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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산행/충북山行記

2008.05.24. [충북山行記 44] 충북 괴산 백마산

by 사천거사 2008. 5. 24.

백마산 산행기 

◈ 일시: 2008년 5월 24일 토요일

◈ 장소: 백마산 464m / 충북 음성군 원남면

◈ 코스: 백운사 밑 주차장 → 백운사 → 백마산 정상 → 주차장

◈ 시간: 1시간 34분

◈ 회원: 아내와 함께



해발 464m의 백마산은 원남면 마송리, 주봉리와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사찰로는 남쪽에는 백운사가 있고 북쪽에는 주봉사가 있다. 백마산을 경계로 북쪽은 남한강 수계, 남쪽은 금강 수계가 되어 충북을 지형적으로 남북으로 구분하는 경계가 되는 산이기도 하다. 백마산을 오르다 보면 백마굴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굴에서 백마가 나왔다고 해서 백마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오는 명산이다. 산에 올라 자세히 살펴보면, 이 근방의 작은 산들이 모두 백마산을 보고 엎드려 절하는 것 같은 형상을 볼 수 있으며, 주변에 있는 백운사 암자에서 나오는 석간수가 산행객의 목을 축여주고 있다.


14:53  청주 사천동 아파트 출발. 오후 한 시에 예식장을 다녀온 후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백마산을 다녀오기로 했다. 짧은 코스를 택하면 천천히 걸어도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36번 국도를 타고 도안까지 간 다음  우회전하여 사리를 지나가는 34번 국도 구도로에 들어섰다. 조금 진행하니 왼쪽에 '백마산 백운사 7km'라고 쓴 표지판이 있다. 저 길로 가야하나? 그러나 길이 너무 좁은 것 같아 처음 예정했던 길로 가기로 했다. 사리면 방축리에서 좌회전해서 노송 방면으로 달리니 오른쪽에 꽤 커다란 소매저수지가 나타났다.       

 

산행을 길게 하려면 이 소매저수지에 차를 세우고 소매리 둔터골을 경유해서 고리티 고개에 오른 다음 보천고개로 가는 길과 갈라지는 곳에서 왼쪽 길을 따라가면 된다. 짧은 코스는 주봉리, 마송리, 노송리 등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있는데 백운사를 거치려면 노송리에서 올라가야 한다. 소매저수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달리니 아스팔트 도로가 끝나고 차가 한 대 다닐 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여기다 차를 세워야 하나? 아니면 더 올라가봐? 모르겠다. 더 올라가보자. 마을 사이로 시멘트 포장도로는 계속 이어졌다. 마을을 지났는데도 계속 포장도로다. 이거 백운사까지 올라가는 거 아냐? 왼쪽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갈라지고 있다. 임도인가? 여기다 차를 세우자. 지형을 보건데, 왼쪽이 내려오는 길인 것 같다. 


백마산 이름의 유래

 

백마산의 원래 이름은 지봉산(芝峯山) 또는 소마산(小馬山)이라 불리었다. 조선 인조(1623~1649) 때 백마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지금 원남면 보천리, 보룡리, 덕정리 마을들을 다니면서 전답의 곡식을 마구 뜯어먹고 있었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수일간 말과 실갱이를 하다가 끝내는 덕정리 뒷산에서 붙잡았다. 붙잡아 보니 백마가 어찌나 사나운지 당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덕정리 꽃절의 석굴 속에 가두고 굴 앞을 막아 놓았다. 백마는 배가 고프다 못해 있는 힘을 다하여 쌓아 놓은 돌담을 차고 석굴 밖으로 뛰어나와 지봉산으로 갔다.

 

이후부터 백마는 지봉산에서 숨어서 살다가 노쇠하여 지봉산 남쪽 지금의 사리면 소매리 어은동 뒷산에서 죽었다. 소매동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묻어주니 지금 '말무덤'이라고 부른다. 그 뒤 이곳 부근 사람들은 날이 가물면 이 말무덤에 맑은 물 한 말을 길어다가 붓고 농악을 치고 말무덤을 파는 시늉을 하고 제사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한다. 지봉산에서 살다 죽은 백마 때문에 이 산을 백마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출전: 『白雲寺誌』 


15:40  도로 한 쪽 공터에 차를 세운 다음 산행에 나섰다. 추측컨대, 시멘트 포장도로가 백운사까지 연결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저 산 위에 보이는 콘도같은 건물은 뭐야? 백운사 옆에 무슨 수련원이 있나? 지금 공사 중인가? 분명히 절집은 아닌 것 같고 가봐야 알 것 같네. 조금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잡초에 묻힌 '제3주차장'이라고 쓴 팻말이 보이고 그 옆으로 시멘트로 포장을 한 공터가 있다.

