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 둘레길 걷기
◈ 일시: 2017년 1월 31일 화요일 / 맑음, 추운 날씨
◈ 장소: 백마강 둘레길 / 충남 부여
◈ 코스: 구드래 나루터주차장 → 백제교 → 수북정 → 부산 → 백마강교 → 부소산성 → 낙화암 →
구드래 나루터주차장
◈ 거리: 14.74m
◈ 시간: 3시간 59분
◈ 회원: 이방주, 이효정(2명)
07:00 오늘은 충남 부여에 있는 백마강 둘레길을 걷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부여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의 수도였기에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백제유적지구 8곳 중에서 4곳이 부여에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부여읍에서 조성한 백마강 둘레길은 코스 길이가 26km에 달하는데 오늘은 15km 남짓 거리를 걸을 예정이다. 오늘 둘레길 걷기를 함께 할 백만사 회장님을 사천동 천주교회 앞에서 픽업, 서청주나들목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한 후 남쪽을 향해 달려갔다. 남공주나들목에서 논산천안고속도로를 벗어나 40번 국도를 따라 부여까지 달려간 후 금강변에 있는 구드래나루터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싸한 아침 공기를 맡으며 백제교 쪽으로 걸어가는 길, 왼쪽은 골프연습장, 야구장, 축구장 등이 조성되어 있는 체육공원이고 오른쪽으로는 공주를 거쳐 내려온 금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백마강은 어디에 있는 거지? 백마강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충청남도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금강변 부여읍(扶餘邑) 정동리의 앞 범바위(虎岩)에서부터 부여읍 현북리 파진산 모퉁이까지의 약 16㎞ 구간을 백마강이라 한다. 백마강 건너편으로 오늘 걸을 코스에 들어 있는 부산이 보였다.
백제교 교각 옆에 도착해 왼쪽길을 따라 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백제교를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녹았던 눈이 얼어붙어 길이 몹시 미끄럽다. 백제교 입구에 올라서자 이정표가 보이는데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신동엽 시비가 있다고 해서 들러보기로 했다. 4.19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신동엽은 40세에 지병으로 죽을 때까지 '껍데기는 가라'라는 대표작 외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신동엽 시비에는 1989년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산에 가슴에'란 시가 새겨져 있었다.
백제의 수도
백제한성은 한강을 기준으로 하남위례성과 하북위례성으로 나뉜다. 하남위례성은 백제의 건국 초부터 475년까지 그 수도였으며 일반적으로 서울 몽촌토성, 풍납토성 및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중 한 곳으로 비정된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세력이 서울의 한강 이북 지역에 정착했다가, 낙랑, 말갈 등 북쪽으로부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좋고 땅이 기름진 한강과 남한산 사이의 이 지역(현 서울 송파구, 강동구 및 하남시 서부)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웅진은 곰나루, 고마나루 또는 고마나리로도 불리며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의 개국왕 온조는 기원전 18년 하남 위례성에 첫 번째 도읍을 정했지만 고구려 장수왕에게 함락되고 백제의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기원 후 475년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 때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현재의 충남공주시다. 사비성은 백제 성왕 16년(538)에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면서 웅진에서 천도한 백제의 수도이다. 현재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이며, 유적으로는 부소산성, 낙화암, 정림사지 석탑 등이 있다.
