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 여행/국내 旅行

2015.08.17. [국내旅行 84] 충북 보은 삼년산성

by 사천거사 2015. 9. 1.

보은 삼년산성 탐방기

 일시: 2015년 8월 17일 월요일 / 맑음

 장소: 보은 삼년산성 / 선병국 가옥 / 서원리 소나무 / 충북 보은 

◈ 코스: 청주 → 보은 삼년산성 → 선병국 가옥 → 서원리 소나무 → 청주

 회원: 아내와 함께


 


14:50   오늘은 아내와 함께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을 둘러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보은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때 쌓은 산성으로 사적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원을 거쳐 보은으로 가는 길, 얼마 전에 개통괸 왕복 4차로 도로 때문에 미원에서 보은을 오가는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산성 가는 길 입구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과수원의 사과들이 붉은 빛을 띠고 길가의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서문지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으로 새로 쌓은 성벽이 너무 말끔하고 완벽해서 약간 이질감을 불러 일으킨다.


보은 삼년산성

 

사적 제235호 지정되어 있는 보은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 산성 가는 길 입구 도로변에 주차 [15:52]

 

▲ 주차장 옆에 있는 삼년산성 배치도 [15:54]

 

▲ 과수원의 사과가 붉은 빛을 띠기 시작 [15:55]

 

▲ 가을의 전령사 코스모스가 피었네 [15:57]

 

▲ 보은 삼년산성 서문지로 올라가는 길 [16:00]


16:00   서문지에서 출발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내려오기로 하고 산성 서벽 안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언덕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서문지, 사무소, 아미지 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고, 등성이에 오르니 멀리 보은면소재지가 보인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청주, 상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요충지로서 신라가 서쪽의 백제에 대비하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서북지방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전초 기지였다. 신라는 이 지역의 확보를 토대로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보은 삼년산성의 주 출입문인 서문지 [16:00]

 

▲ 보은 삼년산성 서벽 [16:01]

 

▲ 서문지에서 산성 서벽을 배경으로 [16:01]

 

▲ 서문지 옆에 있는 연못 '아미지' [16:02]

 

▲ 산성 서벽을 따라 올라간다 [16:02]

 

▲ 서벽을 따라 오르다 내려다본 서문지와 안내소, 그리고 아미지 [16:03]

 

▲ 경사가 조금 있어 계단이 설치해 놓았다 [16:05]

 

▲ 계단길을 마감하고 [16:06]

 

▲ 서성치에서 바라본 보은읍내 [16:06]

 

▲ 개망초 꽃밭에서 [16:07]

 

▲ 남문지로 가는 길 [16:08]


16:09   목책으로 막아 놓은 남문지에 도착했다. 보은 삼년산성은 통일신라 헌덕왕14년(822)에는 웅천주(공주)도독이던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때 거점지로 이용되었으며, 고려 태조 1년(918)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의 경계를 넘어 쳐들어왔는데 태조 자신이 후백제가 점거한 삼년산성을 치려다 실패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도 이용된 기록이 있으며,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토기편과 각종 유물이 이 산성에서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데크 전망대가 있는 남동치성에 올랐다. 전망대에는 보은 대야리 고분군에 대한 설명문이 있다. 약 1700여기의 고분은 삼년산성이 위치한 오정산을 중심으로 사면 지역 곳곳에서 확인되는데 15m~20m의 대형 봉토분과 직경 10m 내외의 중형 석실분, 그리고 소형의 석곽분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지표조사 결과 고분군은 중부지역 최대 규모의 신라 고분군으로, 지표상에서 출토된 유물을 살펴볼 때 축조 시기가 삼년산성이 활발하게 운영되던 5세기~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보은 삼년산성 남문지에서 [16:09]

 

▲ 보은 삼년산성 남벽 [16:12]

 

▲ 보은 삼년산성 남벽의 허물어진 부분 [16:13]

 

▲ 남동치성에 있는 보은 대야리 고분군 안내문 [16:15]

 

▲ 보은 삼년산성 남벽 [16:20]

 

▲ 산성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 [16:22]

 

▲ 보은 삼년산성 북동치성으로 가는 길 [16:28]

 

▲ 북동치성 올라가는 길에 바라본 서북치성 [16:32]


16:34   데크 전망대가 있는 북동치성에 올랐다. 사방으로 전망이 좋다. 북동치성에서 북벽을 따라 내려오는 길,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북벽의 규모가 대단하다. 삼년산성 성내에 있는 보은사로 갈림길을 지나고 북문지도 지난 다음 서북치성을 향해 올라가는데 경사가 꽤 가파르다. 별 다른 표지가 없는 서북치성을 넘어 서문지로 내려간다. 서문지에 내려서는 것으로 보은 삼년산성을 한 바퀴 돌았는데 소요 시간은 쉬엄쉬엄 해서 53분 정도 걸렸다.  


