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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트레킹/일본 대마도

2008.10.10. [대마도 트레킹 1] 부산→이즈하라

by 사천거사 2008. 10. 10.

대마도 트레킹 1일차

◈ 일시: 2008년 10월 10일 금요일

◈ 출발: 부산 

◈ 도착: 이즈하라 

◈ 회원: 최대영 부부, 이효정 부부


06:00   눈을 떠 창밖을 보니 서서히 하늘이 붉어지며 아침 해가 떠오른다. 아직 작업이 시작되기 전이라 이리 저리 서 있는 부두의 크레인들은 미동도 없으며, 긴 목만 빼든 채 점점 밝아오는 아침 햇살을 맞고 있었다. 바다의 일출이 이런 모습이구나. 일단 모텔 밖 음식점에 가서 명태탕을 아침으로 먹었다. 국물은 시원하고 맛이 있는데 반찬이 조금 짠 것이 흠이었다. 국제여객터미널 건너에 있는 주차장에 하루 7,000원 씩 주고 차를 맡긴 다음 터미널을 향했다.


▲ 모텔에서 내려다본 부산항 [06:27]

  

▲ 여명이 밝아오고 있는 부산항 [06:27]  

 

▲ 해가 뜬 부산항의 모습 [06:35] 

 

▲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앞의 아침 풍경: 우리가 숙박한 모텔도 보인다 [08:12]


08:20   부산국제여객터미널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많다. 모두 대마도 가는 사람들인가? 그렇다. 우리를 2박 3일 동안 안내할 김인영 가이드를 만난 다음 출국수속을 했다. 대마도도 명색이 외국이라 절차가 공항이나 진배 없었다. 단, 짐을 갖고 탈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우리 팀은 모두 20명인데 1박2일 팀이 10명 포함되어 있었다. 9시 40분에 탑승을 시작한다고 해서 하릴없이 기다렸다.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거 아냐?

 

드디어 탑승, 10시에 출발. 우리가 타고 갈 배는 대아운수에서 운영하는 씨플라워였는데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대마도로 향하고 있었다. 뭐하러 가는 사람들인가? 관광? 낚시? 등산? 차림으로 보건데 낚시나 등산을 하러 가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대부분이 관광 목적인 것 같다. 대마도에 관광거리가 뭐가 있나? 12시가 가까워지자 도시락이 지급되었다. 맛은? 먹을 만 했다. 오른쪽으로 대마도가 보이는데 배는 계속 달린다. 이즈하라 항은 대마도의 남쪽 끝에 있다. 남북의 길이가 81km이니 짧은 거리는 아니다.


▲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입구

 

▲ 터미널에서 출국수속을 기다리며 [09:07]  

 

▲ 승선을 하기 위해 출발 [09:39] 

 

▲ 목적지 이즈하라 항의 모습 [12:58]


14:05   대마도 이즈하라 항에 도착, 입국수속이 시작되었다. 지난 여름 후지산에 가기 위해 나고야 공항에 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지 지문을 찍고 얼굴 사진을 찍는다. 검색대가 적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대마도를 찾는 사람들이 주로 한국인들이라 시설 투자를 안 하는 건가? 벽에 붙은 안내문들이 온통 한글로 되어 있어 일본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김인영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대마도는 한국 사람 때문에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터미널을 벗어나니 바로 시내다. 오늘은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주요 볼거리를 도보로 관광을 하는 날이다. 이즈하라 시내 자체 규모가 얼마 안 되고 또 볼거리들이 인접해 있어 특별한 이동수단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즈하라 시는 우리나라의 작은 읍 정도 규모라고 보면 된다. 김인영 씨를 따라 제일 먼저 간 곳은 수선사라는 절이였다.


▲ 자매결연 학교 학생을 기다리고 있는 대마도 학교 학생들 [14:10]

 

▲ 김인영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팀원들 [14:15]

 

▲ 이즈하라 거리를 걷고 있는 팀원들 [14:18]

 

▲ 대마도 이즈하라 시내 거리 모습 [14:25]

  

▲ 거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장보살 집 [14:38]


14:41   修善寺(슈젠지)에 도착. 일본의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듯이 이곳도 개인 사찰인데 절집 오른쪽에 납골당이 있었다. 수선사에서 눈여겨 볼 것은 최익현선생순국비다. 구한말 대유학자이자 구국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은 대마도에 유배되어 순국하였다. 대마도에서 감금 3년형을 받게 된 최익현은 1906년 8월 28일 아침 이즈하라에 호송되어 왔다 1907년 1월 1일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는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수선사에서 치뤄졌으며 유해는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수선사에 비를 세웠다.

