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마드리드 길 8
◈ 일시: 2024년 5월 8일 수요일 / 맑음
◈ 장소: 산티아고 순례길 마드리드 길 / 스페인
◈ 코스: 코카 → 비예기요 → 알카사렌
◈ 거리: 24km / 걸은 거리 180.6km
◈ 시간: 5시간 47분
00:10 잠에서 깼다. 춥다. 담요를 두 개나 덮었는 데도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결국 이 알베르게에서 밤을 보낸 사람은 커플 순례자와 나, 딱 3명이다. 이전에 걸었던 4개의 순례길 중 은의 길이 사람이 적은 편이고 인프라가 조금 시원찮은 곳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마드리드 코스는 걷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기존에 있던 공립 알베르게도 문을 닫은 곳이 늘어나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알베르게에도 오스피탈레로가 없는 것이다. 지금 침대 4개가 있는 도미토리에 나 혼자 있으니 호스텔 싱글 룸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깜깜한 공간에 누워 있어 주변 사물이 전혀 파악이 안 되니 저곳이 이곳이고 이곳이 저곳이다. 그런데 아반토 호스텔에서 만났던 순례자 커플은 어디로 갔나? 분명 나보다 먼저 떠났고 발걸음도 빠른 사람들이라 먼저 도착했을 텐데.
04:21 깜박 잠이 들었다 다시 깼다. 지금 한국시간이 11시 21분이니 아내는 이미 중국 청도여행을 떠났을 시간이다.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즐겁게 잘 다녀오세요. 어제 슈퍼에서 사 온 빵과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먹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8일째인데 한 가지 몸의 변화가 일어났다. 가끔씩 불편하던 위의 상태가 아주 좋아졌다는 사실. 속 쓰림, 더부룩함, 가스가 차는 현상들이 싹 사라지고 속이 아주 편안해졌다. 이유가 뭘까? 내 생각으로는 맵고, 짜고, 뜨거운 음식을 먹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여기서는 음식을 불규칙하게 먹는 데도 속이 좋으니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어버이날이라고 딸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내는 중국으로 떠났고 나는 스페인에 와 있으니 딸네 가족과는 내년에나 함께 자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치권에서는 어버이날을 공휴일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있는데 글쎄, 평소에 부모에 대한 관심을 가져주는 게 중요하지 특정한 날을 정해서 놀 게 해주는 게 중요할까. 물론 정치권의 포퓰리즘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허구한 날 놀기만 하면 소는 언제 키울 건가? 부모님에게 개만큼만 관심을 가져 달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이 서글프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동녘 하늘이 붉게 물이 든 것을 보니 곧 해가 뜰 모양이다. 올해 이곳에 와서 해 뜨는 것은 처음 본다. 늘 그렇게 생각하지만 해가 뜨는 모습은 무엇보다도 장엄하다. 과거에는 태양을 거의 신적인 존재로 보고 태양신을 모시는 나라나 부족도 많았다.
08:02 알베르게 출발, 작년 은의 길을 걸을 때만 해도 6시 30분 넘어서 알베르게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는 7시 이전에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서로 장단점이 있지만 이렇게 조금 느긋하게 떠나는 것도 여러 모로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일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 목적지 알카사렌까지는 24km 거리, 굴곡이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다. 어제 걸어온 길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시내를 벗어나면서 성 니콜라스 타워 옆을 지나 잠깐 진행하자 까미노가 소나무 숲 안으로 들어간다.
▲ 알베르게 도미토리에서 바라본 일출 [06:48]
▲ 알베르게 도미토리에서 바라본 일출 [07:14]
▲ 코카 공립알베르게 출발 [08:02]
▲ 로마시대 성벽(Puerta de la Villa) [08:11]
▲ 성 니콜라스 탑(Tower of Saint Nicholas) [08:16]
▲ 길 왼쪽에 있는 낡은 표지판 [08:20]
▲ 비포장 길에 진입 [08:23]
▲ 에레스마 강(Eresma River)을 건너간다 [08:24]
▲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진행 [08:31]
▲ 계속 오른쪽으로 진행 [08:36]
08:40 소나무가 많이 보이는 길을 지나고 농경지 사이로 나 있는 길을 걸어가자 지평선을 따라 마을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하여 비예기요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에 도착해 보니 강아지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시하지 마라. 그래도 공립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이다. 물론 식사를 할 수 있는 바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마드리드 길은 사람 보기가 참 어려운 길이다.
