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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천주교 순례길

2018.09.12. [천주교 순례길 3] 정난주 길

by 사천거사 2018. 9. 12.

천주교 순례길 / 정난주 길

◈ 일시: 2018년 9월 12일 수요일 / 흐림

◈ 일시: 정난주 길(고통의 길) / 제주도 서귀포시

◈ 일시: 정난주 마리아 묘 → 대정성터 추사관 방사탑 대정향교 섯알오름

           알뜨르 비행장 모슬포성당

◈ 일시: 14.29km

◈ 일시:3시간 12분


 

 

 

 

 

 

 


 


12:50   오늘은 오후 시간에 천주교 순례길 중에서 정난주 길을 걸어보기고 하고 아파트를 나섰다. 1132번 도로 반참모르 버스정류장에서 1시 5분에 출발하는 202번 버스에 승차, 대정읍 인성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한 후 천주교 대정성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30분 남짓 걸려 대정성지에 도착, 성지 안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 묘를 참배했다. 도대체 정난주가 어떤 인물이기에 천주교에서 성지까지 만들었을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정난주 마리아는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의 형인 정약현의 딸이고 고모부가 이승훈이며 17세에 장원급제한 황사영이 남편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인 고모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도가 되었으나 남편 황사영이 일으킨 백서 사건 때문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 대정현의 관비가 된 정난주는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켰으며 66세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천주교를 믿어 큰 아픔을 겪었지만 이를 꿋꿋하게 이겨 내고 결국 천주교에서 숭배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 강정동 아파트 출발 [12:50]

 

▲ 반참모르 버스정류장: 1시 5분에 출발하는 202번 버스 승차 [12:56]

 

▲ 인성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13:48]

 

▲ 대정지서 옛터 추모 표지석 [13:57]

 

▲ 천주교 대정성지 500m 전 이정표 [14:13]

 

▲ 천주교 대정성지에 도착 [14:19]

 

▲ 한복을 입고 있는 성모 마리아 [14:20]


정난주 마리아


정난주(丁蘭珠)는 1773년(영조 49)에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아버지는 정약현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정약종, 정약전, 다산 정약용은 그녀의 숙부이다. 남편은 황사영이고, 아들은 황경헌이다. 정난주는 둘째 작은아버지인 약전에게 서학을 배우고, 장성한 뒤에는 고모부인 이승훈으로부터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도가 되었다. 남편 황사영은 17세에 장원급제한 인물로서 정약종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정난주와 결혼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정난주는 시어머니와 함께 그녀의 간난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경기도 남양주의 마재로 피신하였다. 황사영은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 골짜기로 피신하여 천주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백서를 써서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이 일로 가산은 몰수되고 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유배되고, 정난주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귀향길 중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추자도 예초리의 황새바위 갈대밭에 아들을 내려두고 떠났다. 황경헌은 마을에 살던 노인이 데려다 길렀으며, 현재 그 후손들이 남아 있다.

 

제주 대정현의 관비가 된 정난주는 대정현 토호 김석구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는데, 김석구는 한때 별감으로 관속이었고, 현감과는 막역지우로 그의 자문역을 자임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여서 동헌 바로 뒤에 살았다. 이곳에서 정난주는 김석구의 아들 형제를 양자처럼 기르며 살면서, 또한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켰다.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한양 할머니’가 죽었다며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난주가 죽자 김석구의 아들 김상집이 그녀를 모슬봉 북녘, 속칭 한굴왓에 장사지냈다 하며,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9번지에 정난주 묘가 있다. 천주교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정난주 마리아의 묘지가 순교자묘역으로 성역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고 있다.