▲ 구드래나루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08:44]
▲ 백마강 구드래 나루터 표지석 [08:45]
▲ 백마강변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길을 걸어간다 [08:46]
▲ 백마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부산 [08:54]
▲ 멀리 백제교가 보인다 [09:03]
▲ 백제교 아래에 도착 [09:07]
▲ 백제교 입구에 서 있는 이정표 [09:14]
▲ 석림 신동엽 시비 [09:18]
09:21 백제교 입구에 도착했다. 백제교는 부여읍과 규암면을 잇는 금강의 다리로 구교와 신교가 있는데 구교는 자전거와 보행자용 도로, 신교는 자동차용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구교 입구에는 '백제 브릿지 파크'라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다리를 공원처럼 꾸며놓았나 보다. 백제교를 거의 다 건너가면 왼쪽으로 '자온대'라는 절벽이 있는데 그 위에 수북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수북정은 부여팔경에 속한다. 수북정 아래에 있는 암벽에 새겨진 '자온대'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백제교를 건넌 후 육교를 건너 자전거 도로에 들어섰다. 금강 둔치를 따라 나 있는 자전거길은 평일이라 그런지 아주 한산했다. 부산으로 올라가기 위해 마을길에 들어섰다. 길 오른쪽으로 부산서원이 보인다. 부산서원은 조선 인조, 효종 대에 정계와 학계에서 활약한 신독재 김집 선생과 백강 이경여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1719년에 부여지역 유림들의 공론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된 해에 왕으로부터 사액하여 부산서원이 되었다. 진변리 마을회관 옆을 지나 부산 올라가는 길 들머리를 향했다.
▲ 백제교 구교 앞에 서 있는 '백제 브릿지 파크' 표지판 [09:21]
▲ 백제교에서 바라본 백마강과 부여대교: 금강4경이다 [09:26]
수북정과 자온대
수북정은 부여팔경(扶餘八景)의 하나로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동에는 부소산(扶蘇山)과 나성(羅城)이 있고 정자 밑에는 백마강(白馬江)이 맑게 흐르고 있다. 수북정은 조선 광해군(1608∼1623) 때 양주(楊州) 목사(牧使) 김흥국(1557∼1623)이 건립하였다 하며,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 불린다. 김흥국(金興國)은 김장생(金長生), 신흠(申欽) 등과 친교가 매우 깊었으며, 지금도 신흠의 수북정(水北亭) 팔경시판(八景詩板)이 걸려 있다. 수북정은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수북정 아래쪽에 있는 자온대(自溫臺)는 백제시대 왕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할 때 이 바위를 거쳐가곤 했는데, 왕이 도착할 때마다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구들돌이라 명명했다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자온대라 불려오며, 암벽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자온대(自溫臺)라고 쓴 친필이 음각 유존(遺存)되어 있다.
▲ 자온대와 수북정 [09:29]
▲ 육교를 건너간다 [09:33]
▲ 자전거 도로를 따라 진행 [09:38]
▲ 백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은산천 뒤로 부산과 부소산이 보인다 [09:40]
▲ 백마경 둔치에 조성된 정림공원에 나 있는 자전거길 [09:47]
▲ 백마강길(부산) 쪽으로 진행 [09:50]
▲ 진변리 마을회관 [09:54]
▲ 이사명의 처 가림 조씨 및 이희지의 처 연일 정씨 정려각: 향토유적 제117호 [09:56]
09:57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오른쪽으로 부산 올라가는 길이 열려 있다. 들머리에 있는 안내판에는 오산, 일산과 함께 백제시대 신인이 살고 있던 세 개의 산 중 하나인 부산이 청주에서 떠내려왔다고 적혀 있었다. 멀리서도 왔네. 해발고도가 107m에 불과해서 정상에 오르는 데에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부산 정상부에는 별 다른 표지석은 없고 운동기구와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산 오른쪽에는 대제각이라는 누각이 있는데 오늘은 그냥 지나치기로 하고 곧바로 하산에 들어갔다.
