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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산행/전북山行記

2016.03.12. [전북山行記 48] 전북 익산 용화산

by 사천거사 2016. 3. 12.

용화산 산행기

  

일시: 2016년 3월 12일 토요일 맑음

장소: 용화산 321.2m / 용리산 306.8m 전북 익산 

코스: 익산 미륵사지 서동공원 → 221봉(삼각점) 헬기장 용화산 → 용리산 → 이병기 생가

시간: 2시간 31분

회원: 백만사 회원 9명





09:00   오늘은 백만사에서 익산에 있는 용화산으로 산행을 떠나는 날이다. 용화산 근처에는 볼거리가 꽤 있다. 우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익산 미륵사지가 있고 산행 들머리가 있는 금마저수지 옆 서동공원, 산행 날머리에 있는 가람 이병기 시조시인의 묘소와 생가, 그리고 익산 보석박물관과 공룡테마공원 등이 자리잡고 있는 왕궁 보석테마 관광지가 있다. 용화산과 미륵사지 뒤에 솟아 있는 미륵산을 연계해서 산행을 할 수도 있는데, 4월 14일에 미륵산 산행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용화산만 다녀오기로 했다.


산남고 주차장에 9명의 회원이 모여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주차장을 출발했다. 3월 중순인데도 아침 날씨라 그런지 조금 쌀쌀하다. 하지만 하늘은 더할 나위없이 쾌청하다. 남청주나들목에서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여 호남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 여산휴게소에 들어갔다. 빵과 커피, 사과로 간식을 먹고 출발, 익산휴게소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난 후 722번 지방도를 따라 익산 미륵사지를 향해 달려갔다. 전국 곳곳을 많이 다니는 편인데 익산에 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 산남고 주차장에서 [08:59]


▲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 [10:07]


▲ 여산휴게소에서 빵과 사과, 커피로 간식을 먹고 [10:12]


10:51   익산 미륵사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이 꽤 넓은데 주차된 차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먼저 찾아간 곳은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었다. 미륵사지의 설립과정이 잘 설명되어 있고,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 석탑에서 나온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곳인데 2명의 문화해설사가 한창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유물전시관을 나와 오른쪽에 있는 미륵사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익산 미륵사지는 8개의 백제역사유적구 중 하나로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화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미륵사가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하며, 신라최대의 가람인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황룡사가 1탑 3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식 가람배치이다. 황룡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화엄사상, 미륵사는 미륵사상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는 일반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toric Areas)는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에 있는 백제 관련 역사유적지구이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대한민국의 12번째 세계유산이 되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총 8개의 유적을 포함한 연속유산으로 공주시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군 4곳(관북리 유적 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시에 2곳(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을 포함한다.


세계유산위원회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산하 자문기구로서 문화유산의 등재 여부를 위원회에 권고)는 동 유산이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 고대 왕국들 사이의 상호 교류 역사를 잘 보여준다는 점, 백제의 내세관·종교·건축기술·예술미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백제 역사와 문화의 특출한 증거라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였다. 북한과 합쳐서 삼국시대 유적은 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번 세계 유산 등재는 충청권에서는 최초로 선정 되었다.

 

▲ 익산 미륵사지 주차장에 도착 [10:51]


▲ 미륵사지는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10:54]


▲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10:55]


▲ 스님들이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11:05]


▲ 전시관을 나와 미륵사지를 뒤로 하고 [11:15]


▲ 복원중인 미륵사지 석탑을 보러 가는 중 [11:22]


▲ 미륵사지 석탑의 부재들 [11:23]


11:26   미륵사지 석탑을 복원하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석탑은 기단과 기둥만 남아 있고 나머지 부재들은 모두 해체되어 온전한 탑의 모양은 볼 수 없었다. 미륵사지에 탑이 3개 있었는데 중앙에 9층 목탑, 서쪽과 동쪽에 각각 9층 석탑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복원중인 것은 서쪽 석탑이다. 미륵사지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기 위해 바로 근처에 있는 맛집 '미륵산순두부' 식당으로 들어갔다. 음식맛이 괜찮다고 회원들이 입을 모은다. 점심을 먹은 후 용화산 산행 들머리가 있는 서동공원에 도착해 회원들을 내려놓고 산행 날머리에 있는 이병기 생가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미륵사지 석탑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4.24m. 사각형의 다층석탑()이었으나, 서남 부분은 무너지고 북동쪽 6층까지만 남아 있다. 초층 탑신은 사면이 3칸씩이며, 그 중앙칸은 내부와 통하도록 사방에 문이 있고, 탑 안의 중앙에는 네모난 커다란 찰주()가 놓여 있다. 각 면에는 엔타시스 수법을 쓴 모난 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평방()·창방()을 짰으며, 다시 두공양식()을 모방한 3단의 받침으로 옥개()를 받쳤다. 2층부터 탑신이 얕아지고 옥개석은 초층과 같은 수법으로 표현하였다.


