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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산행/경북山行記

2010.07.17. [경북山行記 25] 경북 울릉 성인봉

by 사천거사 2010. 7. 17.

성인봉 산행기

 일시: 2010년 7월 17일 토요일 

◈ 장소: 성인봉 984m / 경북 울릉  

◈ 코스: 나리분지 → 신령수 → 성인봉 → 말잔등 → 나리분지 

◈ 시간: 6시간 16분


 


07:00   울릉도에 온지 3일 째 되는 날, 오늘은 나는 성인봉 산행을 하고 아내는 B코스 버스투어를 하기로 했다. 어제는 안평전에서 성인봉에 올라 대원사로 내려왔는데, 오늘은 나리분지에서 올라 봉래폭포 쪽으로 내려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등뼈해장국으로 아침을 먹은 다음 도동버스터미널에서 7시 10분에 천부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요금은 1,500원, 손님은 나 혼자 뿐. 마치 45인승 버스를 전세 내어 타고가는 기분이었다. 중간에 다른 손님이 한 분 탔기에 미륵산을 경유해서 성인봉 가는 길을 물었더니 위험하다고 가지 말란다.

 

어제 버스투어를 한 코스대로 달려 천부에 도착하니 나리분지로 가는 마이크로 버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의 행색을 보니 험한 길을 오랫동안 많이 달려 그런지 꼴이 엉망이었다. 저게 제대로 굴러가려나? 버스가 출발했는데 제대로가 뭐여 무지하게 잘도 달린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다른 차들도 없고 해서 쉽게 나리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 요금은 천 원. 산행객은 나 혼자였다.


▲ 도동버스터미널 앞에 있는 도동주차장  [07:03]


08:25   어제 들렀던 나리분지에 다시 발을 내디뎠다. 울릉도의 나리분지는 성인봉이 만든 거대한 분화구인데, 이를 중앙화구구라고도 한다.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고 칼데라에 해당된다. 기사 아저씨가 산행로를 가리켜주신다. 널찍한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왼쪽에 군부대가 있다. 수레길을 5분 정도 걸어 이정표를 만났다. 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는데 오른쪽이 성인봉으로 가는 길이다. 왼쪽은 어디로 가는 길인가? 나중에 알겠지만 그 길은 성인봉에서 내려오면서 내가 내려오면서 밟게 되는 운명이 길이 되었다.


▲ 나리분지에 있는 이정표 [08:26]

 

▲ 나리분지: 타고온 버스와 늘푸른산장 입간판이 보인다 [08:27]

 

▲ 울릉도에서 가장 넓은 경작지 나리분지 [08:27]

 

▲ 나리분지에 있는 오징어 이정표 [08:27]

 

▲ 수레길이 신령수까지 계속 이어진다 [08:31]

 

▲ 이정표: 나중에 이곳에 다시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08:33]

 

▲ 계속되는 수레길 [08:42]


08:47   알봉분지에 도착했다. 성인봉이 만든 분화구에서 또 분화가 이루어져 새로운 화산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알봉이고 알봉이 만든 분화구가 알봉분지다. 이러한 형태를 이중화산(분화구 안에 또 다른 분화구)이라고 한다. 따라서 알봉분지란 알봉의 분화구라기 보다는 알봉을 중심으로 나리분지의 서쪽을 부르는 말이다. 다른 말로 '작은 나리' 라고도 한다. 알봉분지에는 울릉도의 전통가옥인 투막집이 있다. 알봉분지에서 조금 걸어가니 신령수가 나타났다.


울릉도 북면 투막집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183호  

소재지: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나리307외 2필지 

 

이 건물은 울릉도 특유의 주거형태를 간직한 고유의 가옥으로 1984년에 원래 건물이 있던 자리에 옛날의 재료를 활용하여 개축된 건물이다. 고영환씨 소유였으나 문화재로 지정된 후인 1987년에 울릉군에서 토지와 가옥을 사서 보수 관리하고 있다. 정면은 3칸 규모인데 평면은 좌측에 부엌을 두고 우측으로 투막집의 구조를 이룬 큰방과 머릿방이 붙어 있다. 부엌의 부뚜막은 아궁이에서 내굴로 되어 있는데 부엌의 바닥은 축담보다 낮게하여 계단을 한 단 놓고 오르내리게 하였다. 부엌을 포함한 3칸의 주위에 새 풀로 우데기를 둘러쳤는데, 처마 밑의 앞쪽을 더 넓혀 활동하기 편하게 되어 있다.


