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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제주 올레길

2018.07.30. [제주 올레길 걷기 23] 18코스 제주원도심→조천

by 사천거사 2018. 7. 30.

 

제주 올레길 18코스 걷기

  

 ◈ 일시: 2018년 7월 30일 월요일 / 비 맑음 폭염

 ◈ 장소: 제주 올레길 18코스

 ◈ 코스: 간세라운지/우유부단 중앙로점 → 동문시장  사라봉 → 불탑사 → 대섬  삼양해수욕장  조천 만세동산

 ◈ 거리: 19.7km

 ◈ 시간: 5시간 9분 

 



 

도시를 떠나기 위해 도시에 선다. 제주올레의 스물 세번째 길 '산지천-조천' 올레는 제주시의 도심 한복판, 동문로터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동문로터리 산지천 마당,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산지천을 따라 걸음을 뗀다. 길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산책로로 이어지지만, 그 아래 살아 있는 산지천에는 물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기도 한다. 제주항을 지나서는 바다로부터 방향을 틀어 언덕을 오른다. 제주 시내권에 박힌 보석같은 두 오름, 사라봉과 별도봉이 발걸음을 이끈다. 사라봉은 오르기 어렵지 않은 높이의 오름이지만 제주 시내와 바다, 한라산을 바라보는 전망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사라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오름의 옆  모습, 억새와 바다가 어우러져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 절경을 따라 가노라면 돌담들만 남아 있는 텅 빈 땅이 나타난다. 4.3 당시 한 마을 전체가 불타 없어진 곤을동 마을 터다. 흔적만 남은 집터를 보며,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 하루 아침에 가족과 이웃 대부분이 죽고 집마저 불타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사람들, 제주의 아픈 상처를 생각한다.

 

잠시 무거워진 발걸음은 포구와 해변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에서 씻어내고, 다시 시골의 정취가 묻어나는 원당봉 둘레, 오랜 세월에도 여전히 우뚝 서 있는 옛 원당사의 오층석탑, 신촌으로 제사 먹으러 가던 옛길을 따라 여정을 이어간다. 그리고 다시 바다. 시비코지에서 닭모루로 이어지는 바당길은 숨이 탁 트이는 풍경, 그러나 숨이 멎을 만큼 장대한 풍광 안에 나를 세운다. 제주의 자연이 주는, 제주올레 18코스가 주는 가슴 뭉클한 선물이다. 이 풍광을 만나기 위하여, 이 장대한 자연의 그림 속에 나를 한 점 찍어 넣기 위하여 도시로부터 출발하여 이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가. 그 풍광 속에 나를 충분히 놓아둔 후에야 아름다운 신촌의 포구와 대섬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난다. 연북정을 지나 조천 만세동산에 이르러 가슴 벅찬 여정을 마친다.

 

08:30   제주도에 온 지 5일째, 오늘은 오랜만에 올레길을 걷기로 하고 강정동 아파트를 나섰다. 2010년 2월에 시작한 올레길 걷기는 거의 마무리 단계인데 18~21코스까지 모두 4개의 코스가 남아 있는 상태다. 오늘 걸을 코스는 18코스, 제주 원도심에서 조천 만세동산까지로 거리는 19.7km다. 제주는 버스 운행체계가 잘 되어 있어,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굳이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고 버스로도 쉽게 올레길 들머리와 날머리로 이동할 수 있다. 


강정동 아파트에서 15분 거리에 서귀포 버스터미널이 있다. 이 터미널에서는 제주도 거의 모든 지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일단 제주시청까지 가기 위해 182번 급행버스를 탔다. 사실,  182번 버스는 281번 완행버스보다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운행 횟수가 많은 281번을 이용하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9시 24분 버스 승차, 제주시청에서 312번 버스로 환승, 중앙로터리에서 내려 올레길 18코스 시작점이 있는 간세라운지를 향해 걸어갔다.   


