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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국내 旅行

2015.10.20. [국내旅行 90] 전남 강진 여행

by 사천거사 2015. 10. 20.

강진 여행기

 

 ◈ 일시: 2015년 10월 20일 화요일 갬, 하루 종일 미세먼지

 ◈ 장소: 가우도 / 백련사 / 다산초당 / 하멜기념관

 ◈ 코스: 해남 숙소 → 가우도 → 백련사 다산초당 하멜기념관  청주

 ◈ 회원: 아내와 함께

 

 

 

08:00   느긋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저녁에 사다 둔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고 모텔 룸을 떠났다. 아내가 해산물을 산다고 해서 해남 매일시장에 들른 후 강진관광에 나섰다. 강진 여행에서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가우도, 예전에는 강진만에 있는 그냥 섬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두 개의 출렁다리로 육지와 연결이 되어 있고 섬둘레를 걸을 수 있는 트레킹 코스가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가우도 출렁다리 앞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리를 건너간다. 다리 길이는 438m로 꽤 긴 편이다.

 

가우도

 

섬의 규모는 작다. 면적이 32만㎡, 10만 평도 안 된다. 임야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해안선은 2500m, 사람은 14가구 31명이 살고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신기리에 속한다. 도암만이 품은 유일한 유인도다. 가우도(駕牛島)는 보은산을 소의 머리로 여기고, 섬의 모양이 소의 멍에처럼 생겼다고 이름 붙었다. 저두마을에서 출렁다리를 건너 가우도로 들어가면 두 갈래의 길이 나 있다. 왼편으로는 해안을 따라 나무데크로 이어진다. 오른편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어느 쪽으로 가든지 가우마을에서 만난다. 길의 둘레가 2400m에 이른다. 섬을 한 바퀴 도는 '함께海길'이다.

 

▲ 하룻밤을 묵은 해남의 뉴전원모텔 [08:48]

 

▲ 가우도 출렁다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09:49]

 

▲ 주차장 왼쪽 갯벌: 가우도 바지락으로 유명하다 [09:51]

 

▲ 가우도 출렁다리는 사람만 통행이 가능하다 [09:52]

 

▲ 길이 438m의 가우도 출렁다리 [09:52]

 

▲ 가우도 출렁다리에서 [09:54]

 

▲ 가우도 출렁다리에서 [09:56]

 

▲ 가우도 출렁다리에서 [09:58]

 

▲ 출렁다리에서 바라본 왼쪽 풍경 [09:58]

 

09:59   가우도 출렁다리를 건너자 길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어느 쪽으로 걸어가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는데 우리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기롤 하고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질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작은 언덕을 하나 넘어가자 한옥펜션이 들어서 있는 가우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리가 없는 섬이었을 때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작은 섬 가우도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펜션이 생기고 가우도 정상에는 청자 모양의 전망 타워가 들어설 모양이다. 

 

▲ 가우도 출렁다리 끝에서 길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09:59]

 

▲ 가우도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 이름은 '함깨해길' [10:00]

 

▲ 어느 쪽으로 가드라도 원점회귀가 가능하다 [10:00]

 

▲ 다리 건러 오른쪽으로 진행 [10:03]

 

▲ 언덕에서 가우마을로 내려가는 길 [10:09]

 

▲ 가우도 한옥펜션 앞에서 [10:10]

 

▲ 가우도 가우마을 풍경 [10:12]

 

▲ 멀리 망호출렁다리가 보인다 [10:13]

 

10:15   커다란 가우마을 표지석 옆을 지나 망호출렁다리 쪽으로 간다. 망호출렁다리를 건너면 고바우 전망대에 들를 수 있는데 다음을 기약하고 통과, 망호출렁다리가 시작되는 곳에는 가우도 복합낚시공원이 있어 이용요금을 지불하고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다. 해안을 따라 설치한 데크 길이 시작되었다. 데크 길을 따라 한창 걸어가는데 어, 저게 누구야? 가까이 가보니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작가인 영랑 김윤식의 동상이다. 강진이 낳은 시인 김영랑을 기리기 위해 데크 길 중간에 영랑나루쉼터를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 도암면 가우마을 표지석 [10:15]