 

제3주차장? 그렇다면 제2, 제1주차장도 있다는 말인데, 무슨 주차장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 그렇게 방문객이 많단 말인가? 그런데 왜 팻말이 잡초에 묻혀 있을까? 예전에는 찾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없다는 표시인가? 알 수 없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생각했던 대로 제1주차장까지 있는데 모두 잡초에 묻혀서 사용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 참 묘한 일이네.


▲ 백운사 아래에 있는 주차장 입구에 주차 

 

▲ 백운사를 향해 시멘트 포장도로를 걷고 있다 [15:42] 

 

▲ 잡초에 묻힌 제3주차장 표지판 [15:45] 

 

▲ 예쁘고 폼도 잡아보고 [15:46] 

 

▲ 잡초에 뒤덮인 제1주차장  


15:50  충북문화재자료 18호인 백운사 부도군이 도로 오른쪽에 있다. 모양이 비슷비슷한 부도 다섯 개가 일렬로 서 있는데 특이하게도 네 번째 것은 원형이 아니라 장방형이었다. 부도군 위로 정신병자 수용소 같은 회색 건물이 보인다. 묵은 때가 묻은 부도들이 이렇게 있는데 웬 현대식 콘도 건물이야. 영 이해가 안 되네. 고색찬란한 부도군 위의 짓다 만 콘크리트 콘도식 건물은 부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백운사 부도군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백운사에 자리잡고 있는 이 부도밭에는 모두 5기에 이르는 부도들이 놓여 있다. 모두 낮은 받침돌 위에 종모양의 탑몸돌을 올렸으며, 그 중 4기에는 4각 지붕돌이나 옛 가옥에서 보이는 독특한 모습의 지붕돌을 얹고 있다. 지붕돌은 각 귀퉁이마다 용머리 장식을 두고,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는데, 낙수면에 기와골이 생략되어 시대가 조금 떨어짐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1955년 송운제 스님이 세운 1기를 뺀 나머지 4기는 모두 조선시대에 세운 것이라 한다. 


▲ 백운사 부도 

 

▲ 백운사 부도  


15:53  백운사에 올랐다. 차가 여러 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너무 조용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콘도식 건물은 한 스님의 무리한 불사가 낳은 우매함과 욕심의 상흔이었다. 백운사 입구에서 바라보니 마치 큰 사업을 벌이려다 부도라도 난 듯하다. 어마어마한 불사를 진행하다가 중단되어서 방치되어버린 건물, 그 거대한 건물은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왔다. 무슨 용도로 지은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백운사 콘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흉물스러운 건물은 어떻게 해야할까? 다행스럽게 2005년 초부터 징관(澄觀)스님이 주변을 정비하고 있다고 하니 머지않아 입구에 있는 5기의 부도에 걸 맞는 좋은 도량으로 다시 그 모습을 갖추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부도군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백운사 경내인데, 경내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전각들과 불보살상 그리고 석물들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조화롭게 위치해 있다. 오른쪽으로 세워진 5층 석탑과 범종각을 지나면 정면으로 용왕궁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흡사 배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피안의 세계로 들게 하는 '반야의 용선'이라고 한다. 용왕궁을 지나고 배바위를 지나면 저 아래서부터 보였던 관세음보살상 앞이 되고 관세음보살상 뒤쪽으로 약사전이 보인다.

관세음보살상을 지나 올라가는 약사전은 누각형태로 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 들어서게 되는 2층의 약사전엔 불상이 보이지 않는다. 여느 절들의 적멸보궁처럼 법당 내 어디에도 모셔진 불상이 보이질 않는다. 불상이 봉안되어있어야 할 정면은 통유리로 되어있고, 불단엔 공양물들만 올려져 있을 뿐 당연이 모셔져 있어야 할 약사여래부처님이 보이질 않는다. 두리번거리다 보면 통유리를 통해 산상 쪽에 마애약사여래입불이 보인다. 약사전을 내려와 배바위 앞에서 시작되는 108 돌계단을 올라서면 약사전에서 합장예배를 올렸던 마애약사여래불 앞으로 가게 된다. 몇 번 꺾어지고 굽어지는 108계단은 잘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되어있고, 군데군데 연화무늬가 양각된 치장석이 양옆으로 보호대를 이루고 있었다. 