▲ 강정동 아파트 출발 [08:31]


▲ 서귀포 버스터미널 [08:45]


▲ 서귀포 버스터미널 앞 버스승강장 [08:49]


▲ 버스승강장 옆에 있는 조형물 [09:11]


▲ 제주시청 버스승강장 [10:38]


▲ 중앙로터리 버스승강장 [10:47]


▲ 올레길 18코스 시작점 간세라운지 [10:53]


10:55   간세라운지를 출발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올레길 18코스 걷기에 들어갔다. 중앙로에서 제주성지 쪽으로 진행을 하자 이도1동에서 제작한 남문골 이야기 벽화가 눈길을 끈다. 남수각 부분 150m 정도가 복원되어 있는 제주성지 앞에는 제사기능과 교육기능을 함께 가진 귤림서원,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제주도 교학에 공을 세운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송시열 다섯 분의 업적을 기리는 오현단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 올레길 18코스 시작점 표지판 [10:55]


▲ 올레길 18코스 안내도 [10:55]


▲ 이도1동에서 제작한 남문골 이야기 벽화 [11:01]


제주성지


제주성은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조선 초기에 처음 쌓은 것은 아니고, 탐라국 당시 쌓았던 것을 고려 때 왜구 방어용으로 보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일부인 남수각 부분이 150여m 정도 복원되어 있다. 역사가 깊고 제주도의 중심지역을 지켰던 이 곳이 보존상태가 좋지못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1928년사이에 건입동 포구 앞바다를 매립할 때 성곽의 돌을 매립골재로 사용하면서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헛 놓인 돌 하나 없이 듬직한 성곽 주위에는 귤과 유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가을철 귤이 익을 무렵이면 성주위는 가을색으로 절정을 이뤘다고 전한다. 허물어져가는 옛 성터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튼튼한 성을 쌓으며 왜침의 `바람`을 잠재우려 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제주성지 [11:03]


귤림서원


귤림서원은 제사기능을 가진 충암묘(沖菴廟)와 교육기능을 가진 장수당(藏修堂)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서원이다. 충암묘는 1578년(선조 11)에 조인후(趙仁後)판관이 충암 김정(沖菴 金淨)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묘(祠廟)이다. 충암묘란 사호(祠號)는 김정의 호를 취한 것이며, 당초의 위치는 가락천 동쪽이었다. 장수당(藏修堂)은 이회(李禬)목사가 향인 김진용(金晉鎔)의 건의로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高得宗)의 옛 집터에 세웠던 강당이다.귤림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1875년(고종12)봄에는 이희충(李熙忠)목사가 장수당 옛 터에 경신재(敬信齋)를 세워서 선비의 자제들이 학업을 닦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1892년(고종 29)에 조천출신 유생 김희정 등이 옛터에 오현의 뜻을 기리고자 조두석(俎豆石)을 세우고 제단을 축조하여 배향했던 곳이 바로 오늘날의 오현단이다.


▲ 귤림서원 [11:04]


오현단


조선시대에 이 곳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5현)을 기리고 있는 제단으로, 이들의 위패를 모시던 귤림서원의 옛 터에 마련되어 있다. 5현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 선생, 중종 29년(1534)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선생,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 선생,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선생 등 다섯 분이다.


고종 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비를 세우고 제단을 쌓아놓았는데, 원래는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기 위한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현종 6년(1665) 판관 최진남이 이 묘를 장수당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은 뒤, 숙종 8년(1682)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김정 선생·송인수 선생·김상헌 선생·정온 선생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숙종 21년(1695) 송시열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5현을 배향하게 되었으나,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 서원이 헐리게 되어, 그 터에 이 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단내에 있는 5현의 자취로는 철종 7년(1856) 송시열 선생의 글씨로 하여 판관 홍경섭이 바위에 새긴 ‘증주벽립’이라는 글씨와,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가 남아 있다.


▲ 오현단 안내문 [11:05]


▲ 오현교에서 바라본 산지천 [11:07]


▲ 남수각 하늘길 벽화거리 [11:09]


▲ 남수각 하늘길 벽화거리 안내판 [11:10]


11:11   제주동문공설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전통시장이었다. 마침 초입에 마땅한 국밥집이 있어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하고 자리에 앉아 순대국밥을 시켰다. 가격은 7,000원. 내가 잘 아는 분의 말씀에 의하면, 순대국밥집 주인 할머니가 직접 음식을 만들면 무조건 맛이 있다고 하셨는데 오늘도 그 말씀이 그대로 증명이 되었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출발, 동문시장을 벗어난 후 산지천을 따라 나 있는 길을 걸어가다 김만덕 기념관을 만났다. 기녀였던 김만덕은 객주를 하며 번 돈으로 빈민을 구제해 의녀반수의 벼슬을 받은 사람이다. 


