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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국내 섬旅行

2010.02.06. [국내 섬旅行 6] 경남 남해 일원

by 사천거사 2010. 2. 6.

경남 남해 여행기   

◈ 일시: 2010년 2월 6일(토)~7일(일) 

◈ 장소: 진주 촉석루, 삼천포어시장, 상주 은모래 Beach, 최참판댁, 시암재  / 경남 남해

◈ 회원: 청심회원 8명



2010.02.06.(토) 

08:05   오늘은 청심회에서 남해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청주 산남고 주차장에서 두 대의 차로 출발, 청원나들목에서 경부고속도로에 진입, 한 시간 조금 더 달려 대전-통영고속도로 덕유산휴게소에 도착했다. 인삼랜드휴게소는 늘 복잡하지만 덕유산휴게소는 그래도 한산한 편이다.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다시 출발, 날씨는 더없이 좋고 도로에 차들도 별로 없다. 서진주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진주성을 향해 Go! 


▲ 대전-통영고속도로 덕유산휴게소 [09:17]


10:40   진주성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구 쪽으로 가다 매표소가 있어 한 사람당 1,000원씩 주고 입장권을 끊었다. 재미있는 것은, 진주시민들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입장권을 검사하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외지 사람이 입장권을 끊지 않고 들어가면 어떤가. 상관없다. 그건 그저 양심에 달린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보지도 않는 문화재관람료를 받아 챙기는 절보다 얼마나 신선하고 정겨운가.

 

진주성안은 깨끗하게 잘 꾸며져 있고 조경도 훌륭했다.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촉석루는 남원의 광한루, 밀양의 영남루와 어깨를 견줄 만했다. 촉석루 아래를 흐르는 남강에는 '義岩'이란 바위가 있는데,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논개가 적장과 함께 남강으로 뛰어든 곳이다. 논개의 성은 朱 씨이고 태어난 곳은 전북 장수이다. 장수에 가면 논개생가지가 어마어마하게 잘 꾸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주성 관광을 마치고 와룡산 산행을 위해 백천사로 Go


진주성(晉州城)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 말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잦은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의 군사와 성인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락해 옴에 7만 민관군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해 2002년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시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진주시 남성동과 본성동에 걸쳐 있으며 사적 제11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촉석루(矗石樓)

 

문화재자료 제8호로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희,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하였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렬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追憶往事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百有餘年    일백여 년이 지났네.

幸得南江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印篆宛然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

矗石閫義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

想像愴先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命留嶺閫    영남의 병영에 보관토록 하여

以竪忠焉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후 10년 후인 1791년에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 진주성에 있는 김시민 장군 동상 [10:45]

 

▲ 정비가 잘 되어 있는 진주성 내부 [10:45]

 

▲ 촉석루와 남강 [10:47]

 

▲ 촉석루 아래를 흐르는 진주 남강 [10:48]

 

▲ 진주 남강과 산책로 [10:51]

 

▲ 진주성 촉석루 [10:54]

 

▲ 의암 앞에서 회원들 [10:59]

 

▲ 의암 위에서 박운용, 남주완 회원 [11:00]

 

▲ 촉석루에서 바라본 진주성 성벽 [11:06]

 

▲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 [11:06]

 

▲ 진주성 출입문 건물 [11:17]


12:03   백천사 주차장으로 가던 길에 점심을 먹기 위해 '소나무집'이라는 간판이 붙은 식당에 들렀다. 간판대로 마당에는 멋진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토종닭 백숙을 점심으로 시켰더니, 지금 닭을 잡아서 요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단다. 그러지 뭐. 다른 회원들이 백천사 와불 구경을 가는 동안 4명은 Go를 한 판 때렸다. 이윽고 나온 백숙 요리, 살이 연하면서도 쫄깃거리는 것이 맛이 일품이었다. 게다가 밑반찬도 괜찮고 나중에 나온 닭죽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점심 후 회원 3명은 먼저 숙소인 삼천포해상관광호텔로 가고 나머지 5명이 와룡산 산행에 나섰다.


