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순례길 / 신축화해 길
◈ 일시: 2018년 10월 7일 일요일 / 맑음
◈ 장소: 신축화해 길(화해의 길)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코스: 황사평 성지 → 화북성당 → 화북포구 → 곤을동 별도천 → 별도봉 둘레길 → 관덕정 → 칠성로 → 중앙성당
◈ 거리: 13.85km
◈ 시간: 3시간 35분
09:35 오늘은 천주교 순례길 중에서 제주시에 있는 신축화해 길을 걸어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태풍 콩레이 때문에 이틀 동안 집에만 박혀 있었더니 온몸이 쑤시는 기분이다. 서귀포 버스터미널 앞 정류장에서 9시 56분에 출발하는 182번 급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성판악이 가까워지자 길 옆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태풍 때문에 출입이 통제되었던 한라산에 날이 좋아지면서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몰린 모양이다. 10시 54분, 제주여자중고등학교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했다.
오늘 걸을 신축화해 길 출발점은 황사평 성지다. 버스가 다니는 곳이지만 환승하기가 복잡해 그냥 걸어서 가기로 했다. 거리는 2.5km 정도.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차도와 마을길을 30분 넘게 걸어 황사평 성지에 도착했다. 황사평 성지는 쉽게 말하면 천주교 제주교구 공동묘지다. 1983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공원묘지가 1990년대에 성역화 지역으로 결정되었고 선교사 공덕비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비 등을 세움으로써 1998년에 마무리했다고 한다.
▲ 강정동 아파트 출발 [09:35]
▲ 서귀포 시외버스터미널 버스정류장 [09:51]
▲ 황사평 성지까지 가야 할 거리는 2.3km [10:56]
▲ 감귤의 색깔이 노란색으로 많이 변했다 [11:16]
▲ 천주교 황사평 성지 150m 전 표지판 [11:18]
황사평 천주교 성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 2동에 있는 천주교 제주교구의 공원 묘지. 황사평 천주교성지는 이재수 난 또는 신축교안(辛丑敎案) 때 죽은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묘지로 조성된 것이 그 기원이다. 이재수 난 당시 피살된 사람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로 300~350명 정도였는데, 이들의 시신은 별도봉 밑에 가매장한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1903년 프랑스공사와 조선 정부의 교섭이 이루어져 황사평(黃蛇坪)을 묘지로 제공받았다.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장해간 상태였으므로 무연고 시신들만 황사평으로 이장하였다. 그 뒤 천주교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도 사용해왔다.
1983년부터 공원묘지로 조성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천주교 제주교구 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이 지역을 성역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무연고 묘지를 정리하고, 이재수 난과 관련된 희생자들의 묘를 옮겨오고, 파리외방선교회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을 위한 공덕비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비 등을 세움으로써 1998년에 마무리하였다.
▲ 황사평 순교자묘역 표지석 [11:26]
▲ 황사평 순교자 묘역 [11:29]
▲ 순교자 묘 [11:29]
▲ 황사평 순교자 묘역 표지석 [11:30]
▲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비 [11:31]
11:32 황사평 성지에 있는 순례길 안내판을 살펴보고 본격적인 신축화해 길 답사에 나섰다. 마을길과 화북천을 따라 나 있는 길을 25분 정도 걸은 후 왕복 6차로 차도를 건넜다. 차도 따라 잠시 진행하다 다시 97번 도로를 건넌 후 이번에는 거로마을로 들어갔다. 제주 구시가지 화북동에 있는 거로마을은 여행자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다. 제주시의 낙후된 지역이라는 선입견이 무색할 정도로 마을도로는 무척 깨끗하고 조용했다.
▲ 천주교 순례길 신축화해 길 안내판 [11:32]
▲ 성 가정상 뒷모습 [11:34]
▲ 마을도로를 따라 진행 [11:43]
▲ 황사교에서 바라본 화북천 [11:47]
▲ 가원 버스정류장 [11:53]
▲ 왕복 6차로 차도를 건너간다 [11:57]
▲ 차도 왼쪽을 따라 진행 [12:01]
▲ 거로마을 표지석 [12:08]
▲ 깨끗하고 조용한 거로마을길 [12:12]
12:19 마을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잠시 후 차도를 건너 화북공업단지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에 들어섰다. 화북공업단지는 제주시를 쾌적한 관광 도시로 육성하기 위해 시내에 산재해 있던 공장을 집단으로 유치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화북성당 앞에 도착했다. 화북성당은 1997년에 동문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성당으로 예수성심을 주보로 모시고 있다. 순례길이 바닷가로 향했다. 멀리 수평선이 보인다. 파란 하늘 색깔에 못지않게 물색깔이 참 곱다.