 

▲ 가우도와 망호선착장을 이어주는 망호출렁다리 [10:16]

 

▲ 가우도 복합낚시공원 [10:18]

 

▲ 데크 길에서 [10:19]

 

▲ 데크 길에 있는 벤취에서 [10:22]

 

▲ 길 오른쪽 해안에 있는 바위 [10:22]

 

▲ 해안을 따라 나 있는 데크 길 [10:24]

 

▲ 데크 길에서 [10:25]

 

▲ 영랑나루쉼터에 있는 영랑 김윤식 동상 [10:27]

 

10:28   데크 길을 따라 가우도 다리를 향해 걸어가는 길, 강진만 바닷물에 비친 산그림자가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그렇다, 자연이 그려 놓은 수묵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자연은 위대한 예술가다. 인간은 그저 자연이 하는 일들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동떨어진 것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가우도 탐방을 마치고 백련사를 향해 달려간다.  

 

▲ 데크 길을 따라 가우도 출렁다리가 있는 쪽으로 [10:28]

 

▲ 강진만에 투영된 산그림자 [10:29]

 

▲ 강진만에 투영된 산그림자 [10:30]

 

▲ 강진만에 투영된 산그림자 [10:30]

 

▲ 가우도와 저두마을을 이어주는 가우도 출렁다리  [10:33]

 

▲ 차를 세워둔 곳에 다시 도착 [10:41]

 

11:09   백련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은 이전에 여러 번 들렀던 곳이지만 아내는 처음 구경을 하는 곳이다.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남도 답사 일번지로 강진의 백련사와 다산초당이 소개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는데, 특히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이어주는 숲길이 아름답다. 만덕산 깃대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백련사는 동백나무 숲에 싸여 있다.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로 이루어진 동백숲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년고찰인 백련사를 둘러보고 다산초당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백련사

 

만덕산(408m)에 있으므로 만덕사()라고도 한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 무염() 스님이 창건하였다. 사찰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렀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를 숭상하였기에 원묘국사 요세() 스님에 의해 사찰의 교세는 확장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었고 백련사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남해안 일대는 고려청자와 곡창지대로 약탈을 목적으로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 점점 폐사될 지경으로 내몰렸고 사찰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170년경 주지 원묘()에 의해 중수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중수는 조선 세종 때인 1426년 주지 행호() 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백련사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430년부터 대대적인 불사작업이 시작되었고 효령대군의 도움이 컷다. 효령대군은 왕위를 동생(세종)에게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강진땅 백련사에 들어 8년 동안 기거하였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를 세웠다.

대웅전(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건물로, 각 추녀마다에 4개의 활주()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2개의 주두()에는 용두()로 장식되어 있는데, 단청()이 잘되어 있는 다포()집 건물이다. 이 밖에 시왕전(殿)·나한전(殿)·만경루()·칠성각() 등의 건물이 있다. 절 앞에는 비자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푸조나무와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151) 등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

 

천연기념물 제151호. 면적 12,893㎡. 동백나무는 우리나라 남쪽 난온대지방 식생(植生)의 대표수종인데 이곳에 있는 동백나무는 약 1,500그루가 무리지어 자라고 있으며 높이가 7m에 달하고, 밑에서 가지가 갈라져 관목상으로 된 것도 많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이며 꽃은 2∼3월에 적색으로 핀다. 삭과(蒴果: 속이 여러 간으로 나뉘고 각 간에 많은 씨가 든 열매)는 둥글고 지름 3∼4㎝로서 청홍색이며 씨는 암갈색으로 머릿기름을 낸다.

