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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산행/충북山行記

2009.06.30. [충북山行記 70] 충북 청주 우암산

by 사천거사 2009. 6. 30.

우암산 산행기

◈ 일시: 2009년 6월 30일 화요일 

◈ 장소: 우암산 353m / 충북 청주

◈ 코스: 성공회 청주 수동교회 → 우암산 정상 → 청주향교 → 성공회 수동교회 

◈ 시간: 1시간 39분 

◈ 회원: 이방주, 이효정


 


우암산과 우암산토성

 

우암산은 해발353m 정도로 작은 언덕 같은 산이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청주시내가 한눈에 보여 마치 엄청나게 높은 산에 올라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우암산을 ‘와우산’이라했다. 청주 남쪽에서 우암산을 바라보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외에도, 대모산(大母山), 모암산(母岩山), 장암산(壯岩山)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언제,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우암산(牛岩山)이라 부른다. 

 

우암산에는 2백여개에 달하는 불적(佛跡)이 있으며 삼한시대로 추정되는 우암산토성이 있다. 두 개의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는 우암산 토성은 삼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서원경(西原京)의 치소(治所:행정의 중심지)로도 추정되는 곳이다. 서쪽 벽은 등산객의 발길로 거의 허물어 졌으나 동쪽 벽은 그런 대로 잘 남아 있다. 쉽게 말해서 등산로를 따라 한바퀴 도는 코스가 바로 토성 벽에 해당된다. 등산로에는 돌멩이와 깨진 기와가 줄지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토성 위에 다시 작은 담장을 쌓은 흔적으로 여장(女墻)이라 부른다. 우암산 토성은 그 옆의 당산 토성으로 이어지는데 중간에서 피곤하면 하산할 수도 있다.


14:29   청주의 진산인 우암산을 오르는 코스는 매우 다양하다. 또 우암산에는 토성이 있다. 오늘은 오후에 시간이 있어 우암산토성을 둘러보기로 했다. 청주에 사는 사람들도 상당산성은 잘 알고 있지만 우암산토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그 존재 여부를 잘 알지 못한다. 수동에 있는 성공회 청주 수동교회에 차를 세우고 토성 답사에 나섰다. 수동교회 정문을 나서면 바로 보도블럭이 깔린 골목길이 보이는데 지금은 주택이 들어차 있지만 우암산토성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주택지를 벗어나 돌계단을 오르면서 본격적인 우암산토성 답사 산행이 시작되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이 우암산토성벽 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한 가지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와조각이었는데 사실, 우암산을 정점으로 한 바퀴 도는 성벽길 위에는 거의 모든 곳에 깨진 기와조각이 있었다. 이것은 토성 위에 기와를 얹은 담장을 쌓았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 성공회 청주 수동교회 주차장 [14:29]

 

▲ 수동교회 정문 맞은편 도로로 진입 [14:30]

 

▲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는 곳 [14:32]

 

▲ 토성 위를 따라서 나 있는 산행로 [14:36]

 

▲ 청주시민을 위한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14:46]


14:53   성공회에서 800m 떨어진, 운동시설과 벤취가 있는 평지에 도착했다. 오른쪽에 약수터 시설이 되어 있는데 물은 나오지 않는다. 왜 물이 안 나오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운동시설이 있는 곳에서 계단길을 5분 정도 올라가면 KBS 송신탑과 MBC 송신탑이 연달아 나온다. 우암산에는 송신탑이 세 개가 있는데 나머지 하나인 SBS 송신탑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명산에 혈과 맥을 끊어놓고자 쇠막대를 박았다고 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운동이 붐처럼 일어난 적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나라의 명산 정상이나 능선에 박혀 있는 송신탑은 정부에서 허가해준 쇠막대나 다름없다. 게다가 그 쇠막대를 철책으로 둘러싸 보호까지 하고 있다. 저 거대한 쇠막대는 누가 언제 뽑아내나?

 

송신탑을 지나면 바로 4거리 안부다. 왼쪽은 보현사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오른쪽은 자연학습 관찰로로 내려가는 길이다. 조금 가파른 계단길을 400m 정도 올라가니, 다시 왼쪽으로 청주대학교에서 올라오는 길이 갈라지고 있었고 오른쪽으로 꽤 넓은 평지에 각종 운동기구와 벤취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은 또한 상당산성으로 가는 길과 우암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기도 했다.


