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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국내 섬旅行

2015.10.19. [국내 섬旅行 38] 전남 완도 보길도 2

by 사천거사 2015. 10. 19.

보길도 여행 2

 

 ◈ 일시: 2015년 10월 19일 월요일 맑음

 ◈ 장소: 윤선도 원림 / 동천석실 / 송시열 글씐바위

 ◈ 코스: 청별항 → 보길도 윤선도 원림 → 곡수당 낙서재 동천석실 → 송시열 글씐바위 산양항 해남 뉴전원모텔

 ◈ 회원: 아내와 함께

 

 

 

13:48   오전에 격자봉 산행을 마치고 오후에 보길도 관광에 나섰는데 첫 번째 목적지가 보길도 윤선도 원림이다. 윤선도 원림은 보길도에 남아 있는 윤선도의 유적이 모여 있는 곳을 통틀어서 부르는 말인데 그 중에서 세연정, 곡수당, 낙서재, 동천석실이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2,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정보센터를 거쳐 세연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세연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라고 한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 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윤선도와 보길도

 

고산 윤선도, 그의 나이 51세 때인 조선 인조 15년(1637)에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섬에 터를 잡았는데, 그 곳이 바로 보길도이다.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그 후 두 차례의 귀양을 가고 벼슬을 하여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곳에서 지내기도 했디.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섬 여기저기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등 건물을 짓고, 바위 등 자연의 경승에 대(臺)의 명칭을 붙였는데, 이 정자와 대가 모두 25여 개소에 이른다. 유명한 어부사시사는 이곳 부용동에서 지은 것이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

 

사적 제368호 보길도윤선도유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보길도윤선도원림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명승 제34호로 재지정되었다. 지정구역 8만 1,745㎡. 보호구역 39만 8,983㎡.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32㎞, 해남반도의 남단에서는 12㎞ 떨어진 외딴섬이다. 이 섬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격자봉(格紫峰)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계류가 흐르고 있는데,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이 일대에 정사(亭舍)와 연못을 축조하여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였다.

 

1637년(인조 15) 2월윤선도가 51세 때 처음으로 보길도를 찾아 입구에 세연정(洗然亭)과 연못을 축조하였는데, 물과 바위와 대(臺)와 소나무·대나무 등을 이용한 조원(造園)공간으로 지금까지 부용동원림 중에서도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세연정에서 부용리 쪽으로 약 1.5㎞쯤 들어가면 낙서재(樂書齋) 건너편 산비탈에 동천석실(洞天石室)이 있다. 이곳은 1,000여평의 공간으로 석문(石門)·석담(石潭)·석천(石泉)·석폭(石瀑)·석대(石臺)·희황교(羲皇橋)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석문 안의 두어칸 되는 반석(盤石)에는 다도(茶道)를 즐기던 흔적이 있고 그 주위로는 건물터가 있다.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하였다.

 

동천석실에서 남쪽으로 약간 내려오면 부용리에 인접한 평지가 나타나는데, 이 일대에 낙서재와 무민당(無悶堂)·곡수당(曲水堂)을 짓고 세상의 명리를 떠나 꾸밈없는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 밖에도 윤선도는 주변의 자연경관에 따라 각각 그 이름을 붙였는데, 낭음계(朗吟溪)·승룡대(升龍臺)·하한대(夏寒臺)·혁희대(赫羲臺)·독등대(獨登臺)·상춘대(賞春臺)·언선대(偃仙臺)·오운대(五雲臺)·조산(造山)·미산(薇山)·석전(石田) 등이 그것이다. 윤선도는 1637년부터 85세로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나 보길도에 왔다갔다 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

 

▲ 윤선도 원림 담장에서 [13:49]

 

▲ 보길도 윤선도 원림 안내판 [13:51]

 

▲ 윤선도 원림 정보센터를 향하여 [13:51]

 

▲ 정보센터 안에서 [13:54]

 

▲ 세연정을 둘러싸고 있는 세연지 [13:58]

 

▲ 세연지 계담에 있는 7암 중 하나인 '흑약암' [13:59]

 

▲ 세연정 주변에 있는 7암 중 하나인 '사투암' [14:00]

 

▲ 세연지를 바라보고 있는 아내 [14:00]

 

14:02   세연정을 둘러싸고 있는 세연지 둘레를 따라 걸어간다. 커다란 바위가 여기 저기 놓여 있고 수련잎이 떠 있는 연못 세연지는 윤선도가 유희를 즐기던 곳이었는데 그 만큼 많은 공을 들여 조성을 했다고 한다. 판석보를 건너 연못 뒤로 세연정이 잘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과연 소문대로 아름다운 정원이다. 길 오른쪽으로 산길이 나 있어 올라가 보았더니 석문 모양의 바위가 있다. 세연정 주변을 둘러보고 두 번째 관람장소인 곡수당과 낙서재를 향해 차를 몰았다. 