▲ 백천사 아래에 있는 음식점 '소나무집' [12:06]


13:50   와룡산 산행기로 대체

 

18:20   산행을 마친 다음 차를 몰고 오늘의 숙소인 삼천포해상관광호텔로 달렸다. 도착해보니 호텔의 위치가 명당이다. 왼쪽으로 조금 비껴서 삼천포대교가 보이는데, 마침 해질녘이라 저녁 노을과 다리의 오색조명이 멋지게 어울려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모두 사진을 찍어 집사람들에게 전송하기 바쁘다. 호텔에 들어가 일단 샤워를 한 다음, 삼천포어시장 입구에 있는 '어촌횟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걸걸하면서도 입담 좋은 아주머니와 듬직한 덩치의 아저씨가 횟거리로 감성돔과 참돔을 권한다. 콜! 추천에 어긋나지 않게 회맛이 좋다. 곁들이로 나온 해삼, 멍게, 개불, 가리비, 키조개 등도 신선했다. 바닷가에서 회를 먹으면 이런 점이 좋다.


삼천포대교

 

교량 길이는 436m에 이른다. 섬 지역의 개발과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관광자원을 활성화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교량 형식은 하부공이 우물통 기초로 되어 있고 상부공이 3경간 강합성 사장교이다. 통과높이는 30m이고 통과선박의 규모는 5,000톤이다. 사천시 대방동 삼천포항과 남해군 창선면을 연결하는 연륙교인 창선·삼천포대교를 구성하는 4개의 다리 중 하나인데, 이외에도 초양대교, 늑도대교, 창선대교 등이 있다.


▲ 해질녘 삼천포대교의 모습[18:23]

 

▲ 어촌횟집 저녁 차림상 [19:23]


2010.02.07.(일) 

08:35   삼천포해상관광호텔을 출발, 어제 예약했던 어촌횟집으로 다시 갔다. 아침 식사 메뉴는 물회였는데 고기 양도 많고 국물 맛도 훌륭했다. 아침을 먹은 후 삼천포어시장 구경을 했다. 일요일 아침 삼천포어시장은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활어를 파는 가게, 건어물을 파는 가게, 채소를 파는 가게 등이 나름대로 손님을 맞고 있었다. 시장을 한 바퀴 돈 후, 아침을 먹은 횟집 옆에 있는 건어물 상회에서 죽방렴 멸치와 다시마 등을 구입했다. 이런 물건을 살 때에는 상호에 경매인 번호가 적힌 곳이 싸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를 닮은 삼천포대교를 건너면 초양대교가 있고, 다시 늑도를 연결하는 늑도대교가 있다. 마지막으로 늑도와 창선면을 연결하는 창선대교를 건너면 남해에 들어서게 된다. 남해에 오면 금산 보리암을 안 볼 수 없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대형주차장에 갔더니, 보리암 아래에 있는 주차장이 협소해서 차 한 대가 내려오면 한 대를 올려보낸다. 기다리고 있는 차들을 보니 백년하청이다. 이럴 때는 안 올라가면 된다. 아깝게 주차비 8,000원만 내버렸네. 보리암 대신 상주해수욕장으로 차를 몰았다.


▲ 전망 좋은 삼천포해상관광호텔 건물 [08:35]

 

▲ 어제 저녁와 오늘 아침을 먹은 어촌횟집 [09:28]

 

▲ 삼천포어시장 물고기 말리는 광경 [09:28]

 

▲ 삼천포어시장 [09:31]

 

▲ 삼천포어시장 [09:32]

 

▲ 삼천포항 모습 [09:47]

 

▲ 물고기 말리는 모습 [09:49]

 

▲ 갈매기가 날고 있는 삼천포항 [09:50]

 

▲ 삼천포항 [09:50]

 

▲ 활기 찬 삼천포어시장 [09:51]


11:10   지금은 '상주 은모래 Beach'라고 부르는 상주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금산이 아름답다. 모래밭이 말굽형으로 펼쳐져 있고 그 양쪽 끝이 적당한 높이의 구릉에 둘러 싸여 있어 파도가 세지 않다. 게다가 모래밭 뒤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해변을 따라 숲을 이루고 있어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모래는 또한 어떤가. 흙보다 고운 가는 모래는 발바닥에 묻어나지 않을 정도로 감촉이 부드럽다. 의외로 겨울바다는 조용했다.

 

상주해수욕장을 떠나 19번 국도를 타고 계속 달렸다. 남해대교를 건너면서, 2008년에 남해대교를 바라보면서 바다낚시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동에 들어서서 섬진강을 왼쪽에 두고 19번 국도를 따라 달리면서 점심 먹을 곳을 물색했다. 이 지역은 하동배와 악양대봉감, 섬진강 재첩, 참게, 은어 요리로 유명하다. 도로변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는데 개점휴업이다. 겨울철이 비수기라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상주 은모래 Beach

 

해수욕장이란 이름값을 하려면 모래와 숲과 맑은 바다를 가져야 한다. 대부분의 해수욕장들이 한 두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뿐인데, 상주 은모래 Beach는 이 세가지 조건을 완벽히 갖춘 곳이다. 더구나 전국 3대 기도도량 중의 하나인 보리암과 절경을 자랑하는 금산을 하루 코스로 다녀올 수 있다.