▲ 데크 전망대가 있는 북동치성에서 [16:34]

 

▲ 엄청난 높이의 보은 삼년산성 북벽 [16:37]

 

▲ 1902년 朴鏡荷 스님이 창건했다는 보은사가 왼쪽으로 보인다 [16:38]

 

▲ 북벽에 기대어 서서 [16:38]

 

▲ 보은사로 내려가는 길 이정표 [16:40]

 

▲ 북벽에 기대어 서서 [16:40]

 

▲ 보은 삼년산성 북문지(北門址)[16:41]

 

▲ 서북치성 올라가는 길에 바라본 북동치성 [16:44]

 

▲ 서문지로 내려가는 길에 한 장 [16:50]

 

▲ 서문지 뒤로 산성 서벽이 보인다 [16:52]


16:53   서문지 바로 옆에 암석 지대가 있는데 암각자가 새겨져 있다고 해서 살펴보았다. 암석지대 맨 아랫부분에는 蛾眉池(아미지), 윗부분에는 有似巖(유사암)과 玉筆(옥필)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명필인 김생의 글씨라는 이야기도 있다. 보은 삼년산성 탐방을 마치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선병국 가옥을 둘러보기 위해 차를 몰았다. 보은 삼년산성에서 선병국 가옥까지는 승용차로 채 15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 암각자 '아미지'(饿眉池) [16:53]

 

▲ 암각자 '유사암'(巖) [16:55]

 

▲ 암각자 '옥필'() [16:56]

 

▲ 사적 제236호 삼년산성 표지석과 함께 [16:59]

 

▲ 보은 삼년산성 서문지 [17:00]

 

▲ 산성 탐방을 마치고 서문지를 배경으로 [17:01]

 

▲ 보은 삼년산성 탐방을 마치고 차를 세워둔 곳에 귀환 [17:05]


17:20   선병국 가옥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100년 가까이 된 선병국 가옥은 개량식 한옥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34호다. 주차장 오른쪽으로 나 있는 숲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된장, 간장, 고추장을 조선 8도의 다양한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키고 있는 장독대가 보인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담장을 감아돌자 선처흠 효열각이 있고 솟을대문 쪽으로 가다 보니 선공영흠시혜비와 관선정기적비, 그리고 선정훈선생송덕비가 눈에 들어온다. 


보은 선병국 가옥(報恩 宣炳國 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큰 개울을 이루는데, 개울 중간에 돌과 흙이 모여 삼각주를 이루니 배의 형국 같은 섬이 되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중앙에 엄청나게 큰 기와집이 있으니 여기가 인근에서 제일 가는 부잣집이었다. 또한 이웃의 영재들을 뽑아 사비를 들여 교육시킨 선각자의 집으로 소문난 선(宣)씨 댁이다.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당대 제일의 목수들을 가려 뽑아 후하게 대접하면서 이상형의 집을 지었다고 한다. 요긴하게 이용될 공간이 집안에 망라되도록 설계하였다. 이 시기에는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이른바 개량식 한옥의 구조가 시험되던 때였다. 그래서 재래식 한옥으로 질박하게 짓기보다는 진취적인 기상으로 새로운 한옥의 완성을 시도해 본 것이다. 이 집은 그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특성 있게 지어졌으므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80년에 큰물이 져서 일대가 침수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 돌각담들이 무너져서 아늑하며 유현하던 분위기는 많이 흩어지게 되었다. 대문 맞은편에 돌각담을 두른 일곽이 있고 그 안에 여러 채의 부속건물들이 있었으나 6·25사변 이후 무너져서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선병국 가옥은 외부 담장(1변)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각각 내부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랑채(4번), 안채와 행랑채(5번), 사당(6번)이 자리잡고 있다. 외부 담장 남쪽으로 정문인 솟을대문(7번)이 있고 북쪽에도 사당 뒤쪽으로 별도의 대문이 있다. 외부 담장 남쪽, 솔밭 숲속에는 비석(2번)과 효열각이 있다.


▲ 선병국 가옥 주차장에 도착 [17:20]

 

▲ 나무 둘레가 얼마야? [17:22]

 

▲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담장 앞에서 [17:23]

 

▲ 잔디밭 테이블에 앉아서 [17:24]

 

▲ 된장, 간장, 고추장이 익어가는 8도 항아리 장독대 [17:25]


선처흠 효열각(宣處欽 孝烈閣)

 

선처흠 효열각은 선처흠의 효행과 그의 처 경주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조선 고종 29년(1892) 10월에 명정(命旌)하니 그에 따라 무진년(戊辰年)에 정려각을 세웠다’라고 그 내력을 밝히고 있다. 편액의 우측에는 ‘효자 증조 산대부동몽교관 선처흠지문(孝子贈朝散大夫童蒙敎官宣處欽之門)’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좌측에는‘열녀 선처흠 처금인 경주김씨지문(烈女宣處欽悽今人慶州金氏之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선처흠 효열각 [17:27]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는 남헌(南軒) 선정훈(宣政薰)선생의 아버지이며 비서경(秘書卿)을 지내신 선영홍공에 대한 시혜비로 전라남도 고흥군의 두원(豆原), 점암(点岩), 남양(南陽), 남면(南面) 등의 4개면 소작인들이 뜻을 세워 만든 철비(鐵碑)이다. 이 철비(鐵碑)는 이 집안이 전남 보성에서도 큰 부자였으며, 그의 부친인 영홍(永鴻) 公은 당시 그 지방의 생활고로 어려웠던 많은 사람들에게 허기지지 않도록 많은 선행을 베풀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선공영홍시혜비()[17:27]


