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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산행/경기山行記

2018.06.13. [경기山行記 90] 경기 화성 고초봉

by 사천거사 2018. 6. 13.


고초봉 산행기

 

일시: 2018 6 13일 수요일 / 흐림 

장소: 고초봉 148.3m / 경기 화성 

 코스: 남양성모성지 주차장 → 남양성모성지 → 대광아파트 옆길  체육시설  고초봉 → 비석공원  성모성지 주차장

 거리: 4.18km

 시간: 1시간 44

 회원: 아내와 함께



08:10   오늘은 제7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일이다. 아내와 함께 아파트 사무소에 설치되어 있는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생부 묘소를 찾아갔다. 내일이 기일이기 때문에 오늘 묘소에 들러 간단히 제를 올리기 위해서다. 묘소에 도착해 보니, 아버지 4형제의 무덤 위와 주변에 망초대가 자라고 있어 손으로 모두 뽑아내고 제를 올렸다. 이북에서 월남하신 아버지 4형제는 이남에서 모두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는데, 여덟 분 중에서 다섯 분이 돌아가시고 지금은 세 분만 남아 있다.


남은 시간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있는 남양성모성지를 다녀오기로 했다. 증평나들목에서 중부고속도로에 진입, 청북나들목에서 평택제천고속도로를 벗어났다.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들은 별로 없었다. 화성시 남양읍에 진입, 도로 오른쪽에 있는 식당에서 나는 소머리국밥, 아내는 순두부찌개로 조금 이른 점심을 먹었다. 성모성지를 둘러본 후 고초봉 산행을 하려면 지금 점심을 먹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아버지 4형제 무덤 성묘 중 [09:05]


▲ 말끔해진 묘들 [09:18]


▲ 묘지에서 바라본 우리 동네 [09:24]


▲ 소머리국밥과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먹고 [11:31]


12:10   남양성모성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휴일이라 그런지 주차장은 거의 빈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성모성지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만난 것은 파티마의 성모 발현 기적에 관한 체험 내용 즉,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저격 사건과 소련의 붕괴 등을 적어 놓은 안내문이었다. 파티마, 내년 산티아고 까미노 포르투갈 길을 걸을 때 들를 예정이다. 널찍한 길을 따라 올라간다. 왼쪽으로 초를 봉헌하는 곳이 있고 예수님 상도 보이고, 약수터도 있다.


남양성모성지


남양 성모 순례지는 병인년(1866년) 대박해 때 많은 순교지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무명 순교지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치명일기(致命日記)와 증언록에 기록이 전해지는 남양의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사람뿐이다. 남양 순교지는 다른 순교지와는 달리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성역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작은 정성들을 모아 가꾸어져 오던 남양 순교지는 1991년 10월 7일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화성시에서 화성8경 중의 하나로 지정하여 홍보하고 있을 만큼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남양순교성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강암의 대형묵주알, 그리스도왕상, 성모동굴, 오솔길 소자상, 요셉성인상 등이 있으며, 아늑하고 성스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성지 조성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 성모님 품 같이 아늑하고 포근한 경관을 지닌 곳으로 시민은 물론 전국의 천주교 신도들의 순례지 겸 휴식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조 때 남양은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삼품의 도호부사가 부임했던 곳이다. 남양부사는 경기도 관찰사의 감독 아래 이반행정에 관한 권한 외에도 민사소송과 형사범을 다루는 사법권까지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양은 물론 그 인근에서 붙잡은 천주교인들을 도호부사가 있던 남양으로 끌어다가 처형했다. 그리고 남양은 지리적으로도 신앙 활동이 자유로웠던 중국과의 연락이 용이한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조 당시 이곳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찾아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남양과 이웃해서 백학 교우촌이 있던 것도 이곳이 순교지가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 김 필립보(1818~1868) 충청도 내포사람으로 조모의 가르침에 따라 입교하려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은 후 후일 반대하던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했다. 전교도 열심히 했고 사제의 공소 방문 때는 사제의 성무를 도왔으며 교우들이 바른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병인년 대박해 때 피신하여 살다가 1868년 남양 감영 포졸에게 아내 박 마리아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이 부부는 온갖 형벌에도 배교치 않았으며 한달 동안의 옥고 끝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나이 50세였다.


- 박 마리아(1818~1868) 순교자 김 필립보의 아내로 1868년 남편과 같이 남양 감영 포졸에게 잡혀서 남편과 함께 남양으로 끌려와 한달 동안의 옥고와 가혹한 형벌을 이겨내고 남편 김필립보와 같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나이 50세였다.