 

특별한 전설이나 설화는 전해지지 않으나, 인근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당해 살았던 다산초당이 있는데, 그가 백련사를 왕래할 때 그도 이 동백나무 숲을 즐겨 감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련사 앞에 동백나무 숲이 군락을 이뤄 자생하고 있다. 원래는 비자나무가 더 많이 자생했을 터인데, 수원성 축조 때 이 나무가 베어나갔다. 이 외에 호박나무, 왕대나무가 군데군데 함께 자라고 있으며, 굵은 굴참나무와 푸조나무가 곁들여져 자라고 있다. 또 밑에는 차나무가 있다. 산림내의 초본식물 중에는 향들골이 특히 눈에 띈다.

 

▲ 백련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1:09]

 

▲ 만덕산 백련사 일주문 [11:09]

 

▲ 다산초당~백련사 숲길 안내문 [11:10]

 

▲ 백련사 해탈문 [11:13]

 

▲ 백련사 경내로 길 양쪽은 동백나무 숲이다 [11:15]

 

▲ 백련사 대웅보전 [11:19]

 

▲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 이정표 [11:24]

 

▲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왼쪽으로 갈라지고 있다 [11:25]

 

11:26   길 왼쪽에 차밭이 있다. 아내가 차 잎을 따서 씹어보더니 얼굴을 찡그린다. 다 자란 차 잎이 무슨 맛이 있겠어. 길 오른쪽으로 동백숲이 있는데 칡과 같은 덩굴식물로 뒤덮인 나무들이 많다. 천연기념물인데 관리가 소홀한 게 아닌가. 작은 언덕을 넘어 다산초당으로 내려갔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수리중이었는데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다. 다산초당 앞에서 아내는 다산기념관 쪽으로 내려가고 나는 다시 고개를 넘어 백련사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몰고 다산기념관으로 갔다. 기념관 주차장에서 아내와 만나 강진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인 하멜기념관으로 달려간다. 

 

▲ 길 왼쪽에 있는 차밭에서 [11:26]

 

▲ 언덕을 올라가는 통나무 계단길 [11:28]

 

▲ 만덕산 깃대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 [11:31]

 

▲ 다산초당으로 내려오는 길 [11:41]

 

천일각

 

다산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 몰려 유배를 떠난 형 정약전은 16년의 흑산도 유배생활에 그곳에서 병들어 생을 마감하였다. 다시 만나지 못한 형제의 모습을 다산은 천일각에 앉아 남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워하였을 것이다. 정약전 또한 유배생활 중 남도의 어류를 분석한 《자산어보》를 저술하여 실사구시의 학문을 삶으로 실현하였다. 어둠 속 한줄기 섬광처럼 빛나는 옛 선현들의 모습이다.

 

▲ 다산이 형 정약전을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는 천일각 [11:42]

 

▲ 다산이 기거했다는 다산동암 [11:43]

 

▲ 연못 가운데에 있는 연지석가산 [11:44]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학문적 완성지로만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본디 초가집이었을 건물은 다산의 사상을 흠모하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다부진 기와집으로 다시 지어졌지만 60년을 지낸 건물의 모습은 여유로운 세월의 흐름을 담고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다. 당시 이단의 사상으로 배척되었던 천주교에 물든 죄인으로 몰려 무려 18년의 유배생활을 하였던 다산은 그중 10년의 기간을 이곳에 머무르며 조선 후기, 문화의 오지였을 국토의 끝자락에 학문의 꽃을 피웠다. 그의 학문을 흠모하여 모여든 제자들과 당대의 사상가, 고승들과 쉼 없는 토론과 학문적 교류를 나누며 백성의 삶을 위한 정치와 제도를 뒷받침하는 사상을 완성하였다.

 

▲ 다산초당 앞에서 [11:45]

 

▲ 백련사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해월루 [12:01]

 

▲ 주차장으로 내려오며 바라본 만덕산 능선 [12:06]

 

12:55   하멜기념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학창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운 하멜표류기를 쓴 네덜란드 사람 하멜을 기념하는 장소인 모양이다. 기념관 앞에 있는 광장에는 네덜란드의 상징인 풍차, 하멜의 동상 등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기념관 안에는 네덜란드라는 나라 소개, 하멜이 우리나라의 온 경위, 우리나라에서의 생활상,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게 된 경위 등이 소개되어 있고 별 다른 유물이나 그런 것은 없었다. 하멜기념관 바로 옆에 있는 전라병영성은 2020년까지 복구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조금 하멜기념관 방문 결과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멜표류기