▲ 혼자 하는 그림자놀이 [08:40]
▲ 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 [08:46]
▲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네 [08:54]
▲ 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 [09:07]
▲ 다시 들판길에 진입 [09:12]
▲ 소나무가 서 있는 풍경 [09:20]
▲ 비예기요 마을이 나타났다 [09:24]
▲ 농경지 관개 시설 [09:30]
▲ 비예기요 마을에 진입 [09:38]
▲ 비예기요 마을에 있는 산 페드로 성당(Iglesia de San Pedro) [09:39]
09:44 마을을 벗어나자 농경지와 들판 사이로 나 있는 길이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가 그 길은 다시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소나무들에게서는 아직까지는 송진을 채취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네. 송진은 뭐에 쓰지? 운동선수의 손이나 무대 바닥 등의 미끄럼 방지제로 사용된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해금, 아쟁, 얼후 등 찰현악기의 활에는 송진을 적절히 먹여줘야 좋은 소리가 난다. 인쇄 잉크와 복사기, 레이저 프린터 용지, 바니시, 접착제, 비누, 페이퍼 사이징, 청량음료, 납땜 플럭스, 실링 왁스 등을 송진에 있는 성분으로 만든다. 어허, 보기보다는 용도가 다양하구나.
▲ 비예기요 마을을 벗어나 농경지 길에 진입 [09:44]
▲ 농경지 사이로 나 있는 길 [09:47]
▲ 소나무 조림지가 나타났다 [10:04]
▲ 들판길에 진입 [10:06]
▲ 야생화가 피어 있는 풍경 [10:15]
▲ 다시 나타난 소나무 군락지 [10:23]
▲ 밀밭 뒤로 보이는 소나무숲 [10:29]
▲ 바닥에 야생화가 피어 있는 소나무숲 [10:36]
▲ 소나무 숲길 [10:43]
▲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512km [10:54]
11:00 꽤 긴 소나무 숲을 벗어나니 차도가 가로지르는데 바닥에 오른쪽으로 250m를 가라고 적혀 있다. 그래서 그렇게 진행을 했는데... 사실은 도로를 건너 곧장 가는 게 정식 루트고 내가 지금 가는 길은 우회하는 길이었다. 아무 길이면 어떤가. 나중에 다시 만날 건데 뭐. 도로 갓길을 따라가다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에 진입했다. 잠시 후 길 옆에서 빵과 오렌지 주스로 간단히 속을 채운 후 에레스마 강을 건너간다.
