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 길

2017.04.26. [산티아고 순례길 14] 산 후안 데 오르테가→부르고스

by 사천거사 2017. 4. 26.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14

 

일시: 20174 26일 수요일 비 눈 갬

장소: 산티아고 순례길 스페인

 코스: 산 후안 데 오르테가 → 아헤스  아타푸에르카 → 카르데뉴올라 리오피코 → 오르바네하 리오피코 부르고스

 거리: 29.3km  걸은 거리 288.8km  걸을 거리 575.8km

 시간: 6시간 10

 회원: 5






 06:00   어젯밤에도 한 번만 잠에서 깼다. 6시에 일어나 바깥 날씨를 살펴 보니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처제가 사준 비옷바지와 비옷를 입고 배낭 커버를 씌운 후 알베르게 문을 나섰다. 비가 내리는 어두운 까미노를 전등도 켜져 읺은 채 걸어간다. 다행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아니고 바람도 불지 않아 크게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면서 주변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44분 정도 걸어 아헤스 마을에 도착했다.  


▲ 알베르게 문을 나서는 것으로 오늘 여정 시작 [06:38]


▲ 어둠을 뚫고 까미노를 걸어간다 [06:47]


▲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다 [07:06]


▲ 날이 밝아지면서 그림 같은 주변 풍경이 보이고 [07:11]


▲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 [07:12]


▲ 멀리 아헤스 마을이 보인다 [07:17]


▲ 아헤스 마을 입구에 도착 [07:22]


▲ 나바라의 왕이었던 가르시아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을 지닌 아헤스 마을 [07:23]


07:42   아헤스 마을에 마침 문을 연 바(bar)가 있어 아침을 먹고 가기로 했다. 커피와 오렌지주스를 주문하고 가져간 빵, 샌드위치, 달걀, 사과 등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출발, 포장도로를 따라 미류나무 숲과 유채꽃밭을 지나 20분 남짓 걸어가자 왼쪽으로 거대한 바위가 몇 개 서 있는 게 보였다. 11세기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사망한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물로 '죽은 왕의 경계석'이라고 불린다.


잠시 후,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인류의 고향인 안타푸에르카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문화인류학에 있어서 혁명적인 장소다. 이곳에서 선사시대의 생태계 및 환경을 조사할 방대한 자료들이 출토된 덕분에, 유럽에 인류가 살았었다고 추정되는 연대를 기존보다 훨신 오래 전인 100만 년 전으로 입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에서 우회하면 선사시대 유적지로 갈 수 있으나 3km 정도 떨어져 있고 같은 길로 되돌아 나와야 하니 꼭 가보고 싶은 사람만 가보는 게 좋다고 한다.


▲ 아헤스 마을에 있는 바(bar)에서 아침 식사 [07:42]


▲ 커피, 오렌지주스, 빵으로 아침을 먹고  [07:49]


▲ 아침을 먹은 아헤스 마을의 바(bar) 모습 [08:01]


▲ BU-V-7012 도로를 따라 진행 [08:08]


▲ 도로 왼쪽 미류나무 숲 [08:16]


▲ 도로 옆 유채꽃밭 [08:20]


죽은 왕의 경계석


아헤스와 아타푸에르카 사이에 펼쳐진 평원에 2미터 높이의 거석이 세워져 있다. 이 평원은 중세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엘 데 나헤라의 군대와 그의 형제 페르난도 데 카스티야의 군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 전투로 가르시아 왕이 사망하고 나바라의 군대는 패배하게 되어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바라 왕국의 왕위 다툼이 끝나버렸다. 이 거석은 ‘죽은 왕의 경계석’이라고 불리며,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1054년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엘 데 나헤라 여기서 죽다.”


전설에 따르면 전투에서 살아남은 왕의 부하들이 죽은 왕의 내장을 아헤스 성당의 입구 반석 밑에 묻었다고 한다. 아직도 아헤스 주민들은 아타푸에르카 사람들을 ‘카스테야노스 (Castellanos; 카스티야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아타푸에르카에서는 아헤스 사람들을 ‘나바로스 (Navarros; 나바라 사람들)’라고 부른다. 매년 8월 23일에는 나바라와 카스티야 왕국의 전투와 가르시아 왕의 죽음을 기리며 중세식 저녁식사를 하는 전통이 남아 있다.