 

선생의 순국비에 묵념을 한 후 김인영 씨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우리는 작은 우산을 2개 준비를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우왕좌왕이다. 다행이도 비는 곧 그쳤고 나머지 관광에 큰 무리가 없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일본에서는 사찰이 하나의 경제수단이고 스님은 직업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수선사로 올라가고 있는 팀원들

 

▲ 수선사에 있는 최익현 선생 순국비 [14:42]

 

▲ 수선사에 있는 납골당 [14:45]

 

▲ 수선사에 있는 지장보살들 [14:46]


15:13   국분사에 들렀다. 국분사도 개인 사찰인데 규모가 큰 편이었으며 뒤쪽으로는 모두 납골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일본은 사람이 죽으면 99.9%가 화장을 한 다음 납골당에 모신다. 이 국분사에는 친일파 이완용이 쓴 국분상태랑 묘비가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의 매국적 행위를 볼 수 있는 생생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대마도 출신으로서 한어에 능통한 國分象太郞은 이등박문의 비서로서 한일합병의 통역과 조약문을 작성한 공로로 훈장은 받은 자이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글씨 만큼은 명필이었다.


▲ 국분사로 들어가고 있는 팀원들: 우리나라의 일주문 형식이다

 

▲ 국분사 절집 앞에서 [15:18]

 

▲ 국분사에 있는 납골당들 [15:20]

 

▲ 폐기처분 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무연고 납골당 [15:26]

 

▲ 이완용이 쓴 국분상태랑 묘비 [15:28]

 

▲ 국분사 납골당 모습 [15:34]


15:43   나카라이토슈 문학관에 들렀다. 나카라이토슈는 대마도 출신으로 근대 일본의 신문기자이며 해외특파원 1호이다. 부모의 직업을 따라 두 차례에 걸친 부산 생활로 韓語에 능숙했다. 춘향전을 오사카-아사이신문에 연재했으며 현재 사용되는 5,000엔짜리 지폐의 여성 인물인 이쿠치의 스승이자 연인으로 유명하다. 문학관은 작은 건물이었는데 안에는 그에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문학관을 나와 도로 옆에 있는 팔번궁 신사를 지나쳤다. 일본에는 흔하고 흔한 게 신사다.


팔번궁신사

 

대마도에서 제일 유명한 신사로 연중무휴에 입장료는 없으나 보물전 관람은 따로 돈을 내야 한다.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인 신공황후를 받들고 있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의 현장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보물관에 있는 36歌仙 두루마리 그림이 장관이며, 안덕천왕을 모신 왼편 신사(이마미야 진자)에서 고니시 유끼나가의 딸로 19대 대마도주 소요시모토와 결혼한 고니시 마리아를 제사지내고 있다.


▲ 나카라이토슈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길

 

▲ 4각정자에서 김인영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팀원들 [15:45]

 

▲ 문학관 건물 앞에서 [15:47]

 

▲ 문학관에 있는 펌프 [15:48]

 

▲ 팔번궁신사 모습 [15:59]

 

 ▲ 이즈하라 시내 거리 모습 [16:02]


16:09   현립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에 도착. 1978년 12월에 개관되어 현내의 문화재, 고고역사자료, 민속자료, 종가문고 등의 귀중품을 수록 전시하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그림 두루마리는 볼 만하다. 자료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는 고려문이 있고 왼쪽에는 조선국통신사비가 세워져 있다. 자료관 관람을 마친 다음 바로 옆에 있는 덕혜옹주결혼기념비로 이동.


고려문

 

옛 이즈하라의 성문으로 현 이즈하라 소재 향토자료관 입구에 있다. 에도시대(1600~1868)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성대하게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 고려문이라 하였다. 현재의 향토자료관에 있는 이 고려문의 형태는 태풍으로 인해 훼손된 것을 1989년에 복원한 것이다.