제주 동문시장


동문시장은 제주특별자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재래 상설시장이다. 1945년 제주 상업의 근거지가 되는 동문상설시장이 만들어졌고, 1946년 4월에 모슬포에 국방 경비대 제9연대가 창설되면서 육지에서 제주를 찾는 왕래객이 많아졌다. 제주시 일도리 1146번지(현 동문로타리 일대) 남수각 하천 하류 주변에 각종 일용품 및 채소, 식료품 등을 판매하는 노점이 하나 둘 생기면서 매일 장사하게 된 것이 동문시장의 초기 형태이다.


1954년 3월 13일 동문상설시장에 시장 건물 112채가 불타고, 재산피해가 1억 7900만환에 달하는 대형 화재가 발생하였다. 1954년 10월 28일에도 상인의 담뱃불로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첫 번째 화재로 타다 남은 건물 23채(133점포)를 모두 태웠다. 이후 동문상설시장은 당시의 자리에서 현재의 동문공설시장의 자리로 옮겨 1954년 11월 9일 다시 개장되었다.


▲ 제주 동문공설시장 입구 [11:11]


▲ 오른쪽 민자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11:11]


▲ 민자식당 순대국밥 상차림 [11:20]


▲ 관광객들로 붐비는 제주 동문시장 [11:39]


▲ 동문로터리에 있는 조형물 [11:41]


산지천


산지천(山地川)은 제주시 최고의 번화가인 동문시장 입구 맞은편에 흐르는 하천이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산지천을 복개(覆蓋)하여 주택과 상가건물이 형성되면서 환경오염되는 문제가 생기자 1995년도에 산지천을 문화와 역사의 모습 그대로 되살리기 위한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 맑은 물이 흐르는 현재의 산지천 모습을 갖게 되었다. 지금 산지천 물속에는 은어(銀魚), 숭어, 밀어(密魚), 붕어 등의 민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어 여름철이면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산지천 하류인 포구는 고기낚는 돛배와 백로, 갈매기가 어우러진 광경이 아름다워 영주10경(瀛州十景) 중의 하나인 산포조어(山浦釣漁), 즉 바다낚시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산지천이 끝나는 곳에는 '중국피난선(中國避難船)'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이곳은 누구든지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하천을 따라 산책로와 공원, 음악분수대를 조성하고, 매년 여름과 겨울에는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 '산지천 예술마당'과 같은 역사생태하천인 산지천 산책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행사ㆍ공연이 펼쳐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 산지천 안내판 [11:42]


▲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산지천 [11:43]


제주 의녀반수 김만덕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2남 1녀 고명딸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사별하고 11살에 기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제주목사에게 찾아가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기녀가 된 것을 호소하여 기녀 명단에서 삭제되고 양녀로 환원되었다. 김만덕은 객주집을 차리고 제주 특산물을 서울 등지에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 1790년부터 1794년까지 제주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김만덕은 육지에서 곡물을 사들여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한편 관가에도 보내어 구호곡으로 쓰게 하였다. 이러한 선행으로 정조는 김만덕에게 내의원 의녀반수 직을 제수하였으며, 영의정 채제공의 주선으로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묘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에 있다.


▲ 김만덕 기념관 [11:48]


▲ 제주 의녀반수 김만덕 객주 재현 안내문 [11:51]


11:57   제주 4·3 사건 유적지인 제주 주정공장 옛터를 지났다. 제주 4·3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위정자들이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들이었다. 제주 4·3 사건만 해도 그렇다. 남로당 무장대를 토벌하겠다는 국가적 행동이 정치적 색채를 띠기 시작하면서 무분별한 주민 학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올레길이 언덕으로 올라갔다. 제주항이 내려다보인다.  


제주 4·3사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 제주 4·3 사건 유적지인 제주 주정공장 옛터 [11:57]


▲ 도로 건너 제주 연안여객선 터미널 [11:57]


▲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 [11:58]


▲ 재미있는 올레길 이정표 [12:00]


▲ 칠머리당 영등굿 안내판 [12:00]


▲ 올레길에서는 벽화가 자주 눈에 띤다 [12:02]


▲ 도로 바닥에 설치한 올레 18코스 표지: 산티아고 순례길 냄새가 풍긴다 [12:03]


▲ 사봉낙조 안내 벽화 [12:04]


▲ 언덕에서 내려다본 제주항 [12:06]