▲ 순례길 표지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12:19]
▲ 관광버스 주차장 [12:25]
▲ 마을도로를 따라 진행 [12:31]
▲ 차도를 건너간다 [12:36]
▲ 길 왼쪽은 화북공업단지 [12:42]
▲ 화북성당 [12:47]
▲ 오른쪽은 삼사석 유적지로 가는 길 [12:54]
▲ 화북동 마을 안내판 [13:01]
13:03 화북포구에 도착했다. 모터보트와 어선들이 줄을 지어 정박해 있는 포구 풍경은 늘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한다. 이에 비해 정박해 있는 배가 거의 없는 포구는 무언가 황량하고 쓸쓸한 기분을 가져다준다. 역시 포구에는 배가 있어야 한다. 바닷가에 있는 쉼터에 들렀다. 의자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오늘 점심 메뉴는 빵과 구운 달걀 2개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출발, 오늘이 휴일이라 그런지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순례길이 지금은 사라져 버린 곤을동 마을로 이어졌다.
▲ 선박들이 정박해 있는 화북포구 [13:03]
▲ 용천수 큰짓물 [13:04]
▲ 화북포구 뒤로 보이는 원당봉 [13:09]
▲ 길 옆에 있는 쉼터에서 점심을 먹고 [13:11]
▲ 점심 먹고 출발 [13:29]
▲ 낚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13:31]
▲ 곤을동 마을 안내판 [13:38]
▲ 길 왼쪽 돌과 나무 그리고 오름올레 [13:39]
▲ 오름올레에 있는 돌과 나무 작품들 [13:41]
13:43 멀리 제주외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나타난 곤을동 4.3유적지 표지판, 화북천 건너에 있던 곤을동 마을에는 57가구가 있었는데 1949년 1월 진압군이 곤을동 마을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비극의 역사적 현장이다. 이전에는 화북천을 건너 곤을동 마을터로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출입이 금지되어 화북천을 따라 나 있는 길을 한참 걸어 원두교를 건넌 후 다시 화북천 따라 곤을동 마을터까지 가야 했다. 순례길 표지판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다.
곤을동 마을터 앞에 도착했다. 예전에 사람이 살던 집들은 온데간데없고 낮은 돌담만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산과 바다를 벗 삼아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바닷가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잠시 걸어가다 왼쪽 좁은 산길로 올라가자 순례길 표지판이 나타났다. 길은 제대로 가고 있는 모양이다. 올레길 18코스와 다시 만났다. 별도봉 오른쪽 산허리를 따라 둘레길이 계속 이어졌다. 제주 앞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둘레길에는 휴일이라 그런지 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 멀리 제주외항이 보인다 [13:43]
▲ 곤을동 4.3유적지 표지판 [13:44]
▲ 원두교 위에서 바라본 화북천 [13:50]
▲ 4.3유적지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13:54]
▲ 4.3유적지 곤을동 마을터 [13:55]
▲ 언덕에서 바라본 제주외항 [14:00]
▲ 순례길 표지를 만났다 [14:00]
▲ 별도봉 둘레길이 시작되는 곳 [14:04]
▲ 별도봉 둘레길에서 바라본 제주외항 [14:10]
▲ 걷기 좋은 산책로인 별도봉 둘레길 [14:10]
14:13 별도봉 둘레길 오른쪽으로 제주외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항구의 규모도 크지만 항구 주변의 물 색깔도 참 곱다. 순례길은 사라봉으로 올라가지 않고 사라봉공원을 왼쪽으로 우회하는 길로 이어졌다. 모충사 입구가 보인다. 사라봉 공원 동남 쪽에 있는 모충사는 제주 주민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조선시대 김만덕 할머니의 묘탑,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 의병항쟁 기념탑이 한 곳에 모여 있어 단순한 관광지의 차원을 넘어서 민족의 정기가 어린 의로운 신전이 되어 있다. 모충사에 들러볼까 하다 일정이 하나 더 남아 있어 그냥 지나쳤다.