▲ 길 왼쪽에 있는 '죽은 왕의 경계석' [08:23]


아타푸에르카(Atapuerca)


아타푸에르카의 집들이 모여 있는 중심 지역에는 산 마르틴 성당이 있다. 아타푸에르카는 작은 마을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의미가 큰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고향이고, 중세에 결정적인 전투가 치러졌던 곳이다. 약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백만 년 전의 인류 ‘호모 안테세소르’의 유적지는 인류의 진화이론에 대한 혁명적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호모 안테세소르는 네안데르탈인 이전의 인류로 유럽의 인류 중 가장 오래된 이들이라고 한다. 아타푸에르카에 머문다면 어린 양고기로 만든 구운 고기요리를 즐겨 볼만하다. 매년 8월에는 페르난도 데 가스티야가 그의 형제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엘 데 나헤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주민들이 전투 장면을 재현하는 축제를 연다.


▲ 안타푸에르카 마을에 진입 [08:29]


▲ 안타푸에르카 마을 통과 [08:33]


08:41   안타푸에르카 마을을 나서자마자 왼쪽으로 보이는 산을 향한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오르막길이기는 하지만 경사가 별로 심하지 않아 크게 힘이 들지는 않는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는데 몇 사람이 모여 웅성거리는 게 보였다. 뭐지? 나이 든 키가 큰 남자 한 분이 바닥에 앉아 있는데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넘어지셨단다. 까미노는 멀고도 험한 길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생면부지이면서도 그 노인분을 치료해 주는 순례자들의 모습을 보며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큰 나무 십자가가 서 있는 작은 산 꼭대기에 올라섰다. 십자가는 돌무덤 위에 서 있는데, 이곳을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재앙을 떨치고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돌을 올려놓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비가 눈으로 변해 날리기 시작했다. 어허, 오늘이 4월하고도 26일인데 눈이 오다니. 하긴, 이곳 해발고도가 1000m가 넘으니 눈이 올 수도 있겠다. 넓은 평원을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 왼쪽으로 비얄발(Villalval) 마을이 보인다. 다시 밀밭 사이로 나 있는 길이 계속 이어졌다.


▲ 길 오른쪽 양 떼 목장 [08:41]


▲ 경사가 별로 심하지 않은 오르막길 [08:44]


▲ 노인 한 분이 넘어져 다치셨다 [08:53]


▲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길 [08:56]


▲ 작은 산 꼭대기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십자가 [08:59]


▲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했다 [09:03]


▲ 길 오른쪽으로 보이는 채석장 [09:14]


▲ 다시 밀밭 길에 들어섰다 [09:19]


▲ 비는 그쳤고 하늘에는 구름만 가득 [09:31]


▲ 길 왼쪽으로 보이는 알베르게 광고판: 태극기도 보인다 [09:37]


09:40   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 마을에 들어섰다. 피코 강(Rio Pico) 옆에 자리잡고 있어 마을 이름에 '리오피코'가 들어가 있는데, 다음에 거쳐가게 될 오르바네하 리오피코 마을 이름도 마찬가지다. 카르데뉴엘라와 오르바네하 마을은 별 다른 특징이 없는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 AP-1 고속도로 위에 놓인 육교를 건너 조금 올라가자 옛 군사시설 자리에 세워진 새 주택단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비는 완전히 그쳤고 하늘에는 하얀 구름만 가득하다.


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Cardenuela Riopico)

이 오래된 마을의 이름은,산 페드로 카르데냐 수도원에서 유래가 되었다. 11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 마을은 카르데냐 수도원의 영지였고, 그 이후엔 코바루비아스 수도원의 영지에 속해 있었다. 매년 12월 10일에는 마을의 수호성인인 산타 에우랄리아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 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 마을에 진입 [09:40]


산타 에우랄리아 데 메리다 성당(Iglesia de Santa Eulalia de Merida)


마을의 수호성인인 산타 에우랄리아를 위해 만들어진 이 성당에는 아름다운 피에타와 비가르니 봉헌화가 있는 르네상스 양식 현관이 돋보인다. 큰 종이 걸린 성당의 종탑은 넓은 하늘에 솟아 있어서 성당이 마을의 중심임을 알려준다.