  ▲ 성인봉으로 가는 길이 나 있는 알봉분지 [08:47]

 

▲ 성인봉 쪽 봉우리에 운무가 피어오르고 있다 [08:48]

 

▲ 알봉분지에 있는 투막집 [08:49]

 

▲ 알봉분지에서 바라본 알봉과 송곳봉 [08:49]

 

▲ 섬초롱꽃 [08:50]

 

▲ 신령수까지 계속 수레길이다 [08:53]


08:55   울릉도는 섬이지만 대체로 물이 좋은 편이다. 그 중 신령수는 맛이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신령수 오른쪽으로는 야영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신령수를 지나면서 길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물이 조금씩 흐르는 계곡 오른쪽으로 너덜지대가 이어졌다. 남자 등산객 한 명이 뛰어서 아래로 내려온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다.


▲ 물맛이 좋은 신령수 [08:55]

 

▲ 신령수 오른쪽 야영지 [08:56]

 

▲ 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는 계곡 [09:04]

 

▲ 계곡길 너덜지대 [09:07]


09:09   나무 계단길이 시작되었다. 꽤 길다. 계단 좌우로 운무가 가득해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살찐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사람들에게 익숙한지 별로 경계심 없이 다가온다. 빵을 꺼내 주었더니 먹는다. 예전에 계룡산에 갔을 때에도 이런 고양이가 있었는데. 지루한 계단길이 끝나자 능선이다. 목책으로 보호를 하고 있는 고목 두 그루를 지나 샘터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어제 잘못 내려왔던 계단길을 걸어 올랐다.


▲ 계곡 오른쪽으로 계단이 시작되고 있다 [09:09]

 

▲ 운무가 내려앉고 있는 계단 [09:18]

 

▲ 계단을 오르다 만난 살찐 고양이 [09:22]

 

▲ 계단이 끝나자 능선길이다 [09:29]

 

▲ 거대한 보호수 [09:33]

 

▲ 운무에 싸인 보호수 [09:34]

 

▲ 성인봉 아래 계단을 오르기 전에 있는 성인수 [09:47]


10:00   성인봉 정상에 올랐다. 어제와는 달리 아무도 없다. 사진 찍어 줄 사람이 없네. 할 수 없이 자동으로 놓고 한 장 간신히 찍었다. 운무가 온 산을 휘감고 있어 지척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자, 그런데 봉래폭포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내려가야 하나? 전망대로 가 보았으나 길이 막혔다. 일단 성인봉을 내려가 찾아보자. 못찾겠다. 그런데 나리분지로 가는 길 왼쪽에 능선길이 아주 잘 나 있다. 이 길이 봉래폭포로 가는 길인가?

 

일단 그 길로 들어섰다. 아무런 표지기는 없는데 산죽을 잘라 길을 잘 내놓았다. 가보자. 가다가 길이 아니면 돌아오면 되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람이 세차게 분다. 그래도 비는 내리지 않는다. 경사가 거의 없는 능선길이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걸었더니 산길이 끝나면서 넓은 시멘트로 포장을 한 공간이 나타났다. 저게 뭐람.