해마다 여름 한철만 해도 백여만 명의 손님이 찾는다는 상주 은모래 Beach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국 최고의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그러나 여름철 관광지는 이젠 옛말이다. 겨울에는 전지훈련을 오는 운동선수들로 백사장이 붐빈다. 잔디구장과 실내체육관만 갖춘다면 오히려 전지훈련장으로 더 각광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다. 봄, 가을에도 수련활동을 갖는 대학생들과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4계절 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상주면 상주마을 앞바다는 천연적인 해수욕장. 뒤편으로 한 폭의 병풍처럼 소금강산이라고 일컫는 남해 금산의 절경이 둘러싸고 있다. 금산 양편으로 쭉 뻗어 내린 산세는 두팔을 벌리고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을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반월형을 그려 2㎞에 이르는 백사장의 모래는 마치 은가루를 뿌린 듯 부드러워, 비단 위를 걷는 감미로운 감촉을 느끼게 해 준다. 백사장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송림 또한 상주의 자랑이다. 잔잔한 물결과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송림이다. 바다밑은 기복이 없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수심은 채 한길도 안될 정도로 얕기 때문에 어린이들 물놀이에도 알맞다. 가까운 곳에 강물이나 다른 바다공해에 오염될 것도 없어 바다 밑바닥 모래알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물이 맑고 깨끗하다.


백사장은 160,000㎡이고, 송림면적은 8,926㎡, 해수욕이 아니라도 송림에서 시원한 바람으로 땀을 식힐 수 있다. 바다수온은 23℃∼25℃, 수심은 0.5m∼4m로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최상의 관광지이다. 해변에서 마주 보이는 나무섬과 돌섬이 남해 먼 바다의 거센 파도를 달래듯 해안을 막고 서 있는데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상주에 저녁 늦게 도착했다면 이곳에서 숙박을 한 뒤, 새벽에 금산에 올라 일출의 장관을 보고, 금산 38경을 두루두루 돌아본 뒤, 시원한 상주 은모래 Beach의 깨끗한 바닷물에서 해수욕을 즐기거나 해변을 산책하면 최상의 여행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곳을 찾는 1백여만 명 해수욕객의 편의를 위해 남해군은 해마다 시설을 보완하여 사계절 휴양지로 만들고 있다.


▲ 상주 은모래 Beach에서 바라본 금산 [11:13]

 

▲ 상주 은모래 Beach 소나무숲 [11:15]

 

▲ 상주 은모래 Beach 소나무숲 [11:16]

 

▲ 상주 은모래 Beach 모래밭과 소나무숲 [11:19]

 

▲ 겨울철이라 호젓한 상주 은모래 Beach [11:21]

 

▲ 상주 은모래 Beach에서 회원들 [11:22]


12:40   도로 옆에 은어회와 참게정식 음식점이 있어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이곳 재첩이 대부분 중국산이란 말에 참게간장정식을 시켰다. 참게 맛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함께 나온 재첩국은 재첩 크기도 작고 씁쓰레한 맛이 나서 별로였다. 그냥 그냥 점심을 먹고 다음 행선지인 악앙면 평사리에 있는 최참판댁으로 향했다.


참게

 

바다에 가까운 하천 유역에 많고, 논두렁 또는 논둑에 구멍을 파고 살기도 한다. 식성은 잡식성이다. 가을에 살던 곳을 떠나 바다로 내려간 뒤 이듬해에 알을 낳는다. 알에서 부화한 유생은 다시 민물로 올라와 자라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가을에 바다로 내려가는 것을 발을 쳐서 잡아 식용으로 하였다. 흔히 끓였다 식힌 간장에 담갔다가 먹는데, 폐디스토마의 피낭유충이 죽기 전에 먹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근래에는 농약과 환경오염 탓에 개체수가 크게 줄어 재래식 양식이 시도되고 있다. 한국·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 하동 섬진강변 참게간장정식 차림상 [12:56]

 

▲ 점심을 먹은 음식점 [13:20]


13:35   '최참판댁'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예전에 왔을 때와 모든 것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전에는 동네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을 꼭대기에 최참판댁 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번듯한 주차장을 현대식으로 마련해놓았고, 최참판댁으로 올라가는 도로 양쪽 시골집은 모두 상가 건물로 탈바꿈 시켜버렸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의 역사적 배경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에, 모두 실망에 찬 한 마디씩을 내뱉었다. 행정을 펴는 사람들은 정말 신중하게 일처리를 해야한다. 주먹구구식 행정이나 탁상행정은 정말 없어져야 한다.