▲ 정난주 마리아 묘 [14:22]

 

▲ 순교자 정난주 마리아 안내문 [14:24]


14:26   정난주 마리아 묘를 출발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순례길 답사에 들어갔다. 이곳 천주교 대정성지는 2015년 5월 올레길 11코스를 걸을 때 들렀던 곳이다. 마을도로와 차도를 따라 30분 남짓 걸어 추사유배지에 도착했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대정현의 읍성인 대정성지 안에 추사유배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9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한 김정희는 이곳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세한도라는 걸작품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비바람을 맞고 피어난 꽃이 더 아름답다고 했던가, 추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 야자수가 서 있는 천주교 대정성지 [14:26]

 

▲ 전봇대에 붙어 있는 표지를 따라 간다 [14:29]

 

▲ 마을도로를 따라 진행 [14:38]

 

▲ 평범한 주택 벽이 작품으로 변했다 [14:48]

 

▲ 흑돼지 요리 식당 건물 벽도 하나의 작품 [14:52]

 

▲ 대정우물터 [14:55]

 

▲ 대정우물터 안내문 [14:55]


추사 유배지

 

대정현성의 동문자리 앞에 위치한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는 제주 유배생활에서 완성된 김정희의 예술과 삶을 살펴 볼 수 있는 장소이다. 2010년 5월에 건립한 제주 추사관을 지나 돌담으로 둘러싸인 추사 유배지로 들어서면, 담장 안쪽에는 탱자나무가 늘어서 있고, 대문간에는 제주만의 독특한 대문인 정낭이 위치해 있다. 마당에는 초가집 3채가 ‘ㄷ’ 자형으로 자리 잡고 안거리 안채와 모커리 별채, 밖거리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정제[부엌]가 딸린 안거리는 주인 강도순의 집이고, 모커리는 김정희가 머물렀으며, 안거리와 마주한 밖거리는 김정희가 배움을 청해오는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던 공간이었다.

 

제주도는 ‘추사 적거지’를 2002년 4월 17일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하였고, 문화재청은 2007년 10월 10일에 ‘추사 유배지’로 이름을 고쳐 사적 제487호로 승격시켰으며, 2011년 7월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최근 2011년에는 김정희의 제주 유배생활을 체험하는 길 즉, 추사 유배길 3개 코스가 개장되었다. 이는 ‘귀양다리[유배인을 뜻하는 제주어]’라 하여 김정희의 흔적과 자취가 남아있는 서귀포시 대정읍과 안덕면을 중심으로 유배 노정을 따라가는 길인데, 김정희 제주 유배 생활의 자취를 체험할 수 있도록 개발되어 많은 관광객과 도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대정성지(大靜城址)

 

대정성지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터이다.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조선 태종 16년(1416) 제주도의 행정 구역 정비로 대정현이 설치되고, 2년 뒤에 현감 유신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을 축조했다. 이 읍성은 산과 계곡을 끼고 있는 일반적인 읍성과는 달리 집과 밭들 사이에 만들어져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614m이고, 높이는 약 5.1m이다. 지금은 성벽 안에서 군데군데 옛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문은 동·서·남문 3개만 설치되고 북문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관아와 창고들이 있었으며, 이 지역 방어를 위하여 10여 곳에 봉수대를 설치해 먼 곳에 외적의 침입을 알렸다.


▲ 추사유배지와 대정성지 안내판 [14:57]


제주추사관

 

제주추사관은 조선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0년 5월 건립되었다. 제주추사관의 전신은 1984년 지주지역 예술인들과 제주사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추사유물전 시관이다. 그러나 전시관이 낡은데다, 2007년 10월 추사유배지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면서 그 격에 걸맞게 재건립되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새롭게 제주추사관을 완공하였다. 제주추사관은 추사기념홀을 비롯해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부국문화재단, 추사동호회 등에서 기증해 주신 '예산김정희종가유물일괄', 추사 현판 글씨, 추사 편지 글씨, 추사 지인의 편지 글씨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제주추사관 내부 [15:01]

 

▲ 추사 김정희 상 [15:04]


15:06   대정골 돌하르방 안내문이 있어 한번 읽어 보았다. 제주어인 '돌하르방'은 '돌할아버지'라는 뜻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서 수호신 노릇을 하게 했다고 한다. 1132번 도로를 건너 단산 가는 길에 들어섰다. 잠시 후 대정향교 뒤에 솟아 있는 단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방산과 함께 보는 모습도 좋고 방사탑과 함께 보는 모습도 좋다. 길 옆에 있는 밭에서는 마늘심기가 한창이었다. 대정읍은 전국 마늘 생산량의 10%, 제주도 내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마늘의 고장이다. 지난 9월 8일에 들렀던 대정향교 옆을 지나간다.


