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5. [국내行事 213] 성령이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 일시: 2025년 5월 25일 일요일
◈ 장소: 서운동성당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서운동 90-1
◈ 회원: 아내와 함께
한국 교회는 해마다 5월의 마지막 주일을 ‘청소년 주일’로 지낸다. 청소년들이 우정과 정의, 평화에 대한 열망을 키우며 자라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을 전함으로써 교회가 그들과 함께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5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세계 젊은이의 날’을 제정하였는데, 우리나라는 1989년부터 5월의 마지막 주일을 이날로 지내 왔다. 1993년부터 ‘청소년 주일’로 이름을 바꾸어 지내고 있다.
오늘은 부활 제6주일이며 청소년 주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이들 안에 사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청하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4,23ㄴ-2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가톨릭 신자가 성호를 그을 때 외우는 성호경이다. 여기서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어떠한 존재인가? 성부는 하느님, 성자는 예수님을 의미한다. 그러면 성령은? 성령은 유일신 야훼가 가진 삼위일체의 위격 중 하나로, 거룩하고 신성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같은 본질을 공유하되 그 위격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각 위격 사이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으며, 삼위는 모두 각각 온전한 하느님이다. 간단히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유일신인 하느님의 서로 다른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성령을 느낄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를 때 언제든 하느님께 청한다면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서 도와주신다. 성령은 형체가 없기에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늘 우리 곁에 있으며,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요약하면, 성령은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에 성부와 성자의 사업을 지상에서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하느님의 다른 모습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떻게 다를까?
부활 전에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보고 군중은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이라고 외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평화와 영광을 가져올 새 임금의 도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군중이 기대했던 평화는 바로 그런 평화였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평화, 힘 있는 왕권이 개입한 결과, 다시 말해 로마 제국의 점령에서 예루살렘을 해방시킬 강력한 메시아가 가져올 그러한 평화를 기다렸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사회적 평화의 회복을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방식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무력과 정복, 다양한 형태의 제재로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의 전략을 따르는 평화가 아니다. 세상의 전략을 따르는 이 평화는 사실 전쟁 중에 갖는 휴전일뿐이다. 주님의 평화는 온유함과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 다시 말해 다른 이들의 짐을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악과 죄와 죽음을 짊어지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그분의 평화는 타협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이 같은 온유하고 담대한 평화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수님의 평화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 않는다. 무력에 의한 평화도 아니다. 복음의 무기는 기도, 온유한 사랑, 용서, 조건 없는 이웃 사랑, 모든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평화가 세상에 도래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최근에 듣고 본 것처럼, 세상의 권력은 파멸과 죽음만을 남기는 반면, 예수님의 평화는 평화를 맞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역사를 건설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 첫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어떻게 인사하셨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셨다. 이것이 바로 승리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사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게 된다. 그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나면 과연 완전히 평화로운 상태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난관을 이겨내고 나면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이게 인간의 삶이다. 따라서 세상이 주는 평화는 일시적이다. 영원한 평화는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이 주는 평화는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는 일이 없도록 해주는 평화다. 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희생과 봉사, 사랑으로 난관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평화의 의미다. 이 평화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
▲ 청주 서운동성당 [10:03]
▲ 서운동성당 성모동굴 [10:03]
▲ 서운동성당 제대 [10:05]
▲ 미사가 끝났어요 [11:46]