 지명이라고 한다.


미륵불

 

우리나라에서는 이 미륵불신앙이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되어 폭넓게 전승되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다. 그때의 이 세계는 이상적인 국토로 변하여 땅은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이 뒤덮여 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수명은 8만4000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미륵불신앙은 미륵불이 출현하는 국토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에 대하여 설함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죄악의 종자와 모든 업장과 번뇌의 장애를 끊고 자비심을 닦아서 미륵불의 국토에 나도록 하자는 데 그 깊은 진의가 있다. 이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삼국의 불교 전래와 더불어 우리 나라에서 널리 신봉되었다.


▲ 문화재마을 미륵당 표지석 [11:12]

 

▲ 잠시 차도 옆 보행자 도로를 따라 진행 [11:14]

 

▲ 길 왼쪽에 도열해 있는 송덕비들 [11:21]

 

▲ 성은사 표지석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진행 [11:22]

 

▲ 죽주산성 표지석 [11:23]

 

▲ 죽주산성으로 올라가는 길 [11:26]

 

▲ 성은사 가는 길 왼쪽에 진열되어 있는 석조물들 [11:30]

 

▲ 죽주산성 안내문 [11:32]

 

▲ 안성 관광 안내지도를 보고 있는 회원들 [11:32]


 

11:36   죽주산성 동문을 지나 성벽 위로 올라갔다. 복원공사가 잘 되어 있는 성벽은 아주 튼튼하게 보였다. 성벽 위로 나 있는 길을 5분 정도 걸어 도착한 곳은 전망이 좋은 중성북벽포루였다. 포루는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포를 설치하고 쏠 수 있도록 만든 구축물을 말한다. 포루 옆에는 커다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포루와 오동나무가 잘 어울려 멋진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포루를 떠나 다시 성벽길을 따라 서문지 쪽으로 걸어갔다. 


죽주산성

 

경기도 기념물 제69호(1973.07.10 지정)로 태평미륵이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매산리 비봉산에 죽주산성이 있다. 죽주산성은 신라 때 내성을 쌓고, 고려 때 외성을 쌓았다.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는 본성은 1.7㎞이고, 외성 1.5㎞, 내성 270m로 세겹의 석성이 지금도 남아있고 보전 상태가 좋다. 죽주산성은 특히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다. 왜군에게 내주고 말았던 죽주산성을 황진 장군이 기습작전으로 탈환에 성공하자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을 넘보지 못했다.

 

포루가 만들어진 산정에 올라서면 안성벌, 이천, 장호원이 한눈에 잡힌다.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남과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 전략적인 요새였던 이곳을 아군의 기지로 삼으려는 시도는 나라마다, 전시마다 치열하였다. 경기도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는 산성의 내성 곁에는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의 전공영각과 재실이 있다. 재실을 지나쳐 내려오면 쉼터가 있다. 죽주산성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보다는 산성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보는 맛이 일품이다.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와 침엽수들이 길동무를 해주어 상쾌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 죽주산성 중성 동문 [11:36]

 

▲ 중성북벽포루 가는 길 이정표 [11:38]

 

▲ 중성 성곽 위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진행 [11:39]

 

▲ 중성북벽포루로 가는 길에 바라본 죽주산성 내성 [11:41]

 

▲ 중성북벽포루에 도착 [11:43]

 

▲ 포루에서 내려다본 풍경 [11:43]

 

▲ 포루 옆에 서 있는 오동나무 [11:46]

 

▲ 포루와 오동나무가 잘 어울렸다 [11:46]

 

▲ 성벽길을 따라 서문지로 간다 [11:50]

 

▲ 성벽길을 걸어오고 있는 회원들 [11:51]


11:55   이정표가 서 있는 외성 서문지에 도착했다. 시간도 그렇고 해서 성벽 위 해가 잘 비치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김밥과 김치가 전부인 소박한 점심이지만 오가는 대화가 진지하다 보니 점심을 먹는 데에 30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정표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죽주산성과 헤어진 후 본격적인 비봉산 산행에 들어갔다. 짧은 내리막길에 이어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졌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 하더라도 오르막길은 있고 당연히 오르막길을 걷는 데에는 힘이 들기 마련이다.


▲ 외성 서문지에 서 있는 이정표 [11:55]

 

▲ 서문지가 있는 성벽 위에서 점심식사 [12:03]

 

▲ 점심 후 이정표 앞에서 회원들 [12:32]

 

▲ 성벽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12:35]

 

▲ 비봉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12:35]

 

▲ 짧은 내리막길 [12:39]

 

▲ 매곡마을 갈림길 이정표: 비봉산 정상 쪽으로 진행 [12:40]

 

▲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 오르막길 [12:46]

 

▲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길 [12:50]

 

▲ 눈이 남아 있는 능선길 [12:52]


12:55   오르막길이 꽤 길게 이어져 잠시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햇볕은 여전히 쨍쨍한데 바람은 차다. 데크 계단을 오르고 방초리 갈림길 지점을 지나 해발 372m의 비봉산 정상에 올랐다. 비봉산은 우리나라에 있는 산 이름 중에서 흔하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한다. 널찍한 비봉산 정상부에는 돌탑과 정상 표지석, 운동기구, 벤치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회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비봉산 정상을 떠나 태봉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오르막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휴식 [12:55]

 

▲ 데크 계단을 올라간다 [12:59]

 

▲ 방초리 갈림길 이정표: 비봉산 정상 100m 전 [13:00]

 

▲ 여기는 완전 겨울이네 [13:01]

 

▲ 널찍한 비봉산 정상부에 도착 [13:02]

 

▲ 비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13:04]

 

▲ 해발 372m 비봉산 정상에서 평산회원들 [13:05]

 

▲ 해발 372m 비봉산 정상에서 평산회원들 [13:05]

 

▲ 비봉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 [13:18]


13:22   4거리 갈림길 지점인 서낭당 고개에 내려섰다. 여기서 죽산면사무소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태봉산을 들르려면 두현리 하삼 쪽으로 진행해야 한다. 약 15분 정도 걸려 해발 248m의 태봉산 정상에 도착했다. 높이가 얼마 안 되는 산이지만 이곳에도 정상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자, 이제부터는 태봉산 정상을 떠나 도로에 내려선 후 죽산면사무소까지 걸어가는 일만 남았다. 태봉산 정상에서 산길이 끝나는 지점까지는 계속 내리막길이었다.