약사여래불이 조성된 그 바위를 주불바위라고 하면 그 바위 위로는 비바람 막아줄 삿갓형태의 바위가 놓여있고, 좌우로 협시불 바위가 있다. 마애불은 1988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니 그 연대는 미미하나 규모나 섬세함이 남다르다. 석질 또한 고품질의 화강암으로 보이니 세세년년 세월을 더해가며 천년만년 불법을 전할 게 분명하다. 약사여래불은 보통 왼손에 약병을 들고 있고, 큰 연화(蓮花)에 올려진 모습으로 조성되며 일명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른다. 백운사 마애약사여래불 또한 전형적인 그 모습, 연꽃 받침에 왼손에 약병을 든 그런 모습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한 많은 마애불들이 대개는 미륵불이거나 아미타불이다, 간혹 관세음보살상도 있지만 약사여래입불상은 흔치 않다. 


백운사

 

대한불교법화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1321년(고려 충숙왕 8) 창건 당시에는 대흥사(大興寺)라고 하였으며, 조선 영조(재위:1724∼1776년) 때 승려들이 힘 자랑을 하다가 살인을 하는 일이 벌어져 폐사되었다고 한다. 1930년에 하장우(河長雨)가 초막을 짓고 백운사라고 하였으며, 1933년 봉국사(奉國寺) 승려 송운재(宋雲齋)가 법당을 지었다. 1956년 법당을 중수하고, 1960년 불에 탄 것을 곧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5기의 부도가 유명하다. 이들 부도는 괴산 백운사 부도군으로 1997년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 1기는 1955년에 세운 송운재의 것이고, 나머지 4기는 대흥사 터 산제당골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4기 중에는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것도 있다. 한편 1941년에 발굴된 15cm의 금동여래입상과 1952년에 발굴된 10cm의 철제여래좌상은 분실되었다. 


▲ 백운사에 있는 공사가 중단된 콘도식 건물 

 

▲ 백운사 입구의 모습 

 

▲ 백운사 법당 

 

▲ 백운사 관세음보살상과 약사전 

 

▲ 백운사 약사전 아래 배바위에 앉아서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같은 자세로 기도하는 보살상 

 

▲ 꽤 오래된 듯한 마애불 

 

▲ 1988년에 만들어진 마애약사여래입불상 

 

▲ 백운사 산령각 

 

▲ 산령각 옆에 있는 공사가 중단되어 폐가가 된 절집(선원) 


16:07  주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이 어딘지 몰라 일단 산령각 위로 올라붙었다. 주능선까지의 거리가 얼마 안 되니 어디로 올라도 쉽게 주능선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산령각 위 언덕으로 올라가니 산행로가 나 있다. 그러면 그렇지. 주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은 조금 경사가 있었지만 거리가 짧아 큰 힘이 들지 않았다.


▲ 산령각 위 언덕에 올라 물 한 모금 마시고 

 

▲ 주능선으로 올라가는 길  


16:14  주능선에 도착. 오른쪽은 보광산에서 보천고개로 이어지는 한남금북정맥에서 분기되어 오는 길이고 왼족은 백마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잠깐 내리막길이다가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세상이 조용하다. 아마 오늘 백마산에는 우리만 왔을 것 같다. 하긴 시간적으로 보아도 산에 올 시각이 아니다. 5분 정도 걸어가니 4거리 안부가 나타났다.


▲ 주능선으로 오르고 있는 모습  


16:19  안부 4거리에 도착. 산행로 왼쪽에 있는 소나무에 이정표를 매달아 놓았는데, 오른쪽은 주봉리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왼쪽은 백운사에서 올라오는 길로 되어 있다. 아, 이 왼쪽 길이 백운사에서 올라오는 정식 산행로구나. 곧바로 가는 길은 백마산 정상으로 가는 길로서 15분 정도 걸린다고 되어 있다. 정상 오름길의 경사가 급한 곳에는 통나무로 계단을 놓았는데 언제 설치한 것인지 나무가 썩어서 밟으면 부서져 내렸다. 그래서 그런지 밧줄도 설치되어 있다. 백마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꽤 급했다. 이럴 때는 쉬엄쉬엄 올라가면 된다.