▲ 야생화가 피어 있는 소나무 숲 [11:00]
▲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소나무 숲길 [11:07]
▲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 [11:22]
▲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11:24]
▲ CL-602 도로를 따라 250m 정도 진행 [11:30]
▲ 도로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에 진입 [11:39]
▲ 나와 까미노 걷기를 함께 하고 있는 배낭 [11:43]
▲ 다리 위에서 빵과 오렌지주스로 점심 [11:45]
▲ 에레스마 강(Eresma River)을 건너간다 [11:58]
▲ 오른쪽으로 가면 산 에스테반(Pedrajas de San Esteban) 마을에 이르게 된다 [12:02]
12:09 또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이 지역은 정책적으로 소나무를 심었는지 사방팔방에 소나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소나무 숲길이 끝나면서 농경지 사이로 길이 이어지는데 처음으로 포도밭을 보았다. 와인 하면 프랑스가 머리에 떠오르지만 지금은 여러 나라에서 질이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에 스페인도 빠지지 않는다. 포도주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포도주 투어의 최고 장소이다. 질이 좋은 포도주를 저렴한 가격에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 한적하고 평화로운 소나무 숲길 [12:09]
▲ 한적하고 평화로운 소나무 숲길 [12:23]
▲ 한적하고 평화로운 소나무 숲길 [12:30]
▲ 한적하고 평화로운 소나무 숲길 [12:38]
▲ 잠시 농경지 길을 걷다가 [12:46]
▲ 다시 소나무 숲길을 걸어간다 [13:03]
▲ 산티아고 순례길 마드리드 길 안내문 [13:05]
▲ 마드리드 길에서 처음 만난 포도밭 [13:12]
▲ 소나무가 서 있는 풍경 [13:15]
▲ 야생화 뒤로 보이는 알카사렌(Alcazaren) 마을 [13:27]
13:34 알카사렌 마을 도착,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수염을 잔뜩 기른 순례자 한 명이 반겨준다. 이름은 미겔. 침대 하나 차지하고 샤워하고 나서 등록을 하기 위해 중앙광장에 있는 관광안내소를 찾아갔다. 등록하고, 세요 찍고, 5유로 기부하고 알베르게 출입문 열쇠를 건네받았다. 마을에 있는 식당은 문을 닫았고 슈퍼는 5시에 문을 연다고 해서 일단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알베르게가 만원이다. 침대가 모두 8개인데, 아반토 호스텔에서 만났던 커플, 어제 코카에서 만났던 커플에 자전거 순례자 한 명, 도보 순례자 한 명, 미겔까지 합이 8명. 이제야 비로소 순례길에 온 기분이 난다. 그래, 순례길 알베르게는 이렇게 순례자들이 북적거려야 제맛이 나는 거야. 걸을 때는 혼자 외롭게 걷지만 걷기가 끝나면 알베르게에 모여 짧은 시간이나마 공동생활을 하는 것, 까미노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오랜만에 이층 침대 위층에서 사람 뒤척이는 움직임을 직접 느껴보겠네. 빵과 포도주 만찬으로 잠깐 배를 채워둔다.
5시에 문을 여는 슈퍼에 들렀다. 뭐를 살까. 노브랜드 비노 한 병, 돼지고기 가공육 2팩, 빵, 캔맥주 하나. 8.62유로. 알베르게로 돌아와 상을 차리고 막 먹으려고 하는데 코카에서 만났던 커플이 동석을 요청한다. 당연히 OK. 이어서 산타 마리아에서 만났던 커플이 동참을 해서 자리를 이어가게 되었다. 각자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미국 출신의 사람들이 다 모였다. 여자 이름은 어려워서 기억이 잘 안 나고 네덜란드 남자는 에릭, 미국 남자는 로널드였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리. 영어로는 내가 제일 약한데 다른 사람들이 잘 받아줘 그냥저냥 대화를 이어갈 수가 있었다. 특히 히딩크 이야기를 꺼내자 에릭이 나보다 더 열을 올린다. 히딩크는 네덜란드에서도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단다. 순례자들 나이가 73세, 70세... 나이도 만만찮다. 그래, 이제 까미노 기분이 나네.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낸 후 침대에 누웠다. 비노의 취기가 몰려온다. 자라고 하는 건가.
● 알베르게 5
● 슈퍼 8.62
■ 13.62 / 256.05
▲ 알카사렌(Alcazaren) 시내에 진입: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497km [13:34]
▲ 산티아고 아포스톨 성당(Iglesia de Santiago Apóstol) [13:35]
▲ 산 페드로 성당(Iglesia de San Pedro) [13:43]
▲ 알카사렌 알베르게 도착 [13:49]
▲ 알카사렌 알베르게 표지판 [13:49]
▲ 알베르게 도미토리 내 침대 [13:52]
▲ 알카사렌 시청 건물 [14:37]
▲ 공립알베르게 가는 길 이정표 [14:57]
▲ 알카사렌에 있는 슈퍼마켓 [17:59]
▲ 저녁 상을 차렸다: 빵, 돼지고기, 비노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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