▲ 서낭당 고개에 서 있는 이정표 [13:22]

 

▲ 여기도 눈이 많이 남아 있네 [13:23]

 

▲ 쓰러진 나무를 재주껏 피해간다 [13:30]

 

▲ 구교동 갈림길 이정표: 태봉산 정상 100m 전 [13:34]

 

▲ 해발 248m 태봉산 정상 표지석 [13:36]

 

▲ 태봉산 정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회원들 [13:37]

 

▲ 태봉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 [13:44]

 

▲ 가을 분위기가 나는 길 [13:52]

 

▲ 산길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13:59]


14:02   죽산교회 앞에 내려서는 것으로 산길을 마감하고 이어서 마을도로를 따라 차를 세워둔 죽산면사무소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18분 후 차를 세워둔 죽산면사무소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단 비봉산 산행은 끝이 났는데... 청주에서 가질 송년 모임이 4시로 예정되어 있어 시간이 남는 관계로 청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칠장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칠장사는 2007년 아내와 함께 칠장산과 칠현산 산행을 할 때 들른 적이 있다.


▲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죽산교회 [14:02]

 

▲ 차도를 따라 잠시 진행 [14:03]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

 

죽산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스물 네 명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단 한 사람이 주님을 위해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쳐도 우리는 그 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24위나 되는 분이 순교의 거룩한 피를 흘린 죽산이다. 병인박해를 전후하여 죽산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죽산 교우촌으로는 고초골, 남풍리(속칭 남굉이), 용촌, 양대리 등이 있다.

 

죽산 지역 순교자들은 이름은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연구하는 작업은 죽산순교성지의 역사적 의의와 깊이를 더해 줄 것이다. 여러 자료들과 현지답사를 통해 살펴본 죽산순교자들은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부부,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보로시나 부부, 여기중, 여정문과 부인, 아들 일가, 문 막달레나, 한치수 프란치스코, 유 베드로, 이희서, 홍천여, 정덕구 야고보, 최성첨과 그의 장남, 이희서와 그의 사위 이진오, 김회장 도미니코, 김인원, 홍치수, 정 토마스, 금 데레사로 모두 24위이다.


▲ 죽산면사무소 앞에 있는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 조형물 [14:16]

 

▲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 안내문 [14:17]

 

▲ 죽산면사무소 바로 옆에 있는 장원리 삼층석탑 [14:19]

 

▲ 장원리 삼층석탑 안내문 [14:19]

 

▲ 차를 세워둔 죽산면사무소 주차장에 귀환 [14:20]


칠장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가 창건했고, 고려초 혜소가 현재 비가 있는 자리에 홍제관을 짓고 수도를 할 때 7명의 악인을 교화제도하여 득도의 경지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산이름을 칠현산이라 했다고 한다. 1014년(현종 5)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창한 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1674년(현종 15)에는 어떤 세도가가 산을 빼앗아 승려들이 흩어지는 비운을 겪었으나 초견이 절을 다시 찾아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원통전·영각·명부전·천왕문·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인목대비의 친필 족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천왕문 안에 있는 소조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 혜소국사비(보물 제488호), 삼불회괘불탱(보물 제1256호)이 있다. 이밖에 절 입구에 고려시대의 철제 당간지주와 부도 14기 등이 있다.

 

칠장사에는 임꺽정과 어사 박문수의 설화가 남아 있다. 임꺽정이 이곳에서 스승인 병해 스님을 만나 무술을 배우고 의적들을 규합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칠장사에는 임꺽정이 병해 스님을 위해 만들었다는 목조불이 남아 있고, 지장전의 외벽에 임꺽정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는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장원급제를 했다고 한다. 나한전은 지금도 입시철이면 수험생 자녀가 박문수 같이 입신양명하기를 갈망하며 기도하는 부모들로 붐빈다.           


▲ 죽산면에 있는 칠장사에 도착 [14:47]

 

▲ 보물 제20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칠장사 대웅전 [14:48]

 

▲ 칠장사 대웅전 안내문 [14:49]


14:50   대웅전 옆에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아까 보았던 안성 죽산리 석불입상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이곳 칠장사에 있는 것은 보물 제983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원통전과 범종루를 둘러보는 것으로 칠장사 구경을 마치고 차에 올라 청주를 향해 달려갔다. 4시 10분 청주 도착, 율량동에 있는 현대수산에 8명의 회원이 모여 방어와 광어를 썰어놓고 들쭉술과 중국산 술, 그리고 소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2019년 평산회의 송년 산행을 마무리했다.


▲ 보물 제983호인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 [14:50]

 

▲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 안내문 [14:50]

 

▲ 석불입상 옆에 있는 석불좌상 [14:51]

 

▲ 평화의 불 안내문: 얼마 전에 칠갑산 아래에 있는 장곡사에서도 보았다 [14:51]

 

▲ 목조석가삼존불좌상 안내문 [14:52]

 

▲ 영산회상도 안내문 [14:53]

 

▲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삼존불좌상 [14:53]

 

▲ 칠장사 원통전 [14:54]

 

▲ 칠장사 범종루 [1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