▲ 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 마을에 있는 산타 에우랄리아 데 메리다 성당 [09:48]


▲ 오르바네하 리오피코 마을 가는 길 이정표 [09:54]


▲ 오르바네하 리오피코 마을에 진입 [10:08]


▲ 오르바네하 리오피코 마을에 있는 성당 [10:12]


▲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진행 [10:17]


▲ AP-1 고속도로 위 육교를 통과 [10:20]


▲ 오르바네하 리오피코 마을의 새 주택단지가 보인다 [10:21]


10:26   오르바네하 리오피코 마을의 새 주택단지 앞에서 도착했다. 여기서는 부르고스 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직진하면 비야프리아까지 아스팔트 길을 걸어야 하며 비야프리아에서 10km 정도 자동차 소음에 시달려야 한다. 다른 길은, 새 주택단지 왼쪽으로 나 있는 비포장 길로 역시 부르고스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농업지대를 거쳐 부르고스 공항 울타리를 따라 나 있기 때문에 비야프리아를 거치는 길보다는 안전하고 쾌적하다. 물론 우리는 두 번째 길을 택했다.


농경지 사이로 나 있는 길이 잠시 이어졌다. 하늘을 뒤덮은 하얀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언뜻언뜻 보이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부르고스 공항 철책 옆으로 나 있는 길에 들어섰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비야프리아(Villafria) 쪽으로 갔는지 우리 팀원들 모습만 보인다. 잠시 후 부르고스 공항 철책 길을 마감하고 N-120 도로가 지나가는 카스타냐레스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선택을 해야 한다. N-120 도로를 따라 갈 수도 있고 아르란손 강을 따라 나 있는 숲 속 산책로를 따라 갈 수도 있다. 우리 팀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 새 주택단지 왼쪽으로 나 있는 길에 진입 [10:28]


▲ 농경지 사이로 나 있는 길 [10:38]


▲ 부르고스 공항 철책을 따라 나 있는 길 [10:44]


▲ 부르고스 공항 철책을 따라 진행 [10:50]


▲ 카스타냐레스 마을 공장지대가 보인다 [10:54]


▲ 카스타냐레스 마을로 가는 길 [10:58]


▲ 카스타냐레스 마을 쉼터에서 후미 팀원들을 기다리며 [11:11]


▲ 카스타냐레스 마을을 벗어나고 있는 팀원들 [11:16]


11:17   카스타냐레스 마을을 벗어나면서 N-120 도로를 따라 나 있는 길을 버리고 왼쪽에 있는 공원을 거쳐 가는 길로 들어섰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르란손 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넌 후 A-1 고속도로 오른쪽을 따라 잠시 진행하다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했다. 여기서부터는 아르란손 강 왼쪽을 따라 나 있는 숲 속 산책길이 시작되었다. 숲 속 산책로는 여러 갈래가 나 있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산책로를 오가고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은 대도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정말 최고의 힐링 코스였다.


▲ 카스타냐레스 공립 운동장 표지판 [11:17]


▲ 아르란손 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간다 [11:19]


▲ A-1 고속도로 오른쪽을 따라 진행 [11:23]


▲ A-1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 [11:28]


▲ 아르란손 강 왼쪽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 [11:34]


▲ 아르란손 강 왼쪽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 [11:41]


▲ 커다란 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 [11:45]


▲ 길 오른쪽 아르란손 강 모래밭 [11:54]


▲ 아르란손 강 위에 비친 나무들의 반영 [11:57]


11:59   숲속 산책로를 마감하고 이어 부르고스 공원 산책로에 들어섰다. 부르고스 도심지와 가까워서 그런지 사람들이 더 많아졌고 길도 인공적으로 다듬어 놓은 흔적이 역력했다. 적당한 곳에서 아르란손 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부르고스 시내로 들어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가 건넌 다리를 지나쳐 두 번째 다리에서 건너가면 쉽게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금 일찍 다리를 건넜지만 부르고스에는 요소마다 이정표가 서 있어 알베르게를 찾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부르고스(Burgos)



