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일시: 2024년 11월 3일 일요일 / 맑음
◈ 장소: 서운동성당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서운동 90-1
◈ 회원: 아내와 함께
10:00 오늘은 연중 제31주일이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신 주님이시며 주님밖에 다른 신이 있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은총을 주시어,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영원한 대사제이신 성자의 복음,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해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을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마르코 12,28-34-
오늘 복음 내용을 아주 간단히 말한다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사랑이란 이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더 행복할까?' 하고 끝없이 고민하면서,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늘 희생하고 노력하는 행위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위한 행위이지만, 그런 행위를 통해서 상대방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 사랑을 베푼 사람도 행복해진다. 결국,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행복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상대방과 나를 동시에 행복하게 해 주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랑을 강조하신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 천주교 신자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신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어떤 행동을 하든 저버리지 않고 사랑을 베푸신다.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당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나? 성경 안에 들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두 모아놓은 곳이 바로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신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네 이웃은 내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즉, 자신의 배우자, 부모, 자식, 형제, 직장 동료, 이웃에 사는 사람들, 심지어 오다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까지도 모두 나의 이웃이다. 그런데,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나만큼 사랑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처럼 조건 없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게 쉬운 일이면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을 하라고 힘주어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 그래도 어쩌겠나. 하느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능력에 맞게 내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임종을 맞은 사람들이 그동안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가족들에게 남기는 가장 많은 말이 바로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라고 한다. 그런데 왜 그 말을 꼭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할까? 살아생전에 그 말을 할 기회가 엄청나게 많았을 텐데, 왜 당시에는 하지 못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죽고 나면 더 이상 가족들을 볼 기회가 없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사실, 사랑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엄청난 의미를 안다면 생전에 그 말을 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살아 있을 때에 살아가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실제로 사랑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역설하신 사랑뿐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서간 코린토 1서 13장
사랑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 청주 서운동성당 [10:00]
▲ 서운동성당 성모동굴 [10:00]
▲ 서운동성당 제대 [10:02]
▲ 미사가 끝났어요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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