이 석탑은 각 부분이 작은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그 가구() 수법도 목조건물을 모방하기 위해 석탑 이전에 목탑()을 먼저 세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보기이며, 한국 석탑양식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양식상으로 볼 때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건립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원래 7층석탑으로 추정한다면 20m 안팎의 거대한 탑이었을 것이다. 건립연대는 백제 말기의 무왕 때인 600∼640년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며, 2009년 1월 해체수리 중 발견된 기해()년명 탑지를 통한 건립연대는 639년(무왕 39)이다. 일제강점기 때, 붕괴가 우려된다고 콘크리트를 발라놓아 훼손이 심하다.


▲ 기단부와 기둥만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 [11:26]


▲ 스님들이 여기도 오셨네 [11:26]


▲ 미륵사지 뒤로 보이는 미륵산 [11:29]


▲ 아직도 발굴작업이 진행중인 미륵사지 [11:29]


▲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동탑) [11:36]


▲ 미륵사지 석탑 부재들이 쌓여 있는 곳 [11:36]


▲ 미륵사지에 있는 연못 [11:40]


▲ '미륵산순두부'식당 표지석 [11:51]


▲ 순두부백반으로 점심을 먹고 [12:06]


13:15   이병기 생가 주차장에 회장님 차를 대기시켜 놓고 회원들이 기다리는 서동공원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삼한시대 유물 11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마한관 오른쪽으로 용화산 산행로가 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그런지 길이 널찍하고 정비도 잘 되어 있다. 별 다른 이정표는 없지만 200m마다 서 있는 빨간색 거리표지판이 이정표를 대신하고 있었다. 오르막 경사도 별로 없어 회원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봄기운을 담뿍 담고 있는 산길이 싱그럽기만 하다.


▲ 서동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3:15]


▲ 주차장 위에 있는 마한관 건물이 보인다 [13:16]


▲ 서동공원 안내문 [13:18]


▲ 백만사의 트레이드 마크인 발대식 [13:23]


▲ 계단을 올라가는 것으로 본격적인 산행 시작 [13:23]


▲ 200m마다 서 있는 빨간색 거리표지판 [13:25]


▲ 길이 널찍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다 [13:28]


▲ 잠시 숨 한 번 고르고 [13:35]


▲ 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 [13:42]


13:44   20분 정도 산길을 걸은 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주변의 소나무가 아름답다. 길 오른쪽으로 삼각점이 보인다. 해발 221m 지점이라고 옆에 있는 안내판에 적혀 있다. 싱그러운 봄냄새가 코끝을 간지르는 산길이 계속 이어졌다. 바야흐로 봄이 도래한 모양이다.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 첫 번째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경사가 별로 심하지 않고 거리도 짧다. 한바탕 힘을 쓴 후 휴식, 산행을 하다 갖는 휴식은 늘 달콤하다. 어, 생강나무에 꽃이 피었네. 봄은 봄인가 보다.


▲ 소나무 숲길 그늘에서 잠시 휴식 [13:44]


▲ 길 오른쪽 풍경 [13:48]


▲ 산행 들머링서 1km 지난 지점 거리표지판 [13:49]


▲ 221봉에 있는 삼각점 [13:53]


▲ 싱그러운 봄냄새로 가득한 산길 [13:54]


▲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 첫 번째 오르막길 [14:01]


▲ 오르막길을 마감하고 잠시 휴식 [14:04]


▲ 어, 생강나무에 꽃이 피었네 [14:07]


14:09   산행 들머리에서 2km 지나온 지점에 서 있는 거리표지판을 지났다.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 고갯길을 오르자 편백나무 숲이 나타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피톤치드를 잔뜩 들이마셨다. 다시 이어지는 오르막길, 이번에는 헬기장이 나타났다. 용화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오르막길, 경사가 약간 있지만 거리가 짧아 크게 힘이 들지는 않는다. 벤취가 있고 표지판과 이정표가 서 있는 해발 342m의 용화산 정상에 올랐다.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 산행 들머리에서 2km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거리표지판 [14:09]