중세부터 부르고스는 눈부신 산업 발전을 이룩했다. 또한 스페인의 역사와 예술, 문화유산을 보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적들로부터 방어가 용이한 전략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고, 과거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 까미노 데 산티아고가 지나가는 주요지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닷길과 까미노의 만남은 부르고스의 유물들을 널리 퍼지게 만들었고, 양모 산업의 독점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주교가 상주하는 도시이자, 박력 넘치고 아름다운 도시, 그것이 바로 부르고스 이다. 부르고스의 구 시가지에서는 흥미로운 유적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가장 잘 알려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은 꼭 들려 볼만한 곳이다.




산 후안 단지는 16세기에 만들어진 산 후안 문, 15세기 건축물인 산 후안 수도원, 부르고스의 수호성인이 산 레스메스의 무덤이 있는 산 레스메스 성당 그리고 15세기에 만들어진 산 후안 병원이 모여 있는 구역이다. 순례자 사이에서 많이 알려져 있는 산 후안 단지의 문은 오래 된 성벽을 따라서 줄지어 있다. 16세기에 카를로스 5세를 기려 만들어진 산타 마리아 아치, 돌과 벽돌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무데하르 양식의 영향이 두드러진 산 에스테반 문, 부르고스를 떠날 때 만나게 되는 두 개의 탑인 산 마르틴의 문이 있다. 도시의 유적들을 본 다음에는 편안한 술집에 앉아서 리베라 델 두에로에서 생산되는 포도주(Vinos Ribera del Duero)와 부르고스의 유명한 타파스(Tapas), 신선한 치즈와 장작에 구운 양고기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이런 음식들은 부르고스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경험임으로 꼭 시도해 볼 것을 권한다.


▲ 아르란손 강 왼쪽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 [11:59]


▲ 커다란 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 [12:06]


▲ 아르란손 강 왼쪽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 [12:10]


▲ 아르란손 강 왼쪽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 [12:24]


▲ 길 왼쪽으로 보이는 조형물: 산책하는 가족들(Paseando en Familia) [12:27]


▲ 아르란손 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간다 [12:35]


▲ 길 왼쪽에 있는 조형물 [12:40]


▲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 레스메스 대성당 [12:40]


▲ 공립 알베르게 가는 길 이정표 [12:45]


12:48   부르고스 대성당 옆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이용료 5유로를 지불하고 침실로 들어가보니 와, 이층 침대가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고 모든 시설이 깨끗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와이파이가 안 된다는 것. 하지만 가격 대비 거의 최고의 시설이었다. 배정받은 침대에 배낭을 내려놓고 먼저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알베르게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를 주문했다. 가격은 10유로, 믹스드 샐러드와 닭고기, 아이스크림, 물과 와인, 빵이 음식으로 나왔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샤워와 빨레를 하고 잠시 휴식.


부르고스 대성당 구경에 나섰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이라고도 하는 부르고스 대성당은 세비아, 톨레도에 이어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성당이다. 스페인의 고딕 양식 건축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 성당은 2차에 걸쳐서 완성되었는데, 첫 번째는 1221년 페르난도 3세의 명으로 프랑스의 건축가 앙리에 의해 신랑과 아름다운 현관이 만들어졌고, 두 번째는 15세기에 독일인 건축가인 후안 데 콜로니아에 의해 첨탑과 콘데스타블레 소성당이 만들어졌다.    