▲ 부산 올라가는 길 들머리에 있는 안내판 [09:57]
▲ 부산으로 올라가는 길 [10:00]
▲ 길 오른쪽 산신각 [10:01]
▲ 운둥기구가 있는 부산 정상부 [10:05]
▲ 해발 107m 부산 정상에 있는 삼각점 [10:06]
▲ 부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중 [10:09]
▲ 백마강길(문화단지) 쪽으로 진행 [10:15]
▲ 도로에 내려서면 만나는 자전거길 이정표들 [10:15]
10:16 금강 둔치에 조성되어 있는 자전거길에 들어섰다. 금강이 워낙 큰 강이다 보니 둔치도 넓고 따라서 여러 가지 시설을 조성할 공간도 그 만큼 넓다. 잠시 후 자전거길은 차량이 통행하는 일반도로와 합쳐졌다. 길 왼쪽으로 왕흥사지가 보인다.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에는 규모가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절터가 참 많이 남아 있다. 백제시대에 불교가 융성했다는 증거인데 그 많은 사찰들이 없어져 버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
▲ 백마강 둔치에 나 있는 자전거길에 진입 [10:16]
▲ 자전거길을 따라 진행 [10:18]
▲ 차량과 자전거가 공유하는 길 [10:29]
부여 왕흥사지
왕흥사(王興寺)는 백제 부여에 있던 사찰로 577년에 세워졌으나, 666년 백제 멸망 후에 폐허가 되어 현재는 절 터만 남아 있다. 2001년 2월 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27호로 지정되었다. 577년에 백제 위덕왕이 자신의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창건하였다. 《삼국사기》에는 600년 봄 정월에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삼국사기에 660년 11월 5일에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계탄(灘, 부여강)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고, 7일에 이겨 700명을 목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절터는 폐허가 되었다.
1934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일원에서 왕흥명 기와와 석조불 좌상,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면서 처음으로 왕흥사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백제문화권 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부여 왕흥사지(사적 제427호)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제5차 발굴조사를 마치면서, 2004년 6월 15일 "왕흥사는 탑지와 금당지가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1금당식'이며 이는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 구조인 것으로 확인됐다" 라는 내용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 국립부여박물관은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터에서, 백제시대 사리 장엄구를 발견하여 같은 해 10월 24일 일반에 공개했다.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 보물 제1767호.
▲ 길 왼쪽 부여 왕흥사지 [10:34]
▲ 갈대밭 뒤로 보이는 부소산 [10:38]
▲ 길 오른쪽 백마강 레저파크 [10:46]
▲ 백제문화단지와 40번 국도를 이어주는 백마강교 [10:53]
▲ 백마강교 입구로 올라가는 길 [10:55]
10:58 백마강교 입구에 도착했다. 금강과 백마강 표지판이 연달아 서 있어 헷갈릴 수도 있는데 그냥 '부여 지역을 흘러가는 금강을 백마강이라고 부른다' 정도로 알면 된다. 고고히 흘러가는 백마강에는 이름 모를 철새들이 떼를 지어 물 위를 앉아 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데 그 모습이 보기에 참 좋다. 백마강교를 건넌 후 오른쪽 둔치에 나 있는 길을 따라 부소산성 쪽으로 진행, 도로 건너 부소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려 있어 들어섰다.
▲ 백마강교 입구에 도착 [10:58]
▲ 백마강교를 위를 날고 있는 철새들 [11:00]
▲ 백마강교에서 바라본 부소산 [11:02]
▲ 다리 건너 4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진행 [11:06]
▲ 4거리에서 바라본 백마강교 [11:07]
▲ 둔치 왼쪽을 따라 나 있는 길 [11:13]
▲ 백마강길(부소산) 쪽으로 진행 [11:20]
▲ 부소산성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 [11:21]
▲ 부소산성을 향하여 [11:23]
11:24 부소산성에 올라 벤치에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뭐니뭐니해도 부소산성의 가장 큰 볼거리는 낙화암과 고란사, 둘 다 예전에 한 번 들른 적이 있는데 그 때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낙화암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한다. 궁녀들의 한이 서려 있는 낙화암에서 고란사로 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고란사 뒤에는 고란정이란 샘이 있는데 이곳에 고여 있는 고란약수를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고 한다. 약수 한 잔 마시고 고란사를 떠나 다시 가파른 계단길에 올라섰다.
부소산성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 지금의 부여 낙화암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부소산성이 있다. 산이라고 하지만 해발 1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덕으로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던 곳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백제의 마지막을 기억해보자. 입구에서 올라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먼저 삼충사라는 사당이 나오는데 백제 말의 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임금에게 직언을 하다 감옥에 갇혀서도 나라 걱정을 했던 성충, 성충과 함께 임금께 고하다 유배를 당한 흥수, 황산벌전투로 잘 알려진 계백 등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보자.