관선정기적비와 남헌 선정훈선생송덕비

 

관선정기적비는 전체높이 230cm, 비면 156×56×25cm 크기로 관성정에서 수학한 학생들이 1951년 관선정학우회를 창립하고 매년 남헌 선생을 기리는 행사를 하는 가운데 1973년에 세운 비석이다.

 

관선정은 남헌 선정훈 선생이 99칸의 대저택인 '선병국 가옥'을 지을 때, 집 동편에 세운 서당을 말한다. 또한 보은향교 명륜당에도 서숙을 설치하여 저명한 학자를 초빙하여 후학을 양성하되 이에 따르는 제반 비용을 사재로 전담하여 인재양성에 많은 공을 쏟았다. 선씨는 이곳에서 1926년부터 44년까지 일제의 의해 폐쇄되기까지 전국각지 수백 명의 젊은이들에게 사재로 음식과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하고, 영남에서 홍치유 선생을 모셔다 가르쳤다. 이곳에서 수학한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형성한 청명 임창순 선생이 있다.

 

남헌 선정훈선생송덕비는 전체높이 370cm, 비면 220×73×44cm의 크기로 2001년 남헌선생송덕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세웠다. 선정훈 선생의 공덕과 치적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 관선정기적비와 남헌 선정훈선생 송덕비 [17:28]


17:28   선병국 가옥 안으로 들어가려면 솟을대문을 통과해야 한다. 솟을대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보이는 왼쪽 건물은 사랑채고 오른쪽으로 길게 보이는 것은 안채의 담장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사랑채 중문을 지나 뜰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팍팍 풍기는 건물과 뜰, 수련과 소나무가 잘 어울렸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소복을 차려 입은 조금 나이가 든 여자 한 분이 방에서 나오더니 사진을 찍어주면서 중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파륜궁 탄압에 대해 서명을 부탁한다.

 

파륜궁은 중국의 리홍즈가 불교와 도교 원리에 기공을 결합시켜 창시한 수련법인데... 서명을 하고 파륜궁에 관한 책자도 하나 받았다. 안채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채를 둘러보는 것으로 선병국 가옥 탐방을 마치고 오늘 여정의 마지막 코스인 서원리 소나무 구경에 나섰다. 서원리 소나무를 보러 가는 길 왼쪽으로 속리산제일고시촌 건물이 보인다. 우리 아들이 이 고시촌에서 3개월 공부하고 경찰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곳이다.


▲ 선병국 가옥 솟을대문 [17:28]

 

▲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선 아내 [17:29]

 

▲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은 안채 담장 역할을 하는 건물 [17:30]

 

▲ 사랑채 중문 앞에서 [17:30]

 

▲ 선병국 가옥 사랑채 앞에서 [17:32]

 

▲ 선병국 가옥 사랑채 뜰안에 있는 멋진 소나무 앞에서 [17:32]

 

▲ 선병국 가옥 사랑채 마루에 앉아 [17:36]

 

▲ 선병국 가옥 사랑채 뜰안에 있는 수련 뒤에서 [17:37]

 

▲ 주차장 옆에 서 있는 선씨 종가 표지판 [17:42]


17:51   서원리 소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을 했다. 정이품송의 정부인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자태와 위용이 대단하다. 서원리 소나무 구경을 끝으로 오늘의 보은 관광은 막을 내렸다. 오후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세 군데나 들렀으니 나름대로 알찬 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감록관 옆에 새로 생긴 민물장어구이집으로 갔다. 최근에 개업한 집인데 가격이 비싸지 않고 품질이 우수하고 맛도 좋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먹어 본 결과는? 대만족, 강추!


보은 서원리 소나무

 

천연기념물 제352호, 지정면적 570㎡, 나무높이 15m로 지상 70cm 높이에서 2갈래로 갈라졌고,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각각 3.3m, 2.9m이다. 수관 너비는 동서가 23.8m, 남북이 23.1m로서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된다. 이 소나무는 서낭나무로 살아남은 나무 중의 하나이다. 법주사 입구 속리의 정이품송과 내외지간이라는 전설이 있어 정이품송 정부인 소나무라고도 한다. 이는 정이품송이 곧추 자란 데 비하여 밑에서 2갈래로 갈라졌기 때문에 암소나무라고 한 것 같다.


▲ 천연기념물 제352호로 지정되어 있는 서원리 소나무 [17:53]

 

▲ 정이품송의 정부인 나무로 알려져 있는 서원리 소나무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