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유배길 / 집념의 길
◈ 일시: 2018년 9월 23일 금요일 / 흐림, 바람
◈ 장소: 추사유배길 / 집념의 길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코스: 추사유배지 → 한남의숙터 → 정난주 마리아 묘 → 남문지못 → 단산과 방사탑 → 대정향교 →
추사유배지
◈ 거리: 8.74km
◈ 시간: 2시간 2분
09:16 오늘은 추사유배길 중에서 집념의 길과 인연의 길을 답사하기 위해 아파트를 나섰다. 집념의 길과 인연의 길은 둘 다 시작점이 추사유배지이고 더군다나 집념의 길이 원점회귀 코스라서 함께 답사를 하기에 아주 유리하다. 반참모르 버스정류장에서 9시 38분에 출발하는 202번 버스에 올랐다. 인성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대정성지 성벽을 바라보며 추사유배지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 9월 12일 천주교 순례길 정난주 길을 걸을 때 들렀던 곳이다. 집념의 길 답사 시작, 정난주 마리아 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 강정동 아파트 출발 [09:16]
▲ 반참모르 버스정류장 [09:22]
▲ 인성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10:19]
▲ 대정성지 성벽 [10:21]
추사 유배지
대정현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와 9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조선시대 형벌에는 태·장·도·유형과 함께 사형이 있었는데, 유배에 해당하는 유형은 사형을 면한 형벌로 죄가 무거울수록 임금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제주도로 유배를 오면 제주관아가 있던 제주목에 머무르는 것이 대부분이나, 추사는 제주목에서도 한참 떨어진 대정까지 유배를 왔으니 정쟁이 극심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겠다.
경주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북학의 대가이던 박제가를 스승으로 두었으며 문과에 급제한 후 규장각을 거쳤고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을 지내며 소위 ‘잘 나가던’ 시절을 보냈으나 55세 되던 해 안동 김씨 세력과 벌이던 정쟁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오게 된다. 유배 중에서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위리안치’형을 받는데 이는 지금도 담장을 두르고 있는 가시달린 탱자나무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인이 귀했던 제주이기에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알리던 인물인 추사에게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추사가 머물렀던 원래 집은 제주 4·3항쟁 때 불타버려 후에 복원을 했는데 제주도 민가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추사는 이곳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마음자세가 변하게 되는데 그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제주도로 유배를 오면서 벗이었던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흥사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 대흥사에 걸려 있던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글씨를 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떼버리라고 했다 한다. 하지만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곳에 들러 예전에 자신이 잘못 보았다며 다시 걸어달라고 하고 자신의 글씨는 뒷방에 걸어달라 부탁을 하였으니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겸손한 마음을 만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독특한 예술성을 가진 추사체와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그림인 세한도를 제주에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추사유배지 안거리 [10:27]
▲ 제주 추사관 [10:27]
▲ 집념의 길 안내판 [10:28]
▲ 집념의 길 송계순 집터 [10:32]
▲ 익살스러운 건물 벽화 [10:37]
▲ 대정지서 옛터 추모 표지석 [10:42]
10:42 대정지역의 대표적인 3대 의숙 중 하나였던 한남의숙터를 지났다. 길 왼쪽으로 멀리 모슬봉이 보인다. 천주교 대정성지 가는 길 입구에 도착했다. 집념의 길은 여기서 대정성지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 묘를 들렀다오도록 정해져 있었다. 7월 26일 제주도에 온 이후로 정난주 마리아 묘를 찾은 것이 이번으로 세 번째다. 고개 숙여 참배를 한 후 다시 차도로 나와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걸어간다. 5분 후 차도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마을길에 들어섰다.
한남의숙터
대정지역의 대표적인 3대 의숙 중의 하나로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현대교육기관인 한남의숙이 세워졌던 곳. 보성초등학교를 따라 걸어가다 대정성벽을 지나면 오른편에 과수원이 나온다. 바로 1925년 4월 강문석이 설립한 현대교육기관인 한남의숙이 세워졌던 곳이다. 한남의숙은 대정지역의 대표적인 3대 의숙 중의 하나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1928년 폐교된다.한남의숙을 세운 강문석은 추사의 두 번째 적거지 주인인 강도순의 증손자이다. 강도순과 형제들은 추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강문석은 그런 집안의 영향으로 사회정세나 교육에 대해 일찍부터 눈을 떴다.