 

최참판댁 주차장을 떠나 다시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 쪽으로 달렸다. 구례를 지나 광의사거리에서 861번 지방도를 따라 성삼재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아주 황당한 일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천은사라는 절에서 문화재관람료 명목으로 도로세를 걷고 있는 것이었다. 도로에서 천은사는 한참 떨어져 있고 또 우리는 곧바로 성삼재로 올라갈 건데, 길을 막고 한 사람당 1,600원씩의 통행료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로 웃기는 일이다. 지금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도 아니고 달나라를 왔다갔다 하는 시대에, 눈 번히 뜨고 대낮에 돈을 뜯어내고 있는 것이다. 행정당국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은 이렇게 중생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을 흐뭇하게 보고 계실지 모르겠다.


최참판댁

 

화개장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박경리 소설《토지》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진 최참판댁이 자리잡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지리산 치마폭에 고즈넉히 담겨 있는 작은 마을 악양(岳陽) 평사리. 중국의 악양과 형세가 흡사하여 악양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동 평사리는 서희와 길상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입에 더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다.

 

논길을 따라 평사리로 들어가면 최참판댁의 첫 관문인 듯 우뚝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정겹게 맞이한다. 비포장 언덕길을 뒤덮어버린 회색의 아스팔트 길을 오르다 보면 평사리 언덕에는 초가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언덕 중턱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곳이 바로 최참판댁이다. 최참판댁은 소설 속의 가상공간을 '평사리' 라는 지리적, 공간적 위치로 옮겨놓은 곳이다. 외양간, 사랑방, 부엌, 우물, 정자, 안채, 뒤뜰 등... 잘 정리된 가옥들은 우리 한옥의 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사랑채의 대청마루에 올라앉으면 평사리의 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소설《토지》의 장엄함이 느껴진다.


▲ 최참판댁 가는 길 이정표 [13:40]

 

▲ 최참판댁 촬영 세트 건물 [13:45]

  

▲ 최참판댁 건물 [13:51]

  

▲ 최참판댁 안채에서 회원들 [13:55]

  

▲ 최참판댁에서 내려다본 평사리 [13:57]

  

▲ 최참판댁 사랑채: 평사리 쪽 전망이 좋다 [13:58]

  

▲ 최참판댁 사랑채에서 박운용, 남주완 회원 [14:00]

 

▲ 최참판댁 건물 모습 [14:03]


15:05   대형 인명사고가 빈번해 최고 속도가 20km인 도로를 따라 성삼재로 올라가다 시암재휴게소에 주차를 했다. 어차피 노고단을 가지 않을 거라면 이곳에서 쉬어가는 것이 주차비도 아낄 수 있어 더 낫다. 주차장에 내려서니 성삼재 왼쪽으로 백두대간 종주를 할 때 지났던 만복대가 보인다. 방향을 돌리니 방금 올라온 도로가 아래로 굽이쳐 흘러내리고 있다.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출발, 성삼재를 지나고 심원마을 가는 길을 지나 삼거리에 도착했는데, 정령치로 가는 길은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달궁계곡을 지나고 뱀사골 입구도 지났다. 인월면을 지나면 바로 88고속도로 지리산나들목이다. 편도 1차로인 88고속도로는 2차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함양갈림목에서 대전-통영고속도로에 접속하여 북쪽으로 달렸다.


▲ 시암재휴게소에서 바라본 만복대 [15:07]

 

▲ 구례에서 성삼재로 올라오는 도로 [15:16]

 

▲ 시암재에서 바라본 구례 방면 [15:16]


16:54   덕유산휴게소에 들렀다. 남주완 회원이 커피를 한 잔씩 돌린다. 아이구, 고마워라. 일요일 오후지만 차가 밀릴 정도는 아니어서, 청주까지 돌아오는데 큰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6시 30분 쯤 청주에 도착, '하얀집'에 모여 염소탕으로 저녁을 먹으며 지난 이틀 동안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이번 여행은 금산 보리암을 들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대체로 계획대로 무난하게 이루어졌다고 자평을 한다. 이번에 남해를 다녀오면서, 역시 여행을 할 때는 시간과 돈이 충분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 대전-통영고속도로 덕유산휴게소 [1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