▲ 운동시설이 있는 곳의 이정표 [14:53]

 

▲ 약수터라고 되어 있지만 물은 나오지 않는다 [14:54]

 

▲ 운동시설과 쉼터가 있는 평지 [14:55]

 

▲ KBS 송신탑 [15:01]

 

▲ MBC 송신탑 [15:04]

 

▲ 보현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 [15:05]

 

▲ 계단길을 올라오고 있는 이방주 회장님 [15:10]

 

▲ 청주대학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 [15:15]

 

▲ 상당산성으로 가는 길과 우암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 [15:16]


15:23   해발 353m의 우암산 정상에는 표지석이 있다. 사진을 한 장씩 찍은 다음 정상을 떠났다. SBS 송신탑이 있는 방향으로 200m 정도 내려오면 고씨샘터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다시 조금 더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SBS 송신탑이 보인다. 그러네 산행로 왼쪽으로 밧줄이 매어져 있고 우암산토성을 보호하기 위해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우암산을 한 바퀴 돌아내려 오면서 처음 우암산토성에 대해 언급한 것을 처음 보았다.

 

조금 더 내려오니 어럽쇼, 우암산토성에 대한 자세한 안내도가 오른쪽에 세워져 있었다. 사실, 우암산토성 중에서 수동교회에서 우암산 정상까지의 부분은 거의 등산로로 이용이 되고 있기 때문에 훼손이 많이 된 상태이다. 그러나 우암산 정상에서 향교 쪽 부분은 그래도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안내문이 주로 이곳에 집중되어 있는 모양이다. 용담동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곳에 이르니 향교까지 600m가 남았다.


▲ 우암산 정상에서 이방주 회장님 [15:23]

 

▲ 해발 353m의 우암산 정상에서 [15:23]

 

▲ 정상 200m 아래에 있는 이정표 [15:26]

 

▲ SBS 송신소 앞 쉼터 [15:28]

 

▲ 우암산토성 보호 안내문 [15:32]

 

▲ 우암산토성 안내도 [15:35]

 

▲ 우암산토성 위가 산행로다 [15:41]

 

▲ 용담동으로 내려가는 길 이정표 [15:47]


15:59   청주향교 건물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청주향교는, 조선시대에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지방국립학교이다. 조선초에 처음 지어졌으며, 숙종 9년(168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재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한 6동의 부속 건물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서적 등을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이 남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다시 성공회 수동교회에 돌아왔다. 이제 차를 몰고 정북동토성으로 갈 차례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북동토성은 오근장 옆 정북동에 있기 때문에 차로 이동을 해야 한다.


▲ 청주향교 [15:59]

 

▲ 성공회 청주 수동교회 건물 [16:08]


16:33   청주 정하 사거리에서 오근장역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충북선 철도 건널목을 지나게 되고, 계속 달려 정북동에 이르면 정북동토성 표지석이 도로 왼쪽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교행이 거의 불가능한 논 가운데로 난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니 넓은 들 한가운데에 4각형의 토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세월 동안 허물어지지 않고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긴 세월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찾아내어 햇빛을 보게 했다는 것도 대단하다. 성벽 위에 올라 때 마침 몰아치는 강풍을 맞으며 이 토성이 겪었을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정북동토성

 

정북동토성은 청주시 북쪽 미호천변 평야의 중심에 위치한 평지토성인데 정확한 축조 연대를 알 수 없으나, 평지에 축조된 방형토성이라는 사실과 최근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로 보아 청동기 말기나 원삼국시대인 2∼3세기경에 최초의 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영조 20년(1744)에 상당산성의 승장으로 있던 영휴가 쓴「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견훤이 궁예의 상당산성을 탈취하고 작강(鵲江) 즉 까치내 옆에 토성을 쌓고 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토성은 남북이 약간 긴 방형이며 성안의 중심부에는 동서를 가로질러 농로가 있다. 이 농로의 북쪽은 20여호의 민가가 있고, 남쪽은 경작지로 되어 있다. 성벽은 단면이 제형으로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며 4곳 모서리 부분은 약간 높고 바깥으로 돌출되어 치성 또는 각루의 시설이 있었던 듯하다. 4면 성벽의 중간쯤에는 문지로 보이는 절단부가 있으며, 이들 가운데 동·서·북의 것은 지금도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남문지와 북문지는 좌우의 성벽이 엇갈리게 축조된 독특한 형태로서 옹성의 초기 형식으로 주목된다. 


성내의 배수문제는 서쪽이 약간 높은 지세에 따라 현재의 동문쪽에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성 안에서 빠져나간 물은 성밖을 둘러싼 해자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높이는 3.5m∼5.5m, 성벽의 윗부분폭은 2m, 성벽의 밑 부분은 11.9m 이상이다. 성벽의 길이는 동벽 185m, 서벽 165m, 남벽 155m, 북벽 170m으로 전체 675m이다. 이 토성은 1990년 12월 14일 도지정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오다가 중요성이 인정되어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

 

▲ 정북동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