12:08   사라봉 공원 가는 길에 들어서서 도로를 따라 7분 정도 걸어가자 왼쪽에 들머리가 있는 게 보였다. 사라봉 정상에 오르자 사라봉 공원 표지석이 반겨준다. 사라봉 공원은 제주시를 대표하는 사라봉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한 곳으로 제주 시민뿐만 아니라 제주를 찾는 관광객도 즐겨 찾는 공원이다. 해질녘 붉은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는 광경은 예로부터 사봉낙조라 하여 영주10경의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사라봉에서 내려와 별도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오른쪽 갈림길 이사라봉으로 가는 길 [12:08]


▲ 왼쪽이 사라봉 정상으로 가는 길 [12:15]


▲ 제주 사라봉 일제 동굴진지 [12:18]


사라봉 공원


사라봉 공원은 제주시 동문로터리에서 동쪽으로 2km 거리에 있는 143m 높이의 낮은 동산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사봉 낙조는 영주 12경의 하나로 성산일출과 대조가 될만하다. 북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는 한라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제주시민은 물론 관광객도 즐겨 찾는다. 사라봉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공원으로 가는 길에 모충사가 있고 사라봉 동쪽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있는 별도봉이 들어앉았다. 그 기슭에 우당도서관이 있는데 이곳에서 부터 사라봉 뒤편을 돌아 제주항을 거친 다음 탑동까지 가는 코스는 이름난 드라이브 코스이다.


▲ 사라봉 정상에 있는 사라봉공원 표지석 [12:24]


▲ 사라봉 공원에 있는 봉수대 [12:26]


▲ 제주 사라봉 일제 동굴진지 안내문 [12:27]


▲ 제주 사라봉 일제 동굴진지 [12:28]


▲ 별도봉 산책로 안내판 [12:36]


제주 칠머리당영등굿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바람의 여신인 영등 할머니와 바다의 신인 용왕에게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이다. 굿을 여는 사람은 무당이지만 해녀와 선주, 주민들이 모두 참여한다.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의 전통과 주민들의 삶의 모습, 자연관과 신앙심을 모두 담고 있으며 다른 지방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이색적인 문화재이기에 그 가치가 높다.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유네스코에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제주 칠머리당영등굿 공연장 [12:38]


12:39   별도봉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들어섰다. 올레길은 왼쪽으로 나 있는 산책로이지만 이를 무시하고 정상 쪽으로 향한 것이다. 어느 길이든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니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은가. 별도봉 정상에서는 제주항 국제여객선 터미널과 제주외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별도봉에서 내려와 화북천 위에 놓인 원두교를 건넌 후 화북1동 곤을마을로 들어갔다. 어? 여기도 제주 4·3 사건 유적지가 있네. 사실 제주 4·3 사건 유적지는 제주도 전역에 걸쳐서 찾아볼 수 있었다.   


▲ 갈림길에서 별도봉 정상 가는 길 선택 [12:39]


▲ 야자 매트가 깔려 있는 길 [12:42]


▲ 별도봉 정상을 오르다 바라본 제주항 [12:44]


▲ 별도봉 정상 [12:46]


▲ 별도봉 정상에서 내려오며 바라본 화북동 방면 [12:50]


▲ 제주외항 [12:54]


▲ 화북천 위에 놓인 원두교 [13:09]


▲ 화북1동 곤을부락 올레길 18코스 이정표 [13:11]


▲ 곤을동 제주 4·3 사건 유적지 [13:15]


13:17   돌과나무 오름올레 정원을 지나면서 올레길이 바닷가로 향했다. 제주도 바다는 언제 보아도 색깔이 곱다. 맑은 날에는 검푸른 바다가 보기에 좋고, 흐린 날에는 흐린 날대로 잿빛 바다가 보기에 좋다. 화북포구를 지난 후 올레길이 잠시 내륙으로 들어갔다. 별도연대를 지나 걸어가는 길, 원두막에 앉아 있는 외국인 남녀가 수박을 주문한 모양이다. 늙스구레한 주인장이 아이스박스에서 수박을 꺼내 들고가는 모습이 보인다. 올레길은 다시 바닷가 벌랑포구 쪽으로 내려갔다.