▲ 부르고스 대성당 옆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 [12:48]


▲ 이층 침대가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는 알베르게 침실 [13:20]


▲ 알베르게 옆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 [13:27]


▲ 점심 식사 메뉴: 전채 요리는 혼합 샐러드 [13:48]


▲ 점심 식사 메뉴: 메인 요리는 닭고기 [14:28]


▲ 점심 식사 후 동네 한 바퀴 [15:12]


산타 마리아 대성당 (Catedral de Santa Maria)


부르고스 대성당(Catedral de Burgos)이라고도 부르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은 1221년 알폰소 10세와 마우리시오 주교의 후원으로 짓기 시작한 건축물로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빼어난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세비야, 톨레도에 이어서 스페인에서 3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며 스페인 고딕 양식 건축물 중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대성당은 2차에 걸쳐서 완성되었는데 첫 번째는 1221년 페르난도 3세의 명으로 프랑스의 건축가 앙리에 의해 신랑과 아름다운 현관이 만들어졌다. 두 번째는 15세기에 독일인 건축가인 후안 데 콜로니아에 의해 건축된 첨탑과 콘데스타블레 소성당이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은 세 개의 신랑과 아름다운 콘데스타블레 소성당이 있으며 특히 성당 지붕의 돔은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밖에 13세기에 만들어진 탑과 15세기의 첨탑이 있으며, 여러 세대의 파사드와 현관 등이 손꼽힌다. 특히 환상적인 에스칼레라 도라다(Escalera Dorada; 금계단)는 코로네리아 문으로 이어지고 성당의 내부에는 무수한 조각상과 부조, 회화가 소장되어 있으며 신비로운 산토 크리스토 데 부르고스 조각상도 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커다란 신랑 앞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103개의 성직자 의자가 있고, 앞에 수랑과 교차하는 문이 있는데 그 아래에 엘 시드와 그의 아내 히메나의 묘표가 있다. 제단의 후면으로는 여러 개의 소성당들이 있으며 그 안에는 수많은 조각품들이 숨어 순례자를 맞이한다. 특히 콘데스타블레 소성당의 천정에는 환상적인 채광창과 스테인드 글라스가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또한 이 소성당의 오른쪽 성물실 안에는 레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으로 알려진 막달라 마리아의 상이 보관되어 있다. 도시를 관통하는 강을 건너 아름다운 산타 마리아 아치를 통과하면 산 페르난도 광장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 때 한눈에 가득 대성당이 들어온다. 광장 앞 나체로 벤치에 앉아있는 순례자의 조각상에서 기막힌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어 보거나, 대성당을 관람하기 전에 한눈에 대성당을 관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스페인의 3대 성당에 들어가는 부르고스 대성당 [17:07]


▲ 고딕 양식의 첨탑들이 돋보이는 부르고스 대성당 [17:11]


▲ 아름다운 부르고스 대성당 외관 [17:13]


▲ 아름다운 부르고스 대성당 외관 [17:20]


17:25   부르고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입장료는 7유로, 순례자는 크리덴샬을 보여주면 4.5유로에 입장할 수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외관도 멋있지만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대성당 안은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방은 다양하고 하려한 조각물과 그림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스페인의 3대 성당에 들어가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었다. 부르고스 대성당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날이 몹시 춥다. 알베르케로 돌아오니 난방이 가동되고 있었다.


시내 수퍼에 들렀던 처제가 볶음밥을 사가지고 왔다. 내일 아침에 먹으려고 했던 것인데 바깥 날씨도 그렇고 해서 오늘 저녁으로 먹기로 했다. 볶음밥은 전자렌지에 데워 먹으면 되는데 문제는 주방에 스푼이나 포크가 없다는 것. 알베르게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 들러 내일 아침을 여기서 먹을 테니 포크 5개만 빌려달라고 했더니 안 된단다. 그렇지, 누군줄 알고 빌려주겠어. 혹시 근처에 포크를 파는 곳이 없나 해서 돌아다니다가 빙고! 주방용품과 조화를 판매하는 가게를 찾았다. 포크 6개에 2.9유로, 가격도 싸다. 그리하여 해물볶음밥을 저녁으로 맛있게 먹고 조금 일찍 자리에 누웠다. 내일 아침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고 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

 

▲ 부르고스 대성당 내부 [17:25]


엘 시드(El Cid)


1043년 경, 카스티야 부르고스 근처 비바르에서 출생하여 1099년 7월 10일 발렌시아에서 사망했다. 명목상 알폰소 6세를 대신해서 발렌시아를 차지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으로 발렌시아를 다스리는 통치자였다. 산초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을 때 국왕기수로 임명되었고, 레온을 합병하기 위해 동생 알폰소 6세와 전쟁을 시작한 산초를 도와 공을 세웠다. 산초가 1072년 사모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하자 알폰소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후 이슬람 왕조가 다스리던 사라고사에서 일하게 되었고, 알 무타인과 후계자인 알 무스타인 2세를 10년 동안 충성스럽게 받들었으며, 패배를 모르는 장군으로 꾸준히 명성을 쌓아갔다. 1086년 사그라하스에서 참패를 당한 알폰소 6세는 엘 시드를 망명지로부터 불러들였는데, 이후 그는 무어 왕국인 발렌시아를 차지했다.


