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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국내 旅行

2010.06.06. [국내旅行 62] 가톨릭 군위 묘원 및 선산 관광

by 사천거사 2010. 6. 6.

가톨릭 군위 묘원 및 선산 관광

◈ 일시: 2010년 6월 6일 일요일 

◈ 장소: 가톨릭 군위 묘원 / 경북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 회원: 동서 부부, 장모님, 아내


 


09:25   오늘은 경북 군위에 있는 가톨릭 묘원을 방문하는 날이다. 이 묘원에는 장인 어른의 묘소가 있다. 밀양에 사는 동서 부부가 장모님을 모시고 올라와 묘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작년에는 5월 5일에 들렀었는데 올해에는 한 달 정도가 늦어졌다. 서청주나들목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청원-상주 고속도로를 달렸다. 날은 화창하다 못해 무덥고 도로는 한산하다. 시간적으로 그럴 때다.


▲ 큰 외손자 종인이 [08:07]

 

▲ 작은 외손자 종현이 [08:09]


10:11   화서 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아내는 카페라떼 나는 원두. 휴게소를 떠나 다시 도로에 진입했는데 이상하게도 도로에 차들이 별로 없다. 그런데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그만 선산나들목을 지나치고 말았다. 이런! 하는 수 없이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경유하여 군위로 올라갔다. 우리나라는 고속도로 시설이 무척 잘 되어 있어 거의 모든 곳에 쉽게 닿을 수 있는데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군위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68번 지방도를 이용 용대리까지 달렸다. 용대교에서 우회전해서 계속 올라가면 가톨릭 군위 묘원이 나온다.


카페라떼

 

카페라떼(caffe latte)는 커피와 우유라는 뜻을 지닌 이탈리아어로서 커피와 뜨거운 우유를 곁들여 마시는 커피의 일종이다. 이탈리아어에서 '라떼'라는 것은 우유를 의미하는 단어다. 카페라떼는 전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커피의 종류 중 하나로서 카푸치노, 에스프레소와 함께 가장 흔한 종류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 카페라떼는 아침에만 먹는 음료이다. 꼭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커피를 증류해서 컵에 우려내 먹은 다음에 데운 우유를 첨가한다. 이탈리아 외에 대개 라떼라는 것은 1/3의 에스프레소에 나머지를 우유를 넣는 것으로서 우유가 5mm정도 맨 위에 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카푸치노와 흡사하다. 다만 두 종류의 차이는 우유와 에스프레소, 거품의 차이이다.


▲ 청원-상주 고속도로 화서 휴게소 [10:12]

 

▲ 그렇게 커피가 좋은가? [10:17]

 

▲ 아이스 카페라떼 한 잔 [10:17]


12:10   가톨릭 군위 묘원 장인 어른 묘소가 있는 3단지로 올라가니 단지 옆 공터에 차가 가득하다. 동서 부부와 장모님이 반갑게 맞아 주신다. 일단 장인 묘소에 들러 간단한 제를 올린 다음 공터에 펴놓은 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동서 부부가 준비해온 소고기를 구워 맛있게 점심으로 먹은 후 처 작은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 처 숙부 묘소는 6단지 13구역에 있었다. 두 분 다 마나님이 묻힐 자리를 옆에 비워 놓았다. 성묘를 마치고 묘원 출발.


가톨릭 군위 묘원

 

중앙고속도로 군위나들목에서 내려 금성 지역으로 향하다 보면 경북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산69-1에 위치한 가톨릭군위묘원(관리소장 최상배)을 찾을 수 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 1986년 설립한 이 곳은 매장식과 납골식으로 함께 운영되는 한국 교회 최초의 납골 시설이다. 2001년 5월 리모델링 해 대지면적 7726㎡, 연건평 1900㎡, 지상 3층 규모를 갖춘 군위묘원 납골당은 1~2층 1만944기의 봉안함을 안치할 수 있으며, 3층에 성당과 분향실 등이 마련돼 있다. 고인이 된 신자 대상으로 운영되며, 비신자의 경우 가족 중 신자가 있는 고인만이 이 곳에 안치될 수 있다. 사용기간은 봉안일로부터 30년이며, 15년씩 2회 연장(재계약) 가능하다.