돌하르방

 

제주도 방언으로 돌할아버지라는 뜻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져서 수호신 구실을 해왔다. 한라산 일대에 흔한 용암석으로 만든 돌하르방은 용암석 특유의 다공질의 재질을 잘 살려 입체감을 더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쏘아보는 듯한 야무진 눈망울로 마을에 침입하는 잡귀나 잡인을 쫓아내었다. 벙거지를 꾹 눌러쓴 불룩한 뺨 옆에는 길쭉한 귀가 달려 있고 두 손으로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 험상궂은 얼굴에 미소마저 담뿍 담고 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퍽 익살스런 인상을 주기도 한다. 돌하르방의 명칭은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달라 제주시내에서는 '우석목', 보성리(옛 대정)에서는 '무석목', 성읍에서는 백하르방이라고도 일컬었다. 또한 한학자 간에는 옹중·옹중석·돌부처·미륵이라고도 불렸다. 돌하르방의 기원을 몽골풍에서 찾는 주장도 있다. 제주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 대정골 돌하르방 안내문 [15:06]

 

▲ 수호신 역할을 한 대정골 돌하르방 [15:07]

 

▲ 단산과 대정향교 가는 길 이정표 [15:10]

 

▲ 산방산과 단산이 보이는 풍경 [15:16]

 

▲ 방사탑과 단산이 보이는 풍경 [15:21]

 

▲ 밭에서는 마늘심기가 한창이다 [15:28]

 

▲ 새미물 표지석 [15:29]

 

▲ 용천수 새미물 [15:29]

 

▲ 지난 9월 8일 들렀던 대정향교 [15:31]


15:33   길 옆에 서 있는 차 한 대가 이채롭다. 좋은 말로 고색이 창연하다고 해야 할까. 번호판도 없지만 굴러는 가는 모양이다. 사계리서동 버스정류장에서 마을길을 걸어 해안 쪽으로 가자 사계리 해안체육공원이 나오고 이어서 지난번 지질 트레일을 걸을 때 만났던 사람발자국과 동물발자국 화석산지가 눈 앞에 펼쳐졌다. 이제부터는 해안도로를 따라 송악산 아래까지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 길이 보통 길이 아니다. 건설교통부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 있는 길이다.


▲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자동차 [15:33]

 

▲ 멀리 산방산이 보인다 [15:39]

 

▲ 사계리서동 버스정류장 [15:45]

 

▲ 해안을 향하여 가는 길 [15:51]

 

▲ 사계리 해안체육공원 [16:00]

 

▲ 사람발자국과 동물발자국 화석 산지 안내판 [16:02]

 

▲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이 보이는 풍경 [16:08]

 

▲ 인어상 뒤로 보이는 형제섬 [16:18]

 

▲ 건설교통부에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었다네 [16:21]


16:23   마라도 가는 여객선 선착장 입구에서 송악산을 한 바퀴 도는 올레길과 헤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동알오름으로 올라가는 올레길과 만나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어가게 되었다. 초원지대로 이루어진 동알오름을 지나 섯알오름에 올라서니, 일본군이 만든 고사포 진지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군은 제주도 전역을 요새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섯알오름에서 내려오는 길, 왼쪽으로 제주 4.3사건 학살 터가 보인다. 이 또한 역사적인 비극의 현장이다. 제주도는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잔인하고 흉폭한 인간 본성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 언덕에서 내려다본 마라도 여객선 선착장 [16:23]

 

▲ 동알오름으로 올라가는 길 [16:28]

 

▲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이 보이는 풍경 [16:30]

 

▲ 올레길 10코스와 다시 만났다 [16:31]