▲ 집념의 길 한남의숙터 안내문 [10:42]
▲ 길 왼쪽으로 멀리 모슬봉이 보인다 [10:51]
▲ 비닐 하우스 사이로 나 있는 길 [10:56]
▲ 대정성지 가는 길 표지판이 보인다 [10:59]
▲ 정난주 마리아 묘를 들른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11:04]
▲ 천주교 대정성지 표지판 [11:06]
▲ 천주교 대정성지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 묘 [11:08]
▲ 차도를 따라 모슬봉 쪽으로 진행 [11:16]
▲ 차도에서 왼쪽 갈림길에 진입 [11:21]
11:22 마을길을 따라 계속 걸어간다. 길 왼쪽으로 감자밭이 보였다. 가을감자가 밭에서 아주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1132번 도로를 건너 조금 걸어가자 오른쪽에 '남문앞물(남문지)'가 자리 잡고 있는 게 보였다. 전설이 깃들어 있는 남문앞물 가운데에는 쉼터용 정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집념의 길이 대정향교 쪽으로 향했다.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사탑과 단산 그리고 산방산, 여러 번 보아서 그런지 이제는 눈에 아주 익숙한 모습들이다.
▲ 추사유배길 표지판 [11:22]
▲ 마을도로를 따라 진행 [11:26]
▲ 밭에서 가을감자가 자라고 있다 [11:33]
▲ 1132번 도로를 건너간다 [11:39]
남문앞물
대정현성은 태종 서기1416에 설치되었으며 외부의 침략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유신현감은 축성을 건의하여 태종 서기 1418에 축성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무렵 지나는 노승이 사방을 살피더니 축성감독에게 그대로 작업을 하면 백성들이 피해가 많겠다고 하고 길을 재촉했다. 감독이 즉시 유신헌감에게 고하자, 현감은 그 노승을 모셔 오너라 명하니 감독이 노승을 모셔왔다. 현감이 앞서 하신 말씀이 왠말이요 하자 노승은 서남쪽에 있는 산(모슬봉)에 화기가 비치니 남문 앞에 연못을 파서 화기를 누르면 백성들이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하자 현감은 축성작업을 중단시키고 연못을 판 후 축성을 하였다. 그러자 축성을 마칠 때까지 마을에 아무런 재앙이 없었다고 한다.
▲ 남문앞물 가운데에 설치되어 있는 쉼터용 정자 [11:40]
▲ 남문앞물(남문지) 표지석 [11:41]
▲ 대정향교 가는 길 이정표 [11:43]
▲ 여기서 대정향교까지 갔다와야 한다 [11:52]
▲ 방사탑과 단산이 보이는 풍경 [11:54]
▲ 단산 칼바위능선과 산방산이 보이는 풍경 [12:01]
12:06 추사유배길 안내도가 서 있는 대정향교 주차장에 도착했다. 벌써 몇 번째 왔는데도 주차장에 차가 세워져 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대정향교 관리인 조차도 주차장에 차를 세우지 않고 문 앞에 세워 놓는 실정이다. 대정향교에서 발걸음을 돌려 다시 추사유배지로 돌아왔다. 일단 집념의 길 걷기를 마치고 인연의 길을 떠나기 전에 주차장에 있는 의자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오늘 점심은 빵과 감귤 세 개, 소박해 보이지만 이 정도로 충분하다.
▲ 대정향교 주차장에 서 있는 추사유배길 안내판 [12:06]
▲ 대정향교 [12:07]
▲ 용천수 세미물 [12:09]
▲ 산방산과 단산이 보이는 풍경 [12:21]
▲ 1132번 도로 옆에 있는 이정표 [12:27]
▲ 추사유배지 주차장에 있는 의자에서 점심 식사 [12:37]
▲ 추사유배지 주차장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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