삼충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동쪽을 향하고 있어 해맞이를 할 수 있는 영일루가 나오며, 그 뒤편으로는 곡식창고 자리였던 군창 터가 있다. 낮은 울타리로 둘러놓아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이곳에서 불탄 쌀이나 콩들이 발견되는데 바로 군량을 적에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 불을 낸 흔적이다. 부소산성 가장 꼭대기의 사자루는 달을 바라보는 서편을 향하여 자리하고 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았는데 내려가는 길에는 더욱 특별한 장소들이 기다리고 있다. 낙화암이 그곳으로, 삼 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의 타사암이라고 하니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풍경을 마냥 즐기기에는 슬픈 이야기이다. 낙화암 아래에는 한 번 먹을 때마다 3년이 젊어진다는 약수로 유명한 고란사가 있으니 내려가서 고란사도 둘러보고 약수도 마셔보도록 하자.
▲ 부소산성에 올라 벤치에서 잠시 휴식 [11:24]
▲ 부소산성 숲길 [11:37]
▲ 부소산성 낙화암으로 가는 길 [11:41]
▲ 낙화암에서 떨어진 궁녀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궁녀사 [11:50]
낙화암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 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성왕이 국가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위덕왕·무왕·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제는 국운을 다했던지 의자왕도 정사를 소홀히 하고, 나라가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가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처럼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
▲ 1929년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백화정 [12:05]
▲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교 [12:07]
고란사와 고란약수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고란사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고란초의 전설이 유명하며, 백마강을 바라보는 주위경관이 비길데 없이 아름답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백제시대에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하여,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마침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불렀다. 약수를 떠오는 사람들이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임금님이 약수를 즐겨 마셔, 원기가 왕성하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 걸리고 사셨다 한다. 또한, 고란약수를 한 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도 있다.
▲ 주위 경관이 아름다운 고란사 [12:14]
▲ 고란사 대웅보전 내부 [12:15]
▲ 한 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고란약수 [12:16]
▲ 고란사에서 바라본 백마강교 [12:17]
12:38 부소산성 탐방을 마치고 구드래나루터 주차장으로 가는 길, 마침 점심 때라 회장님이 예전에 들른 적이 있다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구드래 돌쌈밥'집에 들러 주물럭돌쌈밥을 시켰는데 돌솥밥, 주물럭, 쌈, 반찬 등이 아주 푸짐하다. 인터넷에 맛집으로 올라온 이유를 직접 와보니 알겠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능산리 고분군을 향해 차를 몰았다. 벡제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에는 모두 7개의 왕릉이 있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고분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성이 있다. 나성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나성은 사비성의 외곽방어용으로 쌓은 토성인데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라서 현재 복원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성을 둘러보는 것으로 오늘 중요 일정은 모두 끝이 났고, 이제 차에 올라 청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 궁남지에 연꽃이 필 때 쯤 다시 한번 와봐야겠다.
▲ 부소산성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12:38]
▲ 점심을 먹은 '구드래돌쌈밥' 식당 [12:43]
▲ 주물럭 돌쌈밥 점심 상차림 [12:52]
구드래 조각공원
부소산 서쪽 기슭을 흐르는 백마강에 이웃해 있다. 백마강과 어우러진 자연공원으로, 1983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1996~1997년에 조각예술품을 설치하여 조각공원으로 새단장하였다. 구드래라는 이름은 이 지역의 고유지명이다. 공원 아래 나루터는 삼국시대에 외국 사신들이 부소산성을 드나들던 유서깊은 포구로 지금은 유람선이 다니고 있다. 입장료는 없고 하루 24시간 문을 열며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도 활용된다. 공원 옆 부소산 기슭에 낙화암, 고란사 등이 있으며, 주변 읍내에 국립부여박물관,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9), 궁남지(사적 135) 등 유적지가 많다. 부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나온다.