▲ 가톨릭 군위 묘원 간이 주차장 [12:12]

 

▲ 장인 어른이 묻혀 있는 묘원 [12:12]

 

▲ 묘소 옆에 으아리가 피었다 [12:14]

 

▲ 장인 어른 묘소에서 [12:23]

 

▲ 장인 어른 묘소에서 [12;25]

 

▲ 주차장 한 옆에서 점심 준비 [12:33]

 

▲ 처 작은 아버지 묘소 [12:59]

 

▲ 처 작은 아버지 묘소에서 [14:03]

 

▲ 가톨릭 군위 묘원 [14:03]


14:22   가톨릭 군위 묘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갈라지는 용대교 삼거리 오른쪽 언덕에 김수환 추기경 생가가 복원이 되어 있었다. 부엌 하나와 두 칸짜리 방으로 이루어진 초라한 초가에서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가 태어난 것이다. 하긴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을라고. 생가를 둘러본 후 동서 부부와 작별을 하고 68번 국도를 따라 선산 쪽으로 달렸다. 집에 가기에는 시간이 이른 것 같아 선산에 있는 몇 군데 관광지를 둘러보기로 했는데, 첫 번째 목적지가 선산 낙산리 고분군이었다.


▲ 아주 소박한 故 김수환 추기경 생가 [14:25]

 

▲ 故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서 [14:26]

 

▲ 故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서 [14:28]

 

▲ 故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서 [14:28]

 

▲ 故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서 두 자매 [14:29]

 

▲ 故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서 [14:29]

 

▲ 故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서 [14:30]

 

▲ 故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서 [14:30]

 

▲ 故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서 세 모녀 [14:30]


15:15   선산 낙산리 고분군 주차장에 도착했다. 도로 양쪽 구릉지대에 커다란 무덤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장난이 아니다. 모두 205기나 된다나. 무덤의 크기가 커서 그렇지 마치 공동묘지에 온 것 같다. 사실, 시대가 달라서 그러지, 가야와 신라 시대의 공동묘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 오랜 세월 동안 크게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고분군 주차장을 떠나 금오서원을 찾아가는 길, 낙동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서 말로만 듣던 4대강 사업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넓은 낙동강 바닥에 수 많은 포크레인과 덤프 트럭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엄청 났다. 강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내버려두어야지 저렇게 인위적으로 물길을 잡는게 과연 바람직한지 모르겠다. 인간이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지 순리를 역행하게 되면 해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뻔한 이치인데도 그것을 모르니 안타까울 뿐이다.


선산 낙산리 고분군

 

3세기에서 7세기 중반기의 가야와 신라의 무덤들로 총 205기에 달하며, 낙동강 동쪽에 인접한 해발 700m 내외의 광범위한 구릉지대에 분포한다. 무덤을 덮은 봉분은 원형과 표주박형으로 되어있고, 내부는 널무덤(토광묘), 독무덤(옹관묘), 돌덧널무덤(석관묘)으로 되어있다. 유물은 굽다리접시(고배)를 비롯한 토기류와 치레거리(장신구), 고리자루 큰칼(환두대도) 등의 철기류가 발견되었다. 이 무덤들은 당시 이지역에 존재한 세력의 크기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사적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선산 낙산리 고분군 [15:17]

 

▲ 선산 낙산리 고분군 [15:18]

 

▲ 선산 낙산리 고분군 [15:19]

 

▲ 선산 낙산리 고분군에서 [15:21]

 

▲ 선산 낙산리 고분군에서 [15:23]


15:40   금오서원은 선산읍 원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대문이 굳게 잠겨져 있었다. 선산읍에서 가볼 만한 곳이라고 광고를 하면서 왜 문을 꼭 잠궈 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관리 때문이겠지. 그런데 정말 관리 문제 때문에 개방을 하지 않는다면 선산읍 행정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건 행정편의주의요 무사안일이자 직무유기다. 금오서원이 일반 개인의 주택도 아니고 적어도 시도기념물이 아닌가. 에라, 시도기념물이 대수인가, 국보나 보러 가자.