▲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 오르막길 [14:10]


▲ 편백나무 숲에서 잠시 휴식 [14:19]


▲ 다시 이어지는 오르막길 [14:22]


▲ 용화산 정상 아래에 있는 헬기장 [14:24]


▲ 용화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14:27]


▲ 용화산 정상에 있는 이정표 [14:30]


▲ 용화산 정상에서 여성회원들 [14:39]


▲ 용화산 정상에서 남성회원들 [14:39]


14:40   용화산 정상을 떠나 용리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은 여전히 걷기에 좋다. 왼쪽으로 경고판이 계속 나타났다. 군부대 사격장이 근처에 있으니 지정된 등산로만 이용하라는 내용이었다. 조망이 트이면서 미륵산의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륵산성의 모습도 제법 뚜렷하다.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여기서 미륵산에 오르려면 아리랑고개 쪽으로 가야 한다. 아무런 표시가 없는 오른쪽 길이 용리산으로 가는 길이다. 


▲ 용화산 정상 출발 [14:40]


▲ 서동공원 산행 들머리에서 3km 지나온 지점 표지판 [14:47]


▲ 지정된 등산로를 이용하라는 군부대 경고문 [14:49]


▲ 왼쪽으로 미륵산 정상과 미륵산성이 보인다 [14:51]


▲ 돌탑 옆을 지나고 있는 회원들 [14:57]


▲ 아리랑고개 갈림길 이정표 [14:59]


▲ 용리산 정상을 향하여 [15:05]


15:09   해발 306.8m의 용리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삼각점과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가 나무에 부착되어 있었다. 용리산 정상에서 이병기 생가로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걷기 좋은 산책로였다. 가람 이병기 묘소를 거쳐 이병기 생가에 내려섰다. 국어학자이자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태어나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이병기 시인의 '난초'라는 시조가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이병기 李秉岐 (1891.3.5.~1968.11.29.)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益山) 출생. 한성사범(漢城師範)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고문헌(古文獻) 수집과 시조연구에 몰두,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지에 《한강(漢江)을 지나며》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조시인으로 출발했다. 한편 한국고전(韓國古典)에 대한 주석 및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국문학자로서의 자리도 굳혔다. 1926년 최초로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고 《시조란 무엇인가》 《율격(律格)과 시조》 《시조와 그 연구》 등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고 1939년에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을 발간, 《문장(文章)》지 창간호부터 《한중록주해(恨中錄註解)》를 발표하는 등 고전연구에 정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피검, 함흥(咸興) 형무소에 수감되어 l년 가까이 복역하다 1943년 가을에 기소유예로 출감한 후 귀향하여 농사와 고문헌연구에 몰두했다. 광복 후 상경,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각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다. 1948년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 등을 역주(譯註) 간행했고, 1954년 학술원회원이 되었으며, 이 해 백철(白鐵)과 공저로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를 발간,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했다. 시조시인으로서 현대적인 시풍을 확립하였고, 국문학자로서는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주해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 용리산 정상을 알려주는 표지판 [15:09]


▲ 용리산 정상에서 쉬고 있는 회원들 [15:09]


▲ 묘지 옆을 지나고 있는 회장님 [15:30]


▲ 여산면 방향 풍경 [15:40]


▲ 가람 이병기 선생 묘 [15:50]


▲ 가람 이병기 선생 상 [15:54]


▲ 가람 이병기 생가: 실제로 거주했던 곳이다 [15:58]


▲ 이병기 생가 마루에 앉아 [15:59]


▲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안내문 [16:03]


16:30   이병기 생가 주차장을 출발했다. 올 때와는 달리 돌아갈 때는 1번 국도를 타고 논산시 연무읍까지 온 후 논산나들목에서 호남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청주에 무사히 도착하여 사천동에 있는 '더 맛있는 갈비'식당에 뒤풀이 장소를 마련했다. 모처럼 14명의 회원이 모두 모여 제주에서 매일 공수해 온다는 흑돼지 오겹살을 구워놓고 소주를 마시며 그 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깊어만 가는 우리 백만사 회원들의 끈끈한 정이 오고가는 그런 시간이었다. 


▲ 흑돼지 오겹삽로 회식: 여성회원들 [18:42]


▲ 흑돼지 오겹삽로 회식: 남성회원들 [18:42]


▲ 회식을 마치고 '백만사를 위하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