조선국통신사비

 

1697년부터 1811년까지 210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1992년 2월 13일에 세운 비석으로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나가사키 현립 자료관 옆에 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에서 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파하여 일본인들에게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1811년 일본의 易地聘禮(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의 접경지역에서 예를 다한다) 정책에 의하여 12차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 머물다 귀국하였고, 이때부터 통신사의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현재 대마도에는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아리랑 축제의 일환으로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고 있다.


▲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맞이한 고려문

 

▲ 조선국통신사비 앞에서 김인영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팀원들 [16:10]

 

▲ 조선국통신사비 앞에서 최대영 유승숙 부부 [16:26]

 

▲ 조선국통신사비: 웃으면 복이 와요 [16:27]

 

▲ 역사자료관 건물 앞에서 단정한 자세로 [16:34]

 

▲ 誠信之交隣 비문: 이웃끼리 사귈 때에는 성실하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 [16:35]

 

▲ 조선통신사비 앞에서 단체로 [16:38]


16:45   성문을 하나 통과하자 잘 꾸며진 정원이 나타나고 정원 끝부분에 덕혜옹주결혼봉축비가 서 있었다. 김인영 가이드는 덕혜옹주에 얽힌 여러가지 비화를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김인영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눈은 자꾸 아리아케 쪽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아리아케의 전위봉이 잘 보였다. 내일 우리가 오를 곳이다.

 

여기서 일단 관광은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문화교류센터 건물로 갔다. 이곳은 슈퍼마켓과 100엔샵을 겸하고 있는 건물이었는데, 슈퍼마켓에서 내일 산행에 필요한 간식 거리를 조금 샀다. 엔화를 많이 준비하지 않아서 많이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다. 대마도에서는 면세점 외에 신용카드를 받는 곳은 아무 곳도 없단다. 물론 이 대형 슈퍼마켓에서도 카드는 통용이 되지 않았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곳이 이렇게 불편해서 어떻게 장사가 되나? 우리나라는 면 단위에서도 다 되는데...


덕혜옹주결혼봉축비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 소 타케유키 백작과 결혼하였다. 이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正惠가 있었으며, 1955년 이혼 후 1961년에 귀국한 덕혜옹주는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하였다.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


▲ 성문을 통과하고 있는 관광객들

 

▲ 덕혜옹주결혼봉축비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는 팀원들 [16:48]

 

▲ 내일 오를 아리아케 전위봉이 보인다 [16:57]

 

▲  덕혜옹주결혼봉축비 앞에서 [16:58]


18:13   저녁식사 장소인 작은 어항에 도착했다. 해물 바베큐는 원래 저녁식사이고 옵션으로 자연산 회요리를 신청할 수 있는데 가격은 한 사람에 15,000원. 이 상황에서 회를 안 먹을 사람이 있을까? 없다. 대마도 근해에서 직접 잡아 온 고기를 어선에서 잡아 내는 것부터 보여준다.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어쨌든, 맥주를 시키고 가져간 소주를 섞은 다음 자연산 회를 안주 삼아 마셨는데 회맛이 정말 기가 막혔다. 양도 많고. 오징어, 조개, 생선, 옥수수, 주먹밥, 고구마 등으로 이루어진 해물 바베큐도 먹을만 했다.

 

포식을 한 다음 숙소인 뷰호텔로 왔는데 말이 호텔이지 2층 건물에 전기온돌방이고 방음도 잘 안 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도 바다가 직접 내려다보이는 곳이라 전망 하나는 끝내주는 곳이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대마도는 물가가 비싸서 이 호텔 방값이 동경 시내의 5성급 호텔보다 비싸단다. 대마도는 숙박시설이 열악해서 그나마 이런 호텔을 잡지 못하면 민숙을 해야 하고. 대마도의 첫날 밤, 까만 바다에서 밀려오는 바다내음을 맡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 모습 [18:16]

 

▲ 자연산 회로 소주 한 잔 [18:33] 

 

▲ 자연산 회로 소주 한 잔 [18:44]

 

▲ 해물 바베큐 요리를 하고 있다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