▲ 4거리 안부를 지나고 있다 

 

▲ 4거리 안부에 있는 이정표 

 

▲ 나무계단이 오래 되어 썩었다 [16:21] 

 

▲ 가파른 나무계단 길을 오른 후 휴식 [16:23] 

 

▲ 다시 가파른 나무계단 길이 이어지고 [16:24] 

 

▲ 나무계단 길 중간에서 잠시 휴식 [16:27] 

 

▲ 경사가 급해 밧줄이 매어져 있다 [16:33]  


16:38  벤취 두 개가 있는 쉼터에 도착. 이 벤취도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아내가 앉으니 한쪽이 들리면서 내려 앉으려고 한다. 그것 참 낙상할 뻔 했네. 여기는 괴산군에 속하나 아니면 음성군에 속하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신경을 좀 써야 할 것 같네. 쉼터에서는 음성군 원남면과 음성읍 쪽이 잘 보였다. 36번 국도와 주봉저수지도 보이고.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 부서져 형체만 남아 있는 벤취가 여러 개 보였다. 보기에 좋지가 않다. 세상만사는 끝이 좋아야하는데.


▲ 나무가 썩어 부서지는 벤취에 앉아 

 

▲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원남면 방면 

 

▲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음성읍 방면  


16:41  백마산 정상에 올랐다. 음성군에서 설치한 정상 표지석이 있고 커다란 바위 양쪽으로 돌탑이 있었다. 정상에서는 백운사가 들어서있는 산비탈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짓다 만 회백색의 백운사 콘도가 그림을 망쳐놓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설사 완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절대로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수도고행을 해야하는 절에 무슨 대형 콘크리트 4층 건물이 필요하단 말인가? 레저와 관광에 사용될 콘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돈과 명예를 좇다 보면 저런 부작용이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잠깐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소매저수지에서 백운사로 들어오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커다란 흰 뱀처럼 구불거리고 있고, 눈을 들면 보광산에서 보천고개로 이어지는 한남금북정맥 능선과 그 정맥 능선에서 백마산으로 분기된 능선이 뚜렷하게 보인다. 기념사진을 찍고 정상 한쪽 그늘에 앉아 토마토를 한 개씩 먹었다. 하산 시작. 정확한 길은 모르겠지만 대충 방향을 잡고 내려가면 될 것 같다.


▲ 정상 표지석과 돌탑이 있는 백마산 정상의 모습

 

▲ 백마산 정상에서 하늘을 향해 팔을 뻗다 

 

▲ 백마산 정상에서 표지석과 함께 

 

▲ 백마산 정상에서: 웃으면 복이 와요 

 

▲ 백마산 정상에 우뚝 서보다 

 

▲ 백마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백운사 

 

▲ 백마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소매저수지 

 

▲ 백마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남금북정맥 

 

▲ 백마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남금북정맥 


16:49  오늘 처음으로 보는 삼거리 이정표가 나왔다. 오른쪽은 마송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쪽은 등산로 길이다. 어디로 가는 등산로 길이란 말인가? 이상한 이정표네. '마송리 길'은 아니니 일단 '등산로 길'로 가보자. 조금 내려가니 삼거리인데 여기에 있는 이정표에는 오른쪽으로 그냥 '등산로 길'이라고만 적혀 있다. 지형적으로 보아 갈림길이 나오면 무조건 왼쪽 길을 택해야 한다. 왼쪽으로 Go! 길이 번듯하고 조금 아래에 밧줄이 매어져 있는 것을 보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인 모양이다. 산행로 주변에 취나물이 많은데 억세다. 다시 갈림길, 여기서도 왼쪽으로 Go! 제대로 내려가는지 모르겠다.


▲ 마송리 하산길 갈림길 이정표 

 

▲ 등산로 이정표 [16:50] 

 

▲ 경사가 심하지 않은 하산로의 소나무들 [16:51] 

 

▲ 경사가 조금 급한 곳에는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16:52] 

 

▲ 급경사 길을 내려오고 있다 [16:53]

 

▲ 삼거리 갈림길에서 [17:00]  


17:08  마침내 숲에서 벗어났다. 커다란 무덤이 층층이 있는 곳을 내려오는데 망초대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가물어서 그런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제초제 때문이었다. 곡물을 심을 곳도 아닌데 여기다 왜 제초제를 뿌렸을까? 무덤 때문인가? 제초제를 뿌리면 풀이야 죽겠지만 땅으로 스며들어 토양을 오염시키고 亡人에게도 좋지 않을 텐데. 그런데 이리로 내려가면 어디가 나오나? 무덤이 끝나면서 하얀 시멘트로 포장이 된 공터가 나타났다. 주차장이었다. 내려서니 내 차가 보이고 흉물스런 백운사 콘도도 보인다. 대충 길따라 내려온 것이 정확하게 산행기점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것 참, 기분 좋으네.