 
- 정 필립보(?~1867) 경기도 용인의 것옥골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옥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 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 김홍서 토마(1830~1868) 수원 갈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감옥에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의 나이는 38세였다.


▲ 남양성모성지 주차장 [12:11]


파티마


레이리아 남동쪽 29㎞ 지점의 코바다이리아 고원에 있다. 12세기에 무어 공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917년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큰 성모 마리아 성지가 되어 해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1917년 5월 13일과 그 이후 10월까지 매달 젊은 농부의 자녀들인 루시아 두스 산투스와 사촌 프란시스쿠, 자신타 마르투 등 세 어린이가 자신을 로사리오의 성모 마리아라고 밝힌 한 여인을 보았다고 했다. 10월 13일 파티마에 운집한 군중들(7만 명 정도로 추산)은 성모 마리아가 세 어린이에게 나타난 직후 일어난 '기적적인 태양의 현상'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이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던 레이리아의 주교도 1930년 10월 13일 세 어린이의 환영을 성모 마리아의 출현으로 공식 승인했다. 같은 해에 교황은 파티마 순례자들에게 면상을 주었다. 순례자들의 봉헌은 로사리오의 기도를 자주 외우고 은총이 가득한 성모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를 의심 없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국적인 규모의 파티마 성지순례는 1927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1928년에 바실리카가 건축되기 시작했고, 1953년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65m 높이의 탑 위에 거대한 청동 왕관과 수정 십자가가 있으며, 교회당의 양측면에는 병원과 피정의 집이 있고, 정면에는 작은 성모 마리아 출현 예배당이 있는 거대한 광장이 있다. 기적적인 치유사건이 많이 보고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1967년 5월 13일 첫 출현의 50주년 기념일에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군중들이 교황 파울루스 6세가 평화를 기원하며 집전한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운집했다.


▲ 파티마의 성모 발현 기적 안내문 [12:14]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파티마 체험 내용 [12:16]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파티마 체험 내용 [12:16]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파티마 체험 내용 [12:16]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파티마 체험 내용 [12:17]


▲ 널찍한 길을 따라 진행 [12:19]


▲ 초를 봉헌하는 곳 [12:20]


▲ 광장 중앙에 있는 예수님 상 [12:21]


▲ 물맛이 좋다는 약수터 [12:22]


12:24   이정표가 서 있는 곳을 지나 대성당 신축공사 현장 쪽으로 걸어갔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를 맞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2019년 3월 25일이 공사마감일로 나와 있었다. 공사장 왼쪽을 따라 계속 올라갔더니 이런, 길이 막혔다. 하는 수 없이 왼쪽 언덕으로 올라간 후 오른쪽으로 나와 널찍한 길을 따라 갔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른쪽 능선으로 가는 길은 아닌 것 같다. 또 하는 수 없이, 오른쪽 능선을 향해 없는 길을 만들어가며 진행을 했다. 나야 상관없지만 아내에게는 무척 미안한 일이었다.  


▲ 남양성모성지에 있는 이정표 [12:24]


남양 성모상


남양 성모상은 화강암으로 조각되었으며 높이가 3.5m이다. 성모님의 두 팔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기쁘게 맞이하시려는 듯 열려 있으며, 아기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성모님께 매달려 계시는 모습이다. 한복을 입은 모습은 아니시지만, 보다 한국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하여 전체적으로 한복이 지닌 아름다운 선을 강조하여 조각하였고, 한국적인 여인의 미, 그 중에서도 동양적인 여인의 부드러운 선을 따서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아름답게 조각하고자 했다. 베일을 쓰지 않으신 머리 모양은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 쪽머리 모양을 약간만 변형하여 조각했는데, 단아하고 정숙한 옛 어머니들의 머리 모양이 성모님의 이미지와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양 성모상은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성모님의 이미지를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한국적인 여인의 미와 동양적인 부드러운 선을 따서 조각하고자 하였다.


▲ 남양 성모상 앞에서 [12:28]


▲ 대성당 신축공사 안내문 [12:30]


▲ 신축공사 중인 대성당 조감도 앞에서 [12:31]


▲ 길이 막혀 있어 왼쪽 산으로 올라갔다 [12:35]


▲ 14처가 설치되어 있는 넓은 도로 [12:40]


▲ 오른쪽 능선을 향해 길을 개척 [12:43]


▲ 능선으로 올라가는 중 [12:45]