▲ 운무가 가득한 성인봉 정상에서 [10:02]

 

▲ 성인봉 정상에 있는 삼각점 [10:05]

 

▲ 운무가 가득한 능선 [10:16]

 

▲ 울릉도가 자생지인 섬말나리꽃 [10:19]

 

▲ 웃자란 잡목이 길을 가리고 있다 [10:33]


10:34   시멘트 포장이 된 넓은 공터에 내려섰다. 헬기장인가? 세찬 바람과 운무 때문에 분간이 잘 안 되는데, 앞으로 진행을 해보니 사방이 철망으로 둘러쳐진 곳에 무슨 시설물이 있고 철망에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짐작컨데 군부대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길이 끊어졌네. 왼쪽 오른쪽 아무리 살펴보아도 길이 없다. 게다가 경사가 심해서 어디로 개척해서 내려갈 수도 없었다. 여기까지 길이 제대로 잘 나 있었는데 왜 여기서 길이 끊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되돌렸다.

 

군부대에서 다시 되돌아오는 길, 그냥 계속 성인봉 정상 아래까지 왔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군부대에서 출발하여 10분 정도 걸었는데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 길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묘한 동물이라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되든 안 되든 그 일을 이루려고 하는 오만을 가지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갈림길에서 보다 신중하게 생각을 했어야 했다. 과연 이 길이 사람들이 자주 다닌 길로 계속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을까? 정녕 이 길이 봉래폭포로 가는 길이 맞을까? 혹시 조금 내려가다 길이 끊어지고 절벽을 만나는지 않을까? 운무 때문에 사방이 잘 보이지 않는데 길을 잃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등등..... 그런데 그 때 나는 왜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까?

 

제법 뚜렷하게 나 있는 오른쪽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이런, 길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아예 고비밭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야, 이거 낭패네. 어쩐다? 사실 이 때도 늦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냥 도로 올라와서 능선을 타고 성인봉 아래로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잘못된 생각은 '길은 없지만 경사도 별로 심하지 않고 하니 적당히 길을 개척해서 내려가면 큰 길이나 마을에 닿게 될거야' 였다. 한 번 이런 마음을 먹게 되면 다른 생각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법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의  큰 맹점이다.

 

고비밭을 헤치고 내려가니 이어서 산죽밭이 시작되었다. 내 키보다 큰 산죽밭을 헤치고 내려가는 것이 쉽지가 않다. 몸은 벌써 비를 맞은 것처럼 흠뻑 젖고 말았다. 간신히 산죽밭을 벗어났다. 산죽과 잡목이 섞인 경사지가 다시 나타났다. 이제는 다시 올라가기란 힘든 일이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를 내려가자 왼쪽으로 계곡이다.

 

그래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평지에 닿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계곡으로 내려가기가 만만치가 않다. 마사토 사면의 경사가 무척 심하다. 조심조심 내려가다 그만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50미터 정도 미끌어지다 간신히 제동을 했는데 그 아래는 10여 미터 정도의 절벽이었다. 만약 제동을 하지 못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정신을 차려 계곡을 따라 천천히 모든 신경을 다 쓰며 내려갔다.


▲ 세찬 바람이 불고 운무에 앞이 잘 안 보이는 레이더 기지 [10:34]

 

▲ 능선에서 갈라지는 길 [10:48]

 

▲ 처음에는 제법 길이 뚜렷하다 [10:48]

 

▲ 길이 끊어지고 고비밭이 나타났다 [11:01]


11:33   다시 절벽이 나타났다. 현재 상태로는 도저히 내려갈 수가 없는 경사요, 거리였다. 눈을 들어보니 멀리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밭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보인다. 저기가 어딘가? 형세로 보아 나리분지 같기도 한데 내려온 길을 더듬어보니 나리분지일리는 만무하고, 헷갈린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저곳까지 가느냐 못 가느냐이다. 지형을 살펴보니 계곡 양쪽으로 나 있는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평지에 닿을 것 같다.

 

일단 내려온 계곡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경사가 너무 심해 좌우에 있는 능선으로 올라붙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시 내려온 길을 올라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정도 올라간 다음 계곡이 갈라지는 곳에서 오른쪽 계곡을 따라 다시 올랐다. 오른쪽 능선으로 붙어야 하는데 경사가 심해 우선 왼쪽으로 능선으로 붙었다. 잡을 것이 없어 나무뿌리와 고비뿌리에 의존해야 했다. 돌은 풍화작용 때문인지 만지면 부서졌다.