▲ 돌과나무 오름올레 정원 [13:17]


▲ 해안도로를 따라 진행 [13:24]


▲ 바닷물이 잔잔한 화북포구 [13:28]


▲ 화북포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 [13:30]


▲ 돌담 따라 나 있는 길 [13:33]


▲ 올레길 벽화 [13:36]


별도연대(瞥刀煙臺)


별도연대(瞥刀煙臺)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연대이다. 1996년 7월 18일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23-9호로 지정되었다.

연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정치·군사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을 말한다. 봉수대와는 기능면에서 차이가 없으나 연대는 주로 구릉이나 해변지역에 설치되었고 봉수대는 산 정상에 설치하여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피워 신호를 보냈다. 제주시 화북동 동쪽 연대동산에 있는 별도연대는 화분진에 소속되었으며, 화북 대라고도 부른다. 현재 많이 허물어져 받침돌만이 불규칙하게 남아있다. 이곳 연대에는 장군 6명과 봉수군 12명이 배치되어 교대로 24시간 지켰으며, 동쪽으로 조천 연대, 서쪽으로 수근 연대와 신호를 주고 받았다.


▲ 별도연대 [13:40]


▲ 잠시 시골길을 따라 걷는다 [13:43]


▲ 해안누리길 안내판 [13:47]


▲ 다시 바닷가 벌랑포구로 내려왔다 [13:54]


13:54   벌랑포구를 지났다. 한라산을 넘어 올 때는 비가 내렸었는데 지금은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하늘과 바다 색깔이 너무나 선명하다. 서핑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인다. 서핑하면 스페인이 생각난다. 산티아고 순례길 북쪽 길을 걸으면서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았다. 스페인은 해변 곳곳이 서핑의 최적지였다. 삼양해수욕장을 지나간다. 전국을 뒤덮고 있는 폭염은 제주도도 예외가 아니다. 어떻게든 더위를 식혀 보려고 사람들은 바닷물로 뛰어든다. 


▲ 벌랑포구 [13:54]


▲ 벌랑포구 [13:55]


▲ 삼양동과 원당봉(원당오름) [13:58]


▲ 서핑을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 [14:03]


▲ 삼양해수욕장 [14:11]


삼양해수욕장


예로부터 삼양해수욕장의 검은 모래에는 철분이 함유되어 있어 검은 모래로 찜질을 하면 신경성 질환, 비만증 치료, 관절염 등 성인병에 탁월한 효험이 있다고 민간에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삼양해수욕장은 7월 중순에서 9월 하순까지 모래찜질을 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또한 삼양해수욕장의 검은 모래는 입자가 고와 해수욕장으로도 인기가 좋으며, 모래찜질로 뜨겁게 달궈진 몸은 해변에서 솟는 차가운 용천수로 식힐 수 있다.

제주시 동부 지역 해수욕장 중에서는 삼양해수욕장의 규모가 가장 컸으나 1970년대 수원지 개발로 인해 제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2002년 삼양해수욕장 되살리기 운동을 전개함에 따라 해수욕장으로 재지정되어 삼양 검은모래 축제를 개최하게 되었다. 대학생과 동민들이 직접 검은 모래의 특성을 살린 검은모래 조각전시회를 제작하고 있으며, 커다란 통을 제작해서 장어잡이체험을 실시하여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윷놀이대회, 가족모래성만들기(모래뜸체험), 어린이합기도 및 태권도 시범, 서각전시, 어린이수영대회, 한여름밤의 재즈페스티벌, 불꽃놀이, 캠프파이어, 윈드서핑체험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02~2003년 행사까지는 동네잔치 형태로 치러지다가 2004년 제3회 행사부터 널리 홍보가 되어 삼양 검은모래 축제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삼양 검은모래 축제와 함께 삼양해수욕장 인근에 있는 불탑사 오층석탑과 제주 삼양동 유적을 둘러볼 수도 있다.

제주시 종합터미널에서 동회선 완행버스를 타거나, 제주시 내에서 삼양행 버스를 타고 삼양동사무소에서 하차하면 삼양해수욕장까지 15분 정도가 소요된다. 또는 승용차로 제주국제공항에서 12번 국도를 따라가면 된다.