▲ 숲에서 벗어나며 만세! [17:08] 

 

▲ 제초제로 인해 고개를 숙인 풀 [17:10] 

 

▲ 주차장으로 씩씩하게 내려오고 있다 [17:13] 

 

▲ 주차장 입구에 세워놓은 차 뒤로 백운사 콘도 건물이 보인다 [17:13] 


17:14  주차된 곳에 도착. 아까는 못 보았던 하얀 찔레꽃이 눈에 들어온다. 무슨 사물이든 마음이 조급하거나 불안하면 잘 안 보인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보인다. 산행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오르려는 마음에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산이 끝날 때 쯤이면 모든 것을 마쳤다는 안도감에 느긋해져 사물이 눈에 잘 들어온다. 세상살이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마을로 나오는 길 왼쪽에 꽤 넓은 함박꽃밭이 펼쳐져 있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꽃이 그냥 갈 수 있나? 함박꽃 속에 묻혀 누가 더 예쁜가 견주어보았다. 승자는? 판단에 맡긴다.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는 아까 표지판에 적혀 있던 길(백마산 백운사 7km)을 이용해보았더니 차량 통행도 없고 시간적으로도 많이 단축이 되었다. 백마산은, 높이나 산행 거리로 보아, 산행에 크게 어려운 산은 아니다. 토요일 오후 시간만으로도 산행이 가능한 그런 산이다.


 작약과 모란과 목란 

 

작약은 미나리아재비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 꽃 모양은 모란과 비슷하다. 5~6월경에 빨강, 흰색 등의 탐스러운 꽃이 줄기와 가지 끝에 한 송이씩 피고, 수술은 많으며 노란빛이다. 뿌리는 중요한 한약재로 뿌리의 색이 흰 것을 백작약, 붉은 것을 적작약이라고 한다. 백작약은 보혈, 진정제의 약재로 쓰이고, 적작약은 보양, 파혈, 통경 등에 귀중한 약재로 쓰인다. 모란은 나무고, 작약은 풀이다. 꽃의 모양이나 색깔과 크기 및 피는 시기가 비슷하고 잎 모양도 닮아 있어서 흔히 모란과 작약을 혼동하기도 하지만, 모란은 나무, 작약은 풀이라는 것이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모란은 키는 1~2m 정도 자라며 가지가 굵다. 자색의 꽃이 5월에 가지 끝에 피고 지름이 15~20㎝에 이른다. 고스톱 하는 사람들은 모란을 6목단이라고도 하는데 많은 원예품종이 만들어졌다. 

 

작약의 꽃은 함박꽃나무(산목련) 꽃과 닮아 함박꽃이라고도 하지만, 원래 함박꽃나무의 꽃인 함박꽃은 색깔이 뽀얀 우유색에 난을 닮았다고 해서 북한에서는 목란이라고도 한다. 북한의 국화가 바로 목란(학명 Magnolia Siebolidii)이다. 목련과의 잎이 지는 떨기나무로 남한에서는 산목련 또는 개목련으로 불려왔으며 일본에서는 오야마렌게라고 부른다. 목란이라는 이름은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꽃을 난이라 하는데 나무에 피는 란”이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북한은 밝히고 있다. 이 꽃은 김주석이 평양 창덕학교 재학시절인 1924년 봄 수학여행을 갔던 황해도 정방산에서 처음 발견했고, 1964년 5월과 8월 다시 정방산을 찾았다가 옛 기억을 되살리면서 국화로까지 부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목란은 1972년 3월 제정된 북한 최고훈장인 김일성훈장에 새겨져 있으며, 1982년 건립된 주체사상탑의 기단벽과 탑신받침대 등에도 부각돼 있다. 북한이 목란을 국화로 정식 지정한 것은 1991년 4월 10일이다.


 ▲ 도로변 찔레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다 

 

▲ 함박꽃 화원 [17:19] 

 

▲ 함박꽃보다 더 예쁘게 웃어요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