▲ 별도봉 둘레길에서 바라본 제주외항 [14:13]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은 대한민국 제주도 어부들의 민속 제례 의식, '굿'이다. 제주도의 영등신앙은 겨울을 지나 봄이 찾아올 때 찾아오는 영등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음력 2월의 풍속으로 500년 이상을 이어져 왔다. 1980년 11월 1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제주도 칠머리당 영등굿은 제주도, 남해, 영남지역의 설화나 전설로 전해지면서 바닷가에서 바다의 평온과 풍어 그리고 바다에서 많은 수확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음력 2월에 열리는 제사 의식이다. 이 의식의 군립 마을에 있는 칠머리당에서 개최되며, 이 섬의 대표적인 풍어제이다. 각 마을의 무당들이 바람의 신인 영등 할망과 용왕, 산신에게 바치는 일련의 여러 의식을 주관한다. 영등 환영 의식은 신을 소환하고, 풍어를 기원하며, 조상신에게 바치는 3장의 연극을 포함한다. 2주 후의 영등 작별 의식은 술과 밥, 떡을 대접하고, 용왕을 맞이하는 의식 등을 포함한다.
▲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공연장 [14:16]
▲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안내판 [14:16]
▲ 건업동 마을 안내판 [14:17]
▲ 사라봉 공원으로 왼쪽으로 우회 [14:22]
▲ 사라봉 공원 안내도 [14:23]
▲ 길 오른쪽 모충사 입구 [14:25]
▲ 마을길을 따라 진행 [14:32]
▲ 마을길을 따라 진행 [14:39]
14:46 제주시내를 지나 바다로 흘러가는 산지천을 건너 칠성로 쇼핑거리에 들어섰다. 차량이 다니지 않고 비가림 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전천후 쇼핑거리다. 보물 제322호인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 진해루 앞을 지나 삼도2동에 있는 중앙성당에 도착했다. 중앙성당은 제주교구 최초의 본당으로 제주도의 천주교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곳이다. 중앙성당에 도착하는 것으로 황사평 성지에서 시작한 신축화해 길 걷기는 모두 끝이 났다. 이제 오늘의 두 번째 답사 코스인 해안누리길 중에서 엄장해암길을 걸으러 갈 차례인데...
엄장해암길 시작점인 구엄포구로 가는 202번 버스를 타려면 제주시 버스터미널로 가야 한다. 버스 타기가 조금 복잡해서 터미널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중앙성당을 떠났는데 거리가 만만치 않아 도착하는 데에 40분 가까이 걸렸다. 터미널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202번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왔다. 버스 기사가 하는 말, 서귀포 가려면 터미널로 가서 타세요. 멍~! 터미널로 가서 버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엄장해암길을 걷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결정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4시 30분에 출발하는 서귀포행 282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을 통해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무척 따사롭게 느껴지는 가을 오후다.
산지천
산지천(山地川)은 제주시 최고의 번화가인 동문시장 입구 맞은편에 흐르는 하천이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산지천을 복개(覆蓋)하여 주택과 상가건물이 형성되면서 환경오염되는 문제가 생기자 1995년도에 산지천을 문화와 역사의 모습 그대로 되살리기 위한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 맑은 물이 흐르는 현재의 산지천 모습을 갖게 되었다. 지금 산지천 물속에는 은어(銀魚), 숭어, 밀어(密魚), 붕어 등의 민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어 여름철이면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산지천 하류인 포구는 고기낚는 돛배와 백로, 갈매기가 어우러진 광경이 아름다워 영주10경(瀛州十景) 중의 하나인 산포조어(山浦釣漁), 즉 바다낚시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산지천이 끝나는 곳에는 '중국피난선(中國避難船)'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이곳은 누구든지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하천을 따라 산책로와 공원, 음악분수대를 조성하고, 매년 여름과 겨울에는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 '산지천 예술마당'과 같은 역사생태하천인 산지천 산책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행사ㆍ공연이 펼쳐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 다리 위에서 바라본 산지천 [14:46]
▲ 제주 칠성로 쇼핑거리 [14:51]
▲ 제주 칠성로 도심속 옛길 안내판 [14:55]
제주목 관아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는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시대부터 성주청 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제주시에서는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를 원래의 양식으로 복구하고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마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과 함께 문헌상에 나타난 중심 건물인 홍화각(弘化閣), 연희각(延曦閣), 우연당(友蓮堂),귤림당(橘林堂) 등의 건물터와 유구(遺構)가 확인되고 유물(遺物)도 출토되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단.기단석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 등 당대(當代)의 문헌(文獻)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관아지 복원 기본설계를 완료, 2002년 12월에 복원(復元)을 완료하였다.