▲ 삼양해수욕장 [14:13]


▲ 아름다운 거리 풍경 [14:16]


▲ 삼양동 연가 시비 [14:17]


▲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14:21]


▲ 야자수가 서 있는 풍경 [14:22]


14:29   원당봉으로 올라가는 길, 어허 절 표지석이 3개나 있네. 종파도 각각이다. 불탑사는 조계종, 원당사는 태고종, 문강사는 천태종이다. 5분 남짓 걸어 도착한 원당사, 말 그대로 깊은 산속의 절간처럼 조용하다. 원당사 바로 옆에 있는 불탑사도 마찬가지다. 불탑사에는 보물 제1187호로 지정되어 있는 오층석탑이 있다. 길을 잃었다. 불탑사에서 나와 왼쪽 신촌가는 옛길로 가야 하는데 그만 직진을 하고 말았다. 지도를 보니, 코스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방향이 같아 그냥 걷기로 했다. 차도에 도착한 후 해안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 불탑사, 원당사, 문강사 가는 길 입구 [14:29]


▲ 삼첩 칠봉 원당봉 안내문 [14:30]


▲ 태고종 원당사 대웅전 [14:35]


▲ 조계종 불탑사 대웅전 [14:36]


▲ 보물 제1187호 불탑사 오층석탑 [14:37]


▲ 불탑사 오층석탑 안내문 [14:38]


▲ 길을 잘못 들었다: 계속 진행 [14:47]


▲ 차도에 도착: 왼쪽으로 진행 [14:54]


▲ 도로 왼쪽 조천중학교 [15:04]


15:14   다시 올레 표지를 만났다. 잠시 못 보다가 다시 보니 그것도 반갑네. 올레길이 대섬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는 섬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육지와 연결이 된 곳이다. '야자수 올레길'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어 주변을 살펴 보니 이런, 야자수 천국이다. 아직 공사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무리지어 서 있는 야자수 나무들이 또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온대지방에 사는 우리로서는 야자수에 대한 묘한 동경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 다시 만난 올레길 표지 [15:14]


야자수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심어왔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종려죽이 1912~25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려죽과 함께 몇몇 종류의 야자나무가 도입되었고 이후 1956~64년쯤에 많은 종류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심고 있는 종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약 30~40종류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널리 알려진 종류는 키가 2~3m 정도로 자라며 화분에 심는 관음죽과 종려죽, 키가 5~10m 정도로 자라며 온실에 흔히 심고 있는 종려(또는 왜종려)와 당종려, 제주도에서 가로수로 심기도 하는 카나리야자, 감람수로도 불리는 도비로야자, 온실에 흔히 심고 있는 워싱턴야자, 키가 2m 이하로 작게 자라는 황야자와 빈랑나무, 공작이 꼬리를 편 것처럼 보이는 공작야자 등이 있다.


▲ 야자수 올레길 진입 [15:17]


▲ 야자수 올레길 풍경 [15:17]


▲ 야자수 올레길 풍경 [15:18]


▲ 야자수 올레길 풍경 [15:18]


▲ 야자수 올레길 풍경 [15:19]


▲ 야자수 올레길 풍경 [15:20]


▲ 야자수 올레길 풍경 [15:20]


15:21   대섬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길에 들어섰다. 작은 섬과 섬을 연결하는 길인 듯 한데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다. 제주도 대부분의 바닷가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바닷가에도 예전에 용천수를 이용했던 목욕탕과 빨래터가 아주 많았다. 신기한 것은, 바다와 인접한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땅밑에서 민물이 솟아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해안 지역 용천수는 해안 지역을 따라 마을이 생겨나게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용천수


제주특별자치도 지역에서 대수층(帶水層)을 따라 흐르는 지하수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지표로 솟아나는 물. 제주도에 상수도가 보급되기 이전에 용천수는 제주도민들의 생명수 역할을 했다. 용천수는 용출하는 지역에 따라 크게 해안 지역 용천수, 중산간 지역 용천수, 산간 지역 용천수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수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해발 200m 이하에 분포하는 해안 지역 용천수이며, 이것이 오늘날 제주도의 마을이 해안 지역을 따라 환상(環狀)의 형태로 만들어낸 원동력이 되었다.


중산간 지역이나 산간 지역의 경우는 해안 지역에서 멀어질수록 용천수의 분포 비율은 낮아지며, 그에 따라 마을이나 거기에 거주하는 인구도 상대적으로 적다. 제주도의 용천수는 기본적으로 지하수에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결국 제주도의 용천수는 과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민들의 생활의 근거가 되고 있는 셈이다.