 

<난선제주도난파기>라고도 한다. 한국을 서방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유명하며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하멜은 포수 출신 선원으로 이 배의 서기였다. 원래는 인도총독과 평의원에게 올리는 보고서로,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하멜 일행은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가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36명이 제주도에 난파했는데 이후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선은 이들의 표류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하여 살도록 했으며,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했다. 1666년 생존자 16명 중 8명이 배를 구입해 일본으로 탈출했고, 나머지 잔류자들도 네덜란드의 요청으로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처음과 끝부분이 자세하다. 중간에 조선의 군사, 형제, 관료제, 가옥, 교육, 산물, 상업 등에 관한 간단한 기술이 있으며, 맨 마지막에 조선으로 가는 항로가 기술되어 있다.

 

하멜기념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 헨드릭 하멜을 기리는 전시관. 네덜란드인 하멜은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태풍으로 제주도에 표착하게 되었고, 약 7년간 강진 전라병영성에 머물다 1666년 일본으로 탈출했다. 하멜기념관에는 하멜보로서를 비롯해 하멜의 생애,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문화사회적 상황, 그리고 강진군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자매결연 등의 자료가 각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다.   

 

▲ 하멜기념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2:55]

 

▲ 하멜이 네덜란드 사람이라 풍차를 만들어 놓았다 [12:56]

 

▲ '하멜표류기'를 쓴 하멜 동상 [12:58]

 

▲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건물 [12:59]

 

▲ 하멜기념관 안에 있는 신발을 신어보고 [13:06]

 

강진 전라병영성

 

조선조 600년간 호남과 제주도 53주 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부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성이다. 초대 병사인 마천목장군이 꿈속에 계시를 받아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대동지지"나 "색지" 등에 따르면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옹성 12개소, 연못 5개소, 우물 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 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599년(선조 32)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8년여 동안을 억류생활 했던 곳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때 폐영되었다. 전라병영성지는 당초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다가 1997년 국가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성곽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한차원 높이기 위해 성곽 등을 복원하였으며, 관련유적으로 하멜체류지, 한골목, 병영홍교, 비자나무, 은행나무 등이 있다.

 

▲ 강진 전라병영성 복원된 부분 [13:12]

 

▲ 강진 전라병영성 복원된 부분 [13:13]

 

▲ 2020년까지 복원할 예정이라는 강진 전라병영성 [13:13]

 

13:21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병영면소재지에 있는 '용바우골'이라는 한정식 음식점에 들어갔다. 원래는 예전에 한번 들른 적이 있는 설성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부수리중이라 영업을 하지 않아 바로 옆에 있는 용바우골 식당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단체손님 때문에 한참을 기다려야 한단다. 연탄불고기 정식을 시켰는데 47분만에 받은 밥상에는 30가지 이상의 반찬이 올라앉아 있었다. 전라도가 음식 인심 좋기로 이름이 나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2인분 25,000원 짜리 음식치고는 정말 호화로웠다.   

 

상에 차려진 모든 음식들의 맛을 보면서 푸짐하게 점심을 먹은 후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여행을 떠날 때에는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과 벌어질 상황 때문에 마음이 들뜨는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마음이 설렌다. 왜? 한 여행의 종결은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며 전국에는, 또 전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여행지가 있으니까. 이틀 전에 달렸던 길을 되짚어 달려 청주에 도착한 시각이 6시 40분, 이렇게 해서 결혼 38주년 기념 2박 3일 여행은 무사히 막을 내렸다.

 

▲ 내부수리중인 설성식당 [13:21]

 

▲ 늦은 점심을 먹은 용바우골 식당 [13:21]

 

▲ 용바우골 한정식 음식점 내부 [13:24]

 

▲ 병영면 용바우골 식당 한정식 상차림 [14:08]

 

▲ 호남고속도로 정읍휴게소 [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