 

왼쪽 사면을 따라 한참을 올라간 다음 다시 오른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뭐여, 그 능선을 방금 올라왔던 그 계곡으로 떨어지는 능선이었다.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다. 오른쪽 능선으로 붙기 위해 계곡을 가로지르다 다시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중력과 체중때문에 꽤 긴 거리를 미끌어져 내려왔다. 어떻게 멈출 방법이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리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아, 이러다가 죽는 거구나.

 

운이 좋은 건가? 약간 턱이 진 곳에서 멈췄다. 팔과 다리가 마사토와 자갈에 까지고 바지 엉덩이 부분이 찢어졌다. 그래도 멈춘 게 어디여. 슬슬 현재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19를 불러야 하나? 한 번만 더 시도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신고를 해야겠다.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에요? 응, 길을 잃었는데 지금 마을이 앞에 보여, 걱정하지 마. 아내는 나의 사정과 심정을 모를 것이다.

 

다시 계곡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리의 힘이 많이 빠졌다. 그래도 올라야 한다. 데려다 줄 사람도 없고 데리러 올 사람도 없다. 모든 것을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 이번에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붙어보았다. 계곡을 따라 밧줄이 늘어져 있다. 웬 밧줄? 밧줄을 따라 올라갔는데 곧 끝이 났다.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 다시 오른쪽 능선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맞겠지.

 

기대감을 갖고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데 웬걸, 아까 능선이고 그 계곡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알고보니 그곳은 여러 능선 사이로 나 있는 계곡들이 한 계곡이 모여드는 지형을 하고 있었다. 야, 미치겠네.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오른쪽 능선으로 붙는 것이다. 오른쪽 능선으로 붙기 위해 계곡을 가로지르다 또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역시 전번처럼 제동이 안 된다. 100여 미터 이상을 미끄러졌다.

 

다시 내려가던 몸이 멈추었다. 운도 좋다. 스틱이 없어졌다. 위를 보니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도저히 가지러 갈 힘이 없다. 포기하자. 자, 이제 어떻게 하나. 방법은 하나인데 무척 위험하다. 곧바로 경사가 심한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붙는 것이다. 미끄러지거나 추락하면? 그건 정말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가는 나무뿌리와 고비뿌리와 간신히 버티고 있는 바위를 이용하여 정말 천신만고 끝에 오른쪽 능선에 올랐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그곳을 지나오면서 겪은 내용을 책으로 쓰면 장편 한 권은 될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내 모습을 찍었다면, 위험에 처한 인간이 살기 위해서 처절한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편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능선 왼쪽은 또 계곡이었다. 양 계곡 사이에 내가 죽어라고 오른 능선이 칼날처럼 아래로 뻗어 있었다. 다행히도 능선을 따라 내려가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오른쪽 계곡 절벽 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저곳을 못 내려가서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것이다. 능선이 끝이 나면서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섰다. 넓은 계곡이다. 잠깐 계곡을 걸어 내려가자 시야가 트이면서 평지가 보인다. 만세, 살았다. 그런데 온몸으로 밀려오는 이 허탈감은 또 뭐지?


▲ 어딘지 모르지만 멀리 마을이 보인다 [11:33]

 

▲ 처음 내려온 계곡 [11:33]


14:21   계곡을 벗어나, 어딘지 모르지만, 작물을 심은 꽤 넓은 밭이 있는 평지로 나왔다. 원시림을 벗어나 사람의 냄새가 나는 세계로 나온 것이다. 사람의 자취가, 흔적이 이렇게 반갑기란 처음이다. 수렛길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모르겠다, 오른쪽으로 가보자. 설마 여기서 산으로 올라가지는 않겠지. 수렛길을 따라가면 어딘가 마을이 나오겠지.