금오서원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길재(1353∼1419)는 정몽주·이색과 함께 고려 후기에 절의를 지킨 ‘고려삼은(三隱)’으로 불리는 학자이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는 것을 알고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세자 이방원(태종)이 관직에 임명하였으나 거절하고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금오서원은 선조 3년(1570)에 금오산 자락에 세웠으며 선조 8년(1575)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5년(1602)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고, 광해군 1년(1609)에 다시 사액되었다. 이 때 점필재 김종직·신당 정붕·송당 박영·여헌 장현광을 추가로 모셨다. 서원 경내에는 위패를 모시고 있는 상현묘를 비롯하여 정학당, 동재와 서재, 읍청루 등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철거되지 않은 서원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시도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다.


▲ 금오서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15:42]

 

▲ 굳게 닫힌 금오서원 대문 앞에서 [15:47]


16:12   국보 제310호인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이 있는 곳에 도착을 했는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가니 서황사(옛 이름은 죽장사)라는 절 뜰에 오층석탑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봉산 아래 고즈녁이 자리잡은 서황사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국보가 있는 절 치고는 너무 한산하다. 아니 사실 절은 이래야 되는 게 아닌가? 참배 목적이 아니라 관람 목적으로 사람들이 북적되는 절은 원래의 절의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오층석탑 구경을 잘 하고 바로 옆에 있는 선산나들목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서황사

 

서황사(죽장사, 법륜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을 하여 여러 연대를 걸쳐 중수해 오다가 몽고병란 때 소실되어 없어지고 오층석탑만 남아 있었다. 1952년에 작은 삼 칸 집에 부처님을 모시고 살던 계기로 지금의 서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대웅전에는 삼존불(석가모니불, 보현보살,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고 외 5포, 내 7호의 팔작집을 하고 있으며, 도량 가운데에 있는 오층석탑(높이 10m, 국보 제130호) 감실 안에는 작은 약사여래불이 당당하게 기품어린 모습으로 앉아 있다. 원각당에는 천불이 모셔져 있고 삼성인(칠성, 산신, 용왕)을 모신 삼성각이 있다.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선산 읍내에서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죽장사터에 있는 석탑으로, 주변에 석재와 기와조각이 널려 있어 건물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닥돌에서 머리장식에 이르기까지 100여 개가 넘는 석재로 짜여져 있으며, 전탑형의 5층탑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가 10m에 이른다. 국보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리장식을 얹고 있는 거대한 모습이다. 탑신부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龕室)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지붕돌의 아래·윗면은 전탑(塼塔:벽돌로 쌓아올린 탑)에서와 같이 계단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이 남아 있다.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인 2단의 기단을 형성하고 있지만, 기둥조각을 새기지 않은 탑신의 몸돌이나 지붕돌의 모습은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안동과 의성지역에서 유행했던 모전석탑(전탑의 양식을 모방한 석탑) 계열로 보여지며, 웅장하고 세련된 통일신라 석탑의 우수한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앞에서 [16:15]

 

▲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16:17]

 

▲ 서황사 대웅전을 배경으로 [16:18]

 

▲ 시원하게 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16:20]

 

▲ 붓꽃이 피어 있는 화단 [16:21]

 

▲ 정자에 있는 의자에 앉아 [16:24]


17:04   주변 경치가 좋은 속리산 휴게소에 들렀다. 휴게소 건물 오른쪽으로 구병산 능선이 보이고, 건물 맞은 편에는 시루봉이 우뚝 솟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곳이다. 보은군 서원리에서 시작해서 구병산, 속리산 천왕봉, 문장대, 관음봉, 묘봉, 상학봉을 거쳐 활목고개까지 이어지는 능선을 충북 알프스라고 한다. 충북 알프스 산행 코스는 특허청에 등록이 되어 있다. 나는 물론 다녀온 코스다. 휴게소를 떠나 무사히 청주에 도착, 장인 어른 성묘와 그에 곁들인 선산 관광을 마무리했다.


▲ 속리산 휴게소에서 바라본 구병산 능선 [17:05]

 

▲ 속리산 휴게소 바로 옆에 솟아 있는 시루봉 [1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