 

▲ 다크 투어리즘 안내판 [16:32]

 

▲ 제주 섯알오름 일제 고사포진지 [16:35]

 

▲ 섯알오름에서 내려가는 길 [16:41]


섯알오름 학살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4·3 유적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당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체포 구금했다. 이때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도 820명의 주민을 검속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 한림·한경·대정·안덕 등지에서도 374명이 검속됐는데, 이들 중 149명을 대정읍 상모리 절간 고구마 창고에 수감하였다가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새벽 4~5시경 집단학살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날 새벽 2시경 한림지서에 검속되었던 63명도 계엄당국에 의해 집단총살 당하여 이곳에서의 희생자는 212명에 이른다.


▲ 제주 4.3사건 섯알오름 학살 터 안내문 [16:42]

 

▲ 제주 4.3사건 섯알오름 학살 터 [16:43]


16:50   알뜨르 비행장에 도착했다. '알'은 아래, '드르'는 들을 뜻하는 말이니 합치면 '아래에 있는 들'이란 뜻이 된다. 1926년부터 건설에 나섰던 알뜨르 비행장의 예전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 당시에 건설된 20개의 격납고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로서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알뜨르 비행장을 벗어난 후 한 시간 가까이 밭길과 마을길을 걸어 오늘 걷기의 종착지인 모슬포성당에 도착했다. 걷기 시작을 늦게 한 탓인지 시간이 많이 되었네.

 

서귀포로 돌아가기 위해 모슬포우체국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시간을 확인해 보니, 6시 10분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다. 20여 분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하나 사서 마시니 속이 다 후련해지며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단숨에 사라지는 기분이다. 평소에도 맥주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산행이나 트레킹을 끝마치고 마시는 맥주 맛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정시에 버스 출발, 아무 일 없이 어둠이 많이 내려앉은 아파트에 돌아오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쳤다.


알뜨르 비행장

 

알뜨르 비행장. 제주사람들은 대정읍 알뜨르 평야에 건설했던 일본 해군항공대 비행장을 이 지역 이름을 따 이렇게 부른다. 해안가에 맞닿은 알뜨르 비행장은 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1926년 처음 계획된 비행장 건설은 1930년대 중반까지 10여년 동안 1차로 이뤄졌다. 일본군은 1937년에 비행장 확장계획을 세워 기존 20만평에서 2차로 1945년까지 80만평으로 비행장을 확장해 사세보의 해군항공대 2500여명과 전투기 25대를 배치했다.가미가제호 조종사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주민들이 지금 밭으로 사용하는 알뜨르 평야에는 당시 건설된 20여개의 격납고가 해안을 향해 자리잡고 있다. 5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으나 무척 견고하게 만들어져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부근에는 대공포 진지와 정비고, 막사로 사용했던 건물들의 흔적도 있다. 또 비행장 동북쪽 탄약고터는 거의 원형대로 남아있으며, 그 안에는 2개의 탄약고와 2층으로 만들어진 복도가 있다. 몇년전 당시 일본군 장교로 알뜨르 비행장에 근무했던 일본인들이 이곳을 방문한 뒤 이 지역의 한 학교에 성금을 전달하려다 거절당하기도 했다.


▲ 최평곤 작가의 작품 '파랑새': 높이 8.5m [16:50]

 

▲ 제주 4.3사건 섯알오름 유적지 표지판 [16:51]

 

▲ 저 사람은 왜 저기 서 있는 건가? [16:57]

 

▲ 멀리 모슬봉이 보인다 [17:04]

 

▲ 해안으로 가는 길 [17:18]

 

▲ 가파도, 마라도 정기여객선 선착장 가는 길 [17:29]

 

▲ 순교자 이규석 삼부자 묘 안내문 [17:33]

 

▲ 천주교 순례길 정난주 길 종점인 모슬포성당 [17:45]

 

▲ 모슬포우체국 버스정류장: 6시 10분 202번 버스에 승차 [17:49]

 

▲ 강정동 아파트에 귀환 [1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