▲ 제주목 관아 진해루 [14:57]
관덕정
보물 제322호. 1448년(세종 30) 제주목사 신숙청(辛淑晴)이 군사훈련청으로 창건한 것으로 제주도에 있는 전통적인 건물 중 가장 크다. 1480년(성종 11) 목사 양찬(梁讚)이 중수했고, 1690년(숙종 16) 이우항(李宇恒)이 개축하고, 1753년(영조 29) 김몽규(金夢圭)가 중창했다. 현재의 건물은 1850년(철종 1)에 재건한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다. 특히 1924년 관덕정 옆으로 도로를 낼 때 깊은 처마가 걸린다고 해서 일본인들에 의해 처마가 45㎝가량 절단되어 기둥 간살이의 담벼락이 제모습을 잃게 되고, 처마의 깊이와 기울기가 육지의 것과 비슷하게 되었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사방이 뚫려 있다.
장대석 바른층쌓기를 한 높지 않은 이중기단 위에 원뿔 모양으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26개의 둥근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얹었고, 기둥 사이에 3개의 화반을 놓았으며, 화반 위에 운공(雲工)을 끼웠다. 지붕틀은 7량 구조로 내부에 4개의 고주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전면 툇간에는 마루를 깔지 않고 장방형 현무암판을 깔아 우물마루를 깐 나머지 부분과 구별하고 있다. 내부의 포벽(包壁)에는 처음 만들 때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7폭의 벽화가 남아 있다. 1702년(숙종 28) 이형상(李衡祥)이 제주목사로 지내는 동안 견문한 것들을 기록한 〈남환박물 南宦博物〉에 관덕정에 관한 기록도 있다.
▲ 보물 제322호인 관덕정 [14:58]
▲ 관덕정과 진해루가 보이는 풍경 [15:03]
제주 중앙성당
제주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알려진 것은 1801년 정난주(마리아, 아명 정명련)가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되면서부터이다. 1845년에는 김대건(안드레아) 성인이 제주 앞바다에 표착하였다. 1858년에는 함덕 출신의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이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전교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기량은 이후 육지를 오가며 성사를 받았고, ‘제주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여 제주 신앙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기량은 1866년 체포되어 경상도 통영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그로부터 교리를 배워 예비 신자가 된 김이라는 사람은 박해를 피해 살아났으나 1899년에 사망하였다.
제주 지역에 복음이 다시 전파된 것은 제주 중문 색달리 출신인 양용항(베드로)과 이 라우렌시오가 육지를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1898년 4월경에 세례를 받고 제주로 돌아와 신 아우구스티노와 바오로 형제, 김생원 등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다시 제주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전교 활동이 일어나자 제8대 조선교구장 민 아우구스티노(G. Mutel, 閔德孝) 주교가 제주본당의 설립과 성직자 파견을 결심하게 되었다.
제주중앙성당은 제주교구 최초의 본당으로 1899년 4월 22일에 설립되었다. 수원 갓등이 본당(현 왕림 본당)에 재임하던 배 카를로(C. Peynet) 신부와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새 신부가 제주에 임명되어 5월 26일 제주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6월 14일 당시 제주읍 한짓골, 즉 대로동(大路洞)[현 제주시 삼도2동 108번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0년 5월에 배 카를로 신부가 전라도로 전임되었다. 구 마르첼리노(M. 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6월 12일에는 보좌 김원영 신부가 정의군으로 가서 ‘한논(大沓) 본당(현 서귀포시 호근동)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제주 본당의 첫 번째 자본당이었다.
▲ 제주 중앙성당 입구 [15:07]
▲ 제주 중앙성당 [15:07]
▲ 제주 중앙로 상점가 골목시장 입구 [15:21]
▲ 제주 버스터미널 [16:19]
▲ 강정동 아파트에 귀환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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