 

세연정

 

우리말의 아름다움은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지은 「어부사시사」를 통하여 찬란하게 빛난다. 그리고 아름다운 노래 가사를 탄생시킨 보길도와 그 중심으로 자리하는 세연정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안빈낙도의 이상세계를 구현하려 하였던 윤선도 사상의 정점을 구현하는 곳이다. 세연정은 「어부사시사」만큼이나 아름답다.

그가 보길도에서 지은 20여 곳의 건축물 중 세연정은 유희의 공간이었다. 닭 울음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깬 윤선도는 독서를 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오후가 되면 가마에 술과 음식을 담아 무희와 함께 세연정으로 향했다. 악공들의 연주소리에 인공의 연못 사이로 작은 배를 띄워 무희들의 노래를 들으며 술과 음식을 즐겼다고 한다.

신선들의 놀이터 같았을 세연정의 풍경은 현재 남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상상할 수 있다. 낚시를 즐기던 칠암바위, 인공폭포와 구름다리의 구실을 겸한 판석보, 악공들의 연주를 위하여 석축으로 쌓은 단상인 동대, 서대 등이 자리 잡았고 산 중턱의 옥소암으로 악공과 무희를 보내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모습이 연못에 비추는 모습도 즐겼다고 한다.

 

▲ 세연정을 둘러싸고 있는 세연지 [14:02]

 

▲ 세연정을 둘러싸고 있는 세연지 [14:03]

 

▲ 서대: 춤울 추며 돌아가게 만들어 놓은 나선형 계단이 특이하다 [14:03]

 

▲ 판석보: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조성 [14:05]

 

▲ 세연정을 배경으로 [14:09]

 

▲ 세연지 뒤로 보이는 세연정 [14:09]

 

▲ 왼쪽 산길을 따라 올라가서 만난 바위 [14:12]

 

▲ 세연정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14:18]

 

▲ 세연정을 배경으로 [14:23]

 

14:38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곡수당과 낙서재를 둘러보러 올라간다. 곡수당은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지은 집이다. 윤선도 아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한 초당, 석정(亭), 석가산(). 연못, 화계(), 다리 등의 다채로운 조원()이 펼쳐져 있다. 곡수당을 비롯한 건물들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라 그런지 고풍스러운 느낌은 거의 나지 않는다. 곡수당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낙사재를 보러 가는 길 옆에 억새가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 곡수당과 낙서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4:38]

 

▲ 철 모르는 장미꽃이 피었다 [14:39]

 

▲ 낙서재와 곡수당 이정표 [14:39]

 

▲ 곡수당을 향하여 가는 길 [14:41]

 

▲ 윤선도의 아들이 지냈다는 곡수당 [14:42]

 

▲ 사당: 윤선도가 죽은 후 얼마 동안 초장을 지낸 곳 [14:43]

 

▲ 상연지에서 바라본 동천석실 [14:44]

 

▲ 억새 뒤로 보이는 곡수당 [14:45]

 

▲ 낙서재 가는 길 억새밭에서 [14:45]

 

14:49   낙서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낙서재는 윤선도가 기거하면서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하던 곳으로, 동천석실과 마주보이는 곳에 있다. 낙서재 주변에는 부속 건물들이 적당한 자리에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새로 지은 것이라 세월의 흐름을 엿볼 수는 없었다. 이제 윤선도의 유적 중 마지막 볼거리인 동천석실을 찾아 갈 순서다. 동천석실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조금 힘이 들기는 하지만 전망이 좋아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 동와: 낙서재와 무민당 사이에 지은 한 칸짜리 건물 [14:49]

 

▲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기거했다는 낙서재 [14:50]

 

▲ 낙서재 마루에 앉아 [14:51]

 

▲ 서재: 윤선도가 학문을 가르치던 곳 [14:52]

 

▲ 전사청: 제사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과 제기를 보관하던 곳 [14:52]

 

▲ 동천석실 이정표 [15:04]

 

▲ 도로에서 바라본 동천석실 [15:05]

 

▲ 동천석실로 올라가는 길 [15:06]

 

▲ 동천석실로 올라가는 길 [15:10]

 

15:15   동천석실 침실을 둘러보고 암벽을 따라 나 있는 길을 걸어 동천석실 정자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윤선도가 책을 읽으며 사색을 했다는 한 칸으로 이루어진 동천석실 정자 엎에 서니 이곳이 명당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전에 걸었던 격자봉 능선 아래로 낙서재가 있는 부용동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긴 윤선도가 보통 사람인가. 재력이 있고 권력이 있고 학문까지 겸비했으니 사물을 보는 안목이 어찌 뛰어나지 않겠는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동천석실에서 내려와 보길도의 마지막 관광명소인 송시열 글씐바위를 보러 갔다.

 

동천석실

 

동천석실은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으며 낙서재의 정면에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있다. 3,306m²(1,000여평)의 공간에 한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지었 던 곳이다. 특히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 지금도 석실앞에는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과 차를 끓여 마신 차바위가 남아있다. 쳔여평 공간에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와 한칸 짜리 목조건물인 동천석실이 있다. 이곳은 고산이 책 읽고 사색하며 신선처럼 소요하던 은자의 처소였다.