엘 시드가 그토록 많은 정력을 바친 위대한 사업은 덧없이 무너졌다. 그가 죽자마자 발렌시아는 알모라비데 군대에 포위되었고 발렌시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알폰소 6세가 직접 개입해야 했다. 그러나 왕은, 그리스도교도의 중심 지역을 방어하는 데 긴급히 필요한 대규모 병력을 발렌시아에 상주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판단은 옳았다. 그는 주민들을 옮긴 다음, 그 도시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1102년 5월 5일 알모라비데 군대는 발렌시아를 점령했고 이 도시는 그후 1238년까지 이슬람 교도의 손에 있었다. 엘 시드의 유해는 카스티야로 옮겨져 부르고스 근처에 있는 산페드로데카르데냐 수도원에 다시 묻혔는데, 그의 무덤은 수많은 참배객이 찾아드는 묘지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엘 시드는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준 탁월한 장군이었고 강철같은 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능란한 정치 지도자였다. 그러나 긴 안목에서 볼 때, 그의 역사적 역할은 심각한 비판을 면치 못한다. 그가 알폰소 6세와 화해하기를 꺼리고 이베리아 반도의 동부 지역에서 자신의 왕국을 만들기로 한 것은 알폰소 왕이 엘 시드의 도움 없이 알모라비데 제국과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일대기는 역사가들에게 특별한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들은 곧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격상시켰고 복잡하고 과장된 그의 전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전기에는 전설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에 대한 전설은 12세기 카스티야에서 지어진 서사시 <엘 시드의 노래: El cantar de mio Cid>와 1637년에 초연된 피에르 코르네유의 비극〈르 시드 Le Cid〉의 영향으로 더욱 과장되었다. 역사가들이 믿을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그 당시의 문헌과 <로드리고 일대기 Historia Roderici〉(12세기에 라틴어로 작성된 엘 시드에 관한 믿을 만한 연대기) 및 그의 발렌시아 정복을 직접 목격한 아랍 역사가 이븐 알카마의 상세한 기록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 엘 시드와 그의 아내 히메나의 묘표 [17:26]


▲ 부르고스 대성당의 조각물들 [17:27]


부르고스 대성당의 십자가 상


부르고스 대성당에 있는 십자가 상은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경배 받는 성상이다.중세의 한 부유한 상인이 플랑드로 여행을 떠나며 아구스티노스회 수도자들에게 자신이 여행을 잘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보답으로 돌아오는 길에 좋은 선물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상인은 배를 타고 귀국하면서 약속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판 위에 서 있던 상인의 눈에 바다 위를 떠다니는 큰 궤가 보였다. 상인이 궤를 건져냈더니 그 안에는 사람 크기의 십자가상이 들어있었다. 상인이 십자가가 담긴 궤를 싣고 부르고스로 돌아오자 도시의 모든 종이 저절로 울리기 시작했다. 죽은 이를 18명이나 살려냈다고 전해질 정도로 이 십자가 상은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는데, 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상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 그리스도 상은 사지와 머리를 구부리고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졌다.


▲ 부르고스 대성당의 십자가 상 [17:29]


▲ 부르고스 대성당 내부 [17:30]


▲ 부르고스 대성당: 천장이 무척 화려하다 [17:34]


▲ 부르고스 대성당 표지판 [17:42]


▲ 부르고스 대성당에 있는 조형물 [17:45]


▲ 알베르게 주방에서 저녁식사 [20:11]


▲ 수퍼에서 구입한 해물볶음밥, 사과, 우유, 맥주가 저녁 식사 메뉴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