 

수렛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었더니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라니? 아니, 아침에 성인봉 올라갈 때 본 거네. 그렇다면 오른쪽이 나리분지네. 아, 이제 알겠다. 성인봉에서 내가 봉래폭포로 간다고 걸었던 능선은 말잔등으로 가는 능선이었구나. 그리고 내가 생사를 걸고 내려온 계곡이 바로 말잔등에서 나리분지로 떨어지는 계곡이었구나. 그래도 다행인 것이, 그 계곡이 다른 곳이 아닌 나리분지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천운이었다.

 

그나저나 어디서 몸을 좀 씻어야 하는데 물이 없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흙투성이었다. 머리 속은 모래가 가득 박혔고. 무엇보다도 찢어진 바지가 문제였다. 팬티가 훤히 보이니 말이다. 이정표에서 10분 정도 걸었더니 왼쪽 밭으로 들어가기 전에 커다란 물통이 다섯 개가 있는데 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만세! 일단 머리를 감고 팔다리의 흙을 대충 씻은 다음 비옷을 꺼내 입었다. 비옷을 입으니 거의 모든 부분이 커버가 되었다. 호랑이 굴에 빠져도 살아날 구멍이 있네.


▲ 계곡에서 벗어나 만난 밭이 있는 평지 [14:21]

 

▲ 아침에 올라갈 때 만났던 이정표 [14:27]

 

▲ 공군부대에 이르기 전 도로 왼쪽에 있는 물통들 [14:39]


14:43   나리분지에 도착해 보니 천부로 가는 버스가 서 있기에 출발시간을 물었더니 3시 5분이란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일단 산채비빔밥을 점심으로 시켰다. 각종 산나물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나왔는데 대충 비벼서 간신히 먹었다. 배는 고픈데 밥은 잘 넘어가지 않는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두 탈진이 되어 몸의 신진대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3시 5분에 떠난 버스가 천부에 도착하자 도동으로 가는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도동으로 가는데 비도 오지 않는데 비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버스는 타는 사람마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이구, 당신들이 내 사정을 어떻게 알아. 그런데 도동까지 가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긴 거야. 도동에 도착해 아내를 만났는데 왜 보기 싫게 비옷을 입고 있느냐고 빨리 벗으라고 한다. 사람 속도 모르고. 사정을 이야기하고 근처에 있는 해수사우나에 몸을 씻으러 갔다. 옷을 벗은상처투성이의 내 몸을 보고 주인이 몹시 걱정을 한다. 119를 불러야하는 거 아니요? 괜찮아요.


▲ '늘푸른산장' 앞에 천부로 가는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14:43]


17:20   이틀을 묵은 수궁모텔을 출발, 선착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처가 난 온 몸이 쓰라렸지만 무사히 육지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다는 현실에 마음은 가벼웠다. 시원한 캔 맥주를 하나 사서 마신 다음 배에 올랐다. 독도를 다녀오느라고 조금 늦게 떠난 여객선은 조금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파도도 약간 있어 그런지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나는 독도에 갈 때와 비슷했다.

 

8시 쯤에 묵호항에 배가 입항했다. 지난 14일에 묵었던 르네상스 모텔 606호에 다시 짐을 풀었다.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찜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 들어가 장치찜을 시켰다. 장치는 글자 그대로 뱀장어처럼 긴 모양을 한 물고기였는데 그냥 먹을만 했다. 모텔에 다시 돌아와 자리에 누웠는데 밀려드는 피로감에 금방 잠이 들었다.


▲ 묵호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 [17:24]


7월 18일 일요일 

 

05:30   창밖으로 묵호항의 일출이 보인다. 참, 여기가 동해지. 모텔을 떠나 차에 오른 다음 집에 오다가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주인 아주머니의 말이 무척 정감스러운 휴게소였다. 휴게소를 떠나 태백, 영월, 제천을 거쳐 청주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몸만 정상이라면 몇 군데 볼거리를 들렀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대신 성인봉을 두 번 오르면서 일생 일대의 큰 경험을 한 것은 이번 여행의 큰 소득이었다.


▲ 구름이 낀 묵호항의 일출 [05:30]

 

▲ 묵호항의 일출 [05:30]

 

▲ 묵호항의 일출 [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