 

▲ 동천석실 침실 [15:15]

 

▲ 침실에서 바라본 암벽 위의 동천석실 정자 [15:16]

 

▲ 동천석실 차바위 [15:18]

 

▲ 동천석실에서 바라본 부용동 마을과 격자봉 능선 [15:19]

 

▲ 줄을 이용해 음식을 끌어올리는데 사용했다는 용두암 [15:20]

 

▲ 한 칸 짜리 방으로 이루어진 동천석실 정자 [15:20]

 

▲ 동천석실 탐방을 마치고 차를 세워둔 곳에 귀환 [15:32]

 

15:54   송시열 글씐바위로 가는 길이 시작되는 곳 공터에 차를 세웠다. 윤선도와 정적이었던 송시열의 암각시문이 보길도에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 어디 상식대로만 이루어지는가. 널찍한 길을 따라 300m 정도 해안 쪽으로 걸어가니 커다란 바위 아래에 시문이 암각되어 있는데 탁본 등으로 인해서 글자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대신 바위 앞에서 바라보는 소안도 방면 남해의 풍경은 아주 뛰어났다.   

 

보길도 송시열 글씐바위

 

보길도는 윤선도의 유적으로 가득 채워진 장소다. 보길도의 동쪽 끝자락 백도리의 해안 절벽으로 윤선도와 동시대를 살아간 송시열의 글씨가 남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은 서인, 윤선도는 남인을 대표하며 조선 중기 치열한 당쟁의 격론 속에서 송시열의 탄핵으로 윤선도가 유배를 떠났을 정도로 화합할 수 없는 정적이었다.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던 윤선도가 풍랑으로 잠시 머무른 보길도의 모습에 매료되어 세연정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반면, 역시 유배길에 이곳에 들른 송시열은 해안 절벽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싯구를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던 도중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 송시열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이었을까. 바위에 새겨진 싯구는 탁본 등으로 훼손되어 착잡함을 더하지만 바다 건너 소안도를 눈앞으로 두는 경관은 너무도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이다.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여든 셋 늙은 몸이                                     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세 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거다 
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대궐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다만 남쪽 바다의 순풍만 믿을 수밖에 
貂襄舊恩在(초구구은재) 초구(왕이 하사한 옷)에는 옛 은혜 서려있어   感激泣弧衷(감격읍고)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 

 

▲ 송시열 글씐바위 이정표 [15:54]

 

▲ 어서 오세요 [15:54]

 

▲ 정비가 잘 되어 있는 길 [15:55]

 

▲ 송시열 암각시문 안내석 [15:59]

 

▲ 송시열 글씐바위 앞 바다 풍경 [16:00]

 

▲ 송시열 글씐바위 앞 바다 풍경 [16:02]

 

▲ 송시열 암각시문이 있는 바위 [16:02]

 

▲ 암각시문이 있는 바위 옆에서 [16:04]

 

▲ 탁본 영향으로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 암각시문 [16:05]

 

16:43   노화도 산양선차강에 도착해 배편을 알아보니 5시에 떠나는 배가 있단다. 어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나가는 배도 승객이 10여 명에 불과하다. 하루에 10여 차레 배가 왔다갔다 하는데 이렇게 적은 손님으로 운영이 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갑판에 앉아 저물어가는 바다를 보며 커피와 맥주를 마시는 기분이 아주 좋다. 해남 땅끝선착장이 가까워질수록 수평선 부근이 점점 짙은 황금색으로 변해간다. 땅끝전망대 옆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다. 땅끝선착장에 도착해 오늘 숙박장소인 해남읍소재지로 차를 몰았다. 

 

▲ 노화도 산양선착장에 도착 [16:43]

 

▲ 오후 5시에 땅끝선착장으로 가는 장보고호 [16:54]

 

▲ 부두 왼쪽 노화도 채석장 [16:57]

 

▲ 장보고호 갑판 벤취에 앉아 [16:57]

 

▲ 멀어져 가고 있는 노화도 산양선착장 [15:02]

 

▲ 장보고호 갑판 벤취에 앉아 [15:02]

 

▲ 장보고호 갑판 벤취에 앉아 [15:03]

 

▲ 해남 땅끝전망대 왼쪽으로 해가 지고 있다 [15:31]

 

18:20   해남읍 시내에 있는 뉴전원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 오늘 아침과 점심을 조금 부실하게 먹었기 때문에 저녁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20분 가까이 돌아다녔는데 마땅한 식당도 별로 없고 해서 그냥 만만한 삼겹살 집에 들어갔다. 2인분을 시켜 밥과 함께 먹었더니 배가 든든하다. 저녁을 먹고 모텔로 돌아오는 길, 8시도 안 된 시각인데 거리는 인적이 끊어졌다. 관광철이 지난 월요일 저녁이라 더 그런 모양이다.

 

▲ 해남 시내에 있는 뉴전원모텔 [18:20]

 

▲ 저녁을 먹은 해남 시내 아지매식당 [18:43]

 

▲ 생삼겹살이 오늘 저녁 메뉴 [19:13]

 

▲ 인적이 거의 없는 해남 시내 거리 풍경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