▲ 대섬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에 진입 [15:21]


▲ 대섬에 서 있는 야자수들 [15:23]


▲ 바닷가 돌탑 [15:24]


▲ 용천수를 이용한 목욕탕 [15:28]


▲ 엉물: 해안의 큰 바위 밑에서 솟아난다는 뜻 [15:33]


▲ 무인 운영 중인 각인 사진 갤러리 [15:41]


▲ 눈큰새우 게스트 하우스 [15:42]


▲ 양진선원 대웅전 [15:43]


15:43   올레길은 조천리 바닷가에 위치한 연북정을  왼쪽으로 감아돌아 가다 잠시 풀밭길을 거친 후 도로를 따라 만세동산으로 향했다. 3.1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조천만세동산 성역화공원에 도착, 19.7km의 올레길 18코스 걷기를 마감하고 만세동산 앞에 있는 버스승강장에서 제주시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한 342번 버스로 제주시청까지 온 후 다시 5시에 출발하는 281번 버스를 타고 서귀포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이 6시 30분, 이렇게 해서 무더위 속에 이루어진 올레길 18코스 걷기는 무사히 끝이 났다.


▲ 멋진 올레 18코스 이정표 [15:43]


제주 연북정


조천읍 조천리 바닷가에서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북정은 객사(客舍)로, 원래 조천성(朝天城) 밖에 있었다고 하나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1590년(선조 23)에 이옥절제사(李沃節制使)가 성을 동 북쪽으로 물려 쌓고 그 위에 옮겨 세워 쌍벽정(雙壁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의 중창기에 의하면, “조천관은 바다 어귀에 있는데,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바람을 관측하는 곳이다. 조천(朝天)이라 이름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절제사 이옥이 부임한 다음해 경인년 (庚寅年)에 막부(幕府)의 제공(諸公)과 협의하고 아전과 주민에게, ‘조천에 관을 두게 된 것은 실로 도적들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이며, 왕명을 받은 사신들이 왕래하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같이 성이 좁고 건물이 노후해서야 되겠는가, 어찌 농사를 짓는 틈틈이 개축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휘하에 명을 내리니, 전 부장 서만일(徐萬鎰)이 그 일을 주관하고 애써서 마침내 여러 재주 있는 역군들을 동원하여 10월에 착공하고 12월에 마쳤다. 성은 동북쪽으로 물려서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안치하여 쌍벽(雙璧)이라 하였다.” 고 하였다.

쌍벽(雙璧)은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 후 선조 32년(1599)에는 성윤문(成允文)목사가 그 건물을 중수하고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인데, 보수 당시 ‘용(龍) ·가경이십오년경진이월십오일진시입주상량(嘉慶二十五年庚辰二月十五日辰時入柱上樑) · 호(虎)’라 한 명문(銘文)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연북정은 가경(嘉慶) 25년, 즉 순조 20년(1820) 마지막으로 보수된 듯하다. 이 정자가 세워져 있는 조천포구는 화북포와 함께 관원이나 도민들이 본토를 왕래하는 관문(關門)이었을 뿐만 아니라 순풍을 기다리며 머무는 휴식처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정자가 경찰관 주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 연북정 [15:45]


▲ 조천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어선들 [15:46]


▲ 조천리 앞 바다 풍경 [15:49]


▲ 풀밭길을 따라 잠시 진행 [15:53]


▲ 조천 만세동산 주차장에 있는 올레길 표지석 [16:04]


조천 만세동산


일제는 1910년 한국을 국권침탈하여 식민통치를 하고 무단정치를 실시하여 언론, 출판, 결사를 비롯한 모든 자유를 박탈하자 우리의 선조들은 이에 항거하여 항일투쟁을 해오다 1919년 3월 1일 유관순열사의 대한독립만세운동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항일만세운동이 펼쳐져 조국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기에 우리나라의 3월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은 제주지역까지 이어져 1919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소재 미밋동산(지금은 만세동산이라 부름)에서 거행되었다. 이러한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1993년부터 의거지인 이곳에서 기미 독립운동 만세대행진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는 가운데 지난 1991년 재일동포 김봉각씨의 5억원 기탁으로 3.1독립운동기념탑이 건립된 계기로 조천만세동산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었다.


▲ 조천 만세동산 3.1독립운동기념탑 [16:05]


▲ 애국선열추모비 [16:06]


▲ 만세동산 앞에 있는 버스승강장: 제주시청 가는 342번 [16:11]


▲ 제주시청 버스승강장: 서귀포버스터미널 가는 281번 [1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