▲ 구드래 조각공원 표지석 [13:23]
능산리 고분군
양지 바른 곳에 뉘인 백제 왕들의 무덤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로 들어가는 길가에 자리한 무덤 군이다. 현재 총 7기의 고분이 이곳에 있는데 부여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백제 왕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비시대의 왕이 여섯이니 대강 그 수가 비슷하지만 무덤의 대부분이 도굴당하여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다. 처음 발굴을 시작한 1호분에서 고구려 무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신도가 무덤 내부에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 교류 및 당시 백제 문화에 도교가 수용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백제 고분 양식의 변화는 백제의 천도과정과 함께 이해하면 되는데 초기 백제가 자리한 한강 유역에서의 백제 무덤들은 계단식 무덤인 적석총으로 서울의 풍납동 등에 그 형태가 남아 있다. 고구려 무덤인 장군총 등과 유사한 것으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를 뒷받침해 준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백제는 수도를 지금의 공주, 웅진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 시기 백제 무덤의 대표는 무령왕릉이다. 벽돌로 쌓아 만든 전축분 형태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 묘제문화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당시 백제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도읍을 정한 사비, 부여의 무덤 형태는 돌방무덤으로 내부에 방을 만들고 주변을 흙이나 돌 등을 이용해 봉토한 형태로 능산리 고분이 그런 형태이다. 1993년 능산리고분군의 한 진흙 수로에서 우연하게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금동대향로이다. 이것이 발견되면서 백제뿐 아니라 우리 고대의 공예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라고 이야기되었으니 엄청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능산리 고분군 [13:46]
▲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능산리 고분군 [13:49]
▲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능산리 고분군 [13:50]
▲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능산리 고분군 [13:54]
부여 나성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성곽. 둘레 약 8.4㎞. 사적 제58호. 면적 63만4056㎡.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성으로 사방에 문지(門址)가 있다. 이 나성은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이며 축성 연대는 성왕대(523∼554)를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성벽은 부소산성(扶蘇山城)의 동문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는 청산성(靑山城)을 거쳐 남쪽으로 석목리 필서봉(筆書峰) 상봉을 지나 염창리 뒷산의 봉우리를 거쳐 금강변까지 토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현재는 청산성 동쪽으로 약 200m와 석목리에서 동문다리까지 그리고 필서봉에서 염창리까지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동쪽으로 논산으로 왕래하는 동문지와 공주로 통하는 동북문지가 있다. 동문지 부근의 나성 단면을 조사한 결과 저변 13m, 상변 4m, 높이 5.2m이며 황토질흙으로 토축되어 있다. 이곳에서 서쪽 약 300m 지점에 1978년 상수도사업으로 나성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저변 13m, 상변 2m, 높이 5.2m의 토축이었으며 진흙으로 다져서 만든 판축(版築)의 흔적이 있다. 표고 121m의 가장 높은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린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 있다. 나성의 끝부분은 적심석(積心石)을 넣고 축조한 부분이 노출되어 있다. 서쪽 나성은 부소산성 서문 바깥 지점을 기점으로 하여 현재 유스호스텔을 거쳐 관북리·구교리·유수지(遊水池)·동남리·군수리·성말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동쪽 나성문지는 구아리로 통하는 서북문지와 장승배기 남쪽에서 규암으로 통하는 서문지가 있다. 남쪽 나성은 동리·중리·당리의 뒷산에 연결하여 축조하였으며, 주초석과 문초석이 남아 있다.
나성 안에는 백제시대 왕궁을 비롯, 관아·민가·사찰·상가 및 수도수비를 위한 방위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상부·중부·전부·하부·후부의 오부제도(五部制度)를 두고 다스렸다. 전체적인 구조상 남쪽은 금강이 흐르고 있고 또 수로도 파 놓아서 이 나성은 자연적인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주서 周書》에 따르면, 도성 안에는 민가가 있었으며 방(方)마다 500인씩 총 2,500인의 군대로 방위에 임하였다 한다. 나성이 완성되고 오부제가 완성된 시기는 7세기 초인 무왕 때로 추정되고 있다. 이 나성은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왕도의 보호를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 중요한 성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작 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 사적 제58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나성 [14:07]
▲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절터 [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