12:48   제대로 나 있는 길을 찾았다. 가만히 살펴 보니, 아까 대성당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울타리를 따라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왔어야 했다. 어쨌든, 조금 고생은 했지만, 길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작은 언덕을 하나 넘어가자 대광 파인밸리 아파트 담장을 따라 나 있는 길이 이어졌다. 어? 도요새 님의 표지기가 있네? 반갑네. 왼쪽으로 대광 파인밸리 아파트 건물이 보인다. 아파트 쪽에서 올라오는 널찍한 길도 보인다. 사실 고초봉은 해발이 148m 정도에 불과해 동네 뒷산으로 산책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 능선에 올라서자 제대로 된 길이 나타났다 [12:48]


▲ 리키다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 [12:49]


▲ 나무에 기대어 한 장 [12:50]


▲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 오르막 구간 [12:51]


▲ 그네도 한 번 뛰어보고 [12:53]


▲ 대광 파인밸리 아파트 담을 따라 진행 [12:56]


▲ 오랜만에 만난 도요새 님의 표지기 [12:57]


▲ 왼쪽 대광 파인밸리 아파트 [12:58]


12:58   이정표를 만났다. 고초봉 정상까지 거리가 800m라고 적혀 있다. 널찍한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쉼터가 나타났다. 마침 벤치도 있고 해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고초봉 유래에 관한 글이 있어 잠시 읽어보는데 세상에, 그 긴 글이 한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적당히 끊어서 여러 개의 문장으로 만들면 훨씬 이해하기 쉬울 텐데 왜 저렇게 써놓았는지 알 수가 없네. 쉼터에서부터 오르막길 시작, 통나무 계단길에 이어 밧줄이 설치된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졌다.


▲ 오늘 처음 만난 이정표 [12:58]


▲ 걷기 좋은 널찍한 길 [13:01]


▲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쉼터 [13:04]


▲ 고초봉 유래 안내문 [13:05]


▲ 통나무 계단길 다음에 [13:08]


▲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13:10]


▲ 나는 즐겁습니다 [13:12]


▲ 고초봉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13:17]


13:18   해발 148.3m의 고초봉 정상에 올랐다. 이정표가 서 있는 정상에 표지석은 없고 표지판이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정상을 떠나 남양동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은 내리막길을 10분 넘게 걸어 마을도로에 내려섰고 이어 마을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갔다. 남양천 위에 놓여 있는 새터교를 건너자 오른쪽으로 비석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공원을 따라 숲길이 나 있어 걷기에 아주 좋았다.


▲ 고초봉 정상에 서 있는 이정표 [13:18]


▲ 해발 148.3m의 고초봉 정상에서 [13:19]


▲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고초봉 정상부 [13:19]


▲ 운동기구 위에 앉아서 [13:21]


▲ 고초봉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 [13:29]


▲ 도로에 내려섰다 [13:33]


▲ 마을 도로따라 진행 [13:36]


▲ 비석공원에서 [13:46]


13:52   성모성지로 다시 돌아왔다. 주변에 마거리트과 금계국이 무리지어 피어 있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노래가사에도 있듯이 우리에게는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다. 그러니, 젊었을 때 젊은 모습을 한 장이라도 더 남겨놓아야 한다. 주차장에 도착해 보니 여전히 차가 많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라 별로 막히지 않은 도로를 달려 청주로 돌아왔으며 아울러 남양성모성지 방문과 고초봉 산행도 무사히 끝이 났다.  


▲ 강복하시는 예수님 상 앞에서 [13:52]


마거리트(Marguerite)


국화과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아프리카 카나리아 제도가 원산지다. 줄기와 잎이 쑥갓 같아서 나무쑥갓이라고도 불린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국화를 닮은 꽃이 핀다. 짙은 녹색의 잎과 흰 꽃의 조화가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며 원예 품종을 포함한 다양한 종이 있다. 높이는 1m 정도까지 자란다. 꽃은 지름 약 5~6cm로 줄기 끝에 달린다. 다른 국화과 꽃처럼 중앙의 관상화와 두상화를 긴 꽃잎의 설상화가 둘러싸고 있다. 관상화는 노란색이며 설상화는 흰색이다. 잎은 끝이 뾰족하다. 햇빛이 풍부하고 배수가 잘 되는 토양에서 잘 자란다. 특히 성장기에는 풍부한 햇빛이 필요하며 물을 충분히 줘야 한다. 단, 배수가 안되는 토양에서는 뿌리가 썩을 수 있다. 추위에 약해 서리가 내리는 지역이라면 겨울에 생존하기 힘들 수 있다.


▲ 마거리트(Marguerite) 앞에서 [13:53]


▲ 마가리트(Marguerite) 앞에서 [13:53]


▲ 금계국 앞에서 [13:55]


▲ 금계국 앞에서 [13:55]


▲ 금계국 앞에서 [13:55]


▲ 차를